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본성에 관하여<br>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역, 아카넷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적 유물론과 쾌락주의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쾌락주의는 방탕이나 환락을 즐기는 게 목표가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과 절제를 좇는다. 부귀영화가 아닌 박애,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아닌 소박한 음식, 색욕보다 우정을 추구한다. 세상의 쾌락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쾌락주의 철학의 역설 같다. 플라톤학파(아카데미학파), 아리스토텔레스학파(소요학파), 스토아학파와 더불어 헬레니즘 시대의 4대 철학사조로 꼽히는 에피쿠로스학파는 여성과 노예도 받아들여 진정한 평등사상을 실천했다. 기원전 4~3세기에 걸쳐 살았던 에피쿠로스는 무신론은 아니더라도 신을 숭배하는 전통을 깨뜨린 최초의 인물군에 속하기도 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2세기쯤 뒤에 태어난 철학자이자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없었다면 오늘날 널리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에피쿠로스가 300여 권의 책을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3통의 편지와 40개의 금언뿐이라고 한다. 루크레티우스가 기원전 50년쯤에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원제 De rerum natura)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철학시집이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우주론, 윤리학, 물리학을 전해주는 대표 문헌인 셈이다.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루크레티우스를 단테, 괴테와 더불어 ‘3대 철학 시인’으로 꼽았다. 루크레티우스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게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귀족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아니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불경한 내용
유럽 역사에서 암흑기로 불리는 중세가 저물고,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될 무렵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지식인들이 가장 주목한 작품이었다. 이 책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는 ‘원자론’이다. 모든 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만들어졌다는 게 원자론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에는 창조자나 설계자가 없다고 했다. 오직 우연이 지배하는 끝없는 창조와 파괴만이 있을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태고부터 우주에선 셀 수 없이 많은 입자가 충격에 의해 뒤흔들리고 떠밀려 다양한 모습으로 온갖 종류의 움직임과 결합을 실험해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를 창조하고 구성한 것과 같은 배열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신이 아니라 원자라고 루크레티우스는 주장한다. 에피쿠로스가 사실상 완성한 ‘원자론’은 만물의 생성소멸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유물론이다. 예수와 기독교가 탄생하기 전에 나온 책이지만, 매우 불온한 사상을 지닌 책으로 취급받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조주가 있다고 믿은 반면, 루크레티우스는 신이 존재하나 절대적인 권능을 지닌 조물주가 없다는 데 방점을 찍었다.
이 책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 철학용어 ‘원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최초의 것들’ ‘물질의 본체’ ‘사물의 씨앗들’ 같은 말로 표현한다. 루크레티우스에게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무한하다. 이 세상에는 물질과 진공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죽으면 영혼도 사라진다. 다시 태어나거나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일은 없다.
인간은 한때 우주에 머무는 것이니,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루크레티우스는 역설한다. 인생 최고의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당장 고통을 수반하는 쾌락이나 언젠가는 고통을 가져올 쾌락은 피해야 한다. 사회적 지위나 권력, 재산도 별 의미가 없다. 인간은 결코 이 세상에서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게 루크레티우스의 지론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구성하는 것들과 똑같은 물질로 돼 있다. 인간은 물질계에서 벌어지는 훨씬 더 큰 물질순환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인간 역시 하나의 종으로서 영원하리라고 믿어선 안 된다.
중세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으며, 불경하다고 생각했다. 우주가 무한한 진공 속에 존재하는 원자들의 충돌로 형성됐다는 내용은 터무니없게 들렸다. 총 7400행에 달하는 이 시는 놀랄 정도로 수준 높은 지적 야망으로 가득하다. 시의 언어는 까다롭고, 구문은 복잡하다.
이 책은 내용 못지않게 기묘한 운명이 더없이 흥미롭다. 기원전 50년쯤 쓰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부터 매료했다. 동시대의 인물 키케로와 오비디우스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키케로는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적 원리를 강하게 비판했으나, 이 책의 놀랄 만한 힘은 인정했다.
기묘한 운명
하지만 서로마제국 멸망 후 차츰 잊힌 것은 물론 책 자체도 구하기 어려워졌다. 9세기 이후 프랑스와 독일 수도원 두세 곳에서 떠돌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적대적인 이교(異敎)에 의해, 그다음에는 역시 적대적인 기독교에 의해 헛된 몽상, 위험한 생각으로 가득 찬 사상이라고 낙인찍혀 이동이 억제됐다.
500년 뒤쯤인 1417년 ‘책 사냥꾼’이란 별명을 지닌 포조 브라촐리니가 독일의 한 수도원 서가에서 이 책의 옛 필사본을 발견하면서 드라마 같은 미래가 시작된다. 에피쿠로스 철학을 매장해버린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가톨릭 수도원에 이 책의 사본 한 권이 흘러든 것부터 우연이었다. 썩어 없어질 운명을 기다리고 있던 그 사본을 9세기의 어느 날 한 수도사가 베끼기 시작한 것도 대단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그 필사본이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포조의 손에 떨어지게 된 것 역시 엄청난 우연이었다. 루크레티우스가 이 책에 “모든 사물은 정해진 운명의 쇠사슬에 매여 있다”고 쓴 그대로 말이다. 이 책은 출간 직후부터 무신론적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무신론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쟁점이자 불온한 논쟁의 시발점이 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계였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무신론을 단죄하는 종교재판의 심문 교본 역할을 했다. 포조의 재발견으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후인 1516년 피렌체 종교회의에 모인 고위 성직자들은 학교에서 이 책을 읽는 걸 금지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 이후 이 책의 인쇄본도 빠르게 나왔지만, 서문에는 경고문과 함께 인쇄업자의 종교적 신념과 책의 내용은 무관하다는 내용을 실어야 했다.
그럼에도 문예부흥을 알리는 전령사들은 이 불온서적에서 혁명적인 영감을 얻어 르네상스의 새벽을 열었다. 미와 쾌락의 향유에 관한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을 가장 잘 체현하고 인간이 탐구할 목표로까지 밀고 나간 게 르네상스 문화였다.
매혹적인 베누스(비너스)를 그린 산드로 보티첼리의 걸작은 이 책이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사랑과 미의 여신 베누스에 대한 찬가로 시작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기술 연구,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생한 천문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야심 찬 연구, 리처드 후커의 신학 이론에도 이 책이 스며들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정치학, 로버트 버턴의 정신질환에 대한 백과사전식 기술, 월터 롤리의 기아나 탐험기 같은 저작도 쾌락을 극대화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조르다노 브루노, 토머스 홉스, 스피노자의 지적인 대담성도 이 같은 혁명적 사고 속에서 형성됐다.
원자가 자유롭게 이탈한다
‘원자가 자유롭게 이탈한다’는 이 책의 생각은 봉건제의 속박과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계몽주의·자유주의 사상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전해줬다. 몽테뉴는 ‘수상록’에 무려 100여 행에 달하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을 정도다. 작가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루크레티우스처럼 쾌락을 추구하라고 격려한다. 아이작 뉴턴은 신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신이 창조한 원자를 쪼갤 수 없다”고 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창한 카를 마르크스는 박사학위 논문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였을 정도로 이 책에 심취해 있었다. 이 책의 다섯 종류를 소장하고 ‘에피쿠로스주의자’를 자처한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야 할 뿐 아니라 ‘행복 추구권’까지 보장하도록 명시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고대인의 원자론적 세계관을 극찬하며 연구 자료로 삼았다.
유종호 예술원 회장은 루크레티우스가 근대 형성에 영향을 끼친 과정을 읽고 ‘시도 역사를 만든다’는 글을 남겼다. 한 권의 책이 지적 혁명을 여는 드라마틱한 여정을 창조해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