
염경엽(가운데) 넥센 감독, 양상문(왼쪽) LG 감독은 ‘지장 (智將)’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11월 8일 목동구장 감독실에서 만난 염경엽 넥센 감독은 “얼굴이 좋아 보인다”는 기자의 덕담에 이렇게 답했다. 염 감독은 그것도 모자라 양손으로 허리띠를 만지고선 “앞으로 체중이 몇㎏까지 줄지 모르겠다”며 “포스트시즌 들어 제대로 잠을 잔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털어놨다.
역설적이게도 그 즈음 염 감독은 팬들 사이에서 ‘염갈량’이라 불렸다. 만년 하위팀 넥센 사령탑을 맡고서 지난해에 이어 올 시즌에도 팀을 포스트 시즌 진출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야구계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김응용 전 한화 감독은 “요즘 젊은 사령탑 가운데 염경엽이 제일 나은 것 같다”며 “선수단 운영, 작전, 경기 진행 등 뭐 하나 부족함이 없다”고 칭찬했다. 덧붙여 “넥센 성적이 그렇게 좋은데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가 있겠어. 염 감독처럼 행복한 감독은 류중일(삼성)밖에 없지 않아?”하고 농을 던졌다.
공 300개 하나라도 놓쳐선 안돼
그렇다면 어째서 염 감독은 한국시리즈 진출 사령탑인데도 불면의 밤을 보낸 것일까. 염 감독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나도 코치일 땐 팀 성적만 좋으면 감독보다 행복한 자린 없는 줄 알았다”며 “그러나 정작 감독이 되고 보니 팀 성적이 좋아도 스트레스를 받는 게 이 자리란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넥센을 한국시리즈까지 올려놨지만, 스트레스는 멈출 줄 몰랐다. 그의 일과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시리즈 기간에 넥센은 모 호텔에서 합숙했다. 지난해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을 땐 집에서 출·퇴근했다. ‘같은 서울 연고지 팀 두산과의 일전인데 굳이 합숙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염 감독의 생각과 ‘집에서 출·퇴근하는 게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될 거 같다’는 선수단의 요청을 수용한 결과였다. 하지만 두산에 2승3패로 패하며 넥센은 준플레이오프에서 떨어졌고, 이번 포스트 시즌엔 1년 전 교훈을 토대로 홈경기라도 선수단의 일체감을 높이고자 합숙을 선택했다.
포스트 시즌 기간에 염 감독이 잠에서 깨는 시각은 새벽 6시. 정규 시즌 때도 비슷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책상 위에 커피를 올려놓고 노트북으로 전날 뉴스를 점검하는 게 하루의 시작이다. 그리고 7시가 되면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전력 구상에 들어간다.
염 감독은 데이터를 중시하는 감독이라 챙기는 자료가 많다. 넥센 전력분석팀과 담당 코치들은 그런 감독 성향을 고려해 많은 자료를 준비한다. 2시간가량 데이터를 보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면 오전 10시가 훌쩍 넘는다.
이때부터 그날 타순과 투수 로테이션, 수비 포메이션 등을 짠다. 눈으론 오더지를 보지만, 귀론 일찌감치 켜둔 TV 메이저리그 중계에 집중한다. 염 감독은 아침마다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는데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게라도 해야 선진 야구의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침만큼이나 간단하게 점심을 마친 후 코치들과 모여 그날 경기를 준비한다. 자유로운 소통과 의견 개진을 중시하는 염 감독은 담당 코치들의 이야기를 모두 취합하고서 머릿속으로 이를 정리한다. 코치들과 헤어지고 호텔방으로 돌아온 염 감독은 구단 버스가 구장으로 출발하는 오후 2시까지 다시 장고(長考)에 들어간다.
염 감독은 “감독직은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침대에 누울 때까지 무수히 많은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자리”라며 “솔직히 누가 나를 대신해 판단과 결정을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구장에 도착하면 압박감은 가중된다. 말조심은 필수다. 기자들이 기다리는 까닭이다. 그나마 염 감독은 야구인 가운데 극소수인 프런트 경험자이기에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별하는 편이다. 그래서 기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재미난 건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염 감독의 한쪽 눈은 그라운드를 응시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