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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책 이야기

르네상스의 새벽을 열다

  • 김학순 │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북칼럼니스트 soon3417@naver.com

르네상스의 새벽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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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새벽을 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루크레티우스 지음, 강대진 역, 아카넷

‘방황하는 나그네여, 여기야말로 당신이 진정 거처할 좋은 곳이요. 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善), 즐거움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에피쿠로스학파의 정원으로 통하는 문에는 이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정문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현판이 내걸렸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적 유물론과 쾌락주의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쾌락주의는 방탕이나 환락을 즐기는 게 목표가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과 절제를 좇는다. 부귀영화가 아닌 박애,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아닌 소박한 음식, 색욕보다 우정을 추구한다. 세상의 쾌락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쾌락주의 철학의 역설 같다. 플라톤학파(아카데미학파), 아리스토텔레스학파(소요학파), 스토아학파와 더불어 헬레니즘 시대의 4대 철학사조로 꼽히는 에피쿠로스학파는 여성과 노예도 받아들여 진정한 평등사상을 실천했다. 기원전 4~3세기에 걸쳐 살았던 에피쿠로스는 무신론은 아니더라도 신을 숭배하는 전통을 깨뜨린 최초의 인물군에 속하기도 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2세기쯤 뒤에 태어난 철학자이자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없었다면 오늘날 널리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에피쿠로스가 300여 권의 책을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3통의 편지와 40개의 금언뿐이라고 한다. 루크레티우스가 기원전 50년쯤에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원제 De rerum natura)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철학시집이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우주론, 윤리학, 물리학을 전해주는 대표 문헌인 셈이다.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루크레티우스를 단테, 괴테와 더불어 ‘3대 철학 시인’으로 꼽았다. 루크레티우스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게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귀족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아니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불경한 내용

유럽 역사에서 암흑기로 불리는 중세가 저물고,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될 무렵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지식인들이 가장 주목한 작품이었다. 이 책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는 ‘원자론’이다. 모든 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만들어졌다는 게 원자론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에는 창조자나 설계자가 없다고 했다. 오직 우연이 지배하는 끝없는 창조와 파괴만이 있을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태고부터 우주에선 셀 수 없이 많은 입자가 충격에 의해 뒤흔들리고 떠밀려 다양한 모습으로 온갖 종류의 움직임과 결합을 실험해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를 창조하고 구성한 것과 같은 배열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신이 아니라 원자라고 루크레티우스는 주장한다. 에피쿠로스가 사실상 완성한 ‘원자론’은 만물의 생성소멸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유물론이다. 예수와 기독교가 탄생하기 전에 나온 책이지만, 매우 불온한 사상을 지닌 책으로 취급받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조주가 있다고 믿은 반면, 루크레티우스는 신이 존재하나 절대적인 권능을 지닌 조물주가 없다는 데 방점을 찍었다.

이 책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 철학용어 ‘원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최초의 것들’ ‘물질의 본체’ ‘사물의 씨앗들’ 같은 말로 표현한다. 루크레티우스에게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무한하다. 이 세상에는 물질과 진공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죽으면 영혼도 사라진다. 다시 태어나거나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일은 없다.

인간은 한때 우주에 머무는 것이니,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루크레티우스는 역설한다. 인생 최고의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당장 고통을 수반하는 쾌락이나 언젠가는 고통을 가져올 쾌락은 피해야 한다. 사회적 지위나 권력, 재산도 별 의미가 없다. 인간은 결코 이 세상에서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게 루크레티우스의 지론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구성하는 것들과 똑같은 물질로 돼 있다. 인간은 물질계에서 벌어지는 훨씬 더 큰 물질순환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인간 역시 하나의 종으로서 영원하리라고 믿어선 안 된다.

중세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으며, 불경하다고 생각했다. 우주가 무한한 진공 속에 존재하는 원자들의 충돌로 형성됐다는 내용은 터무니없게 들렸다. 총 7400행에 달하는 이 시는 놀랄 정도로 수준 높은 지적 야망으로 가득하다. 시의 언어는 까다롭고, 구문은 복잡하다.

이 책은 내용 못지않게 기묘한 운명이 더없이 흥미롭다. 기원전 50년쯤 쓰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부터 매료했다. 동시대의 인물 키케로와 오비디우스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키케로는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적 원리를 강하게 비판했으나, 이 책의 놀랄 만한 힘은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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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 │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북칼럼니스트 soon34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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