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의 증가는 곧 일정 기간 생산을 유예받는 계층의 증가를 의미한다. 1980년대 학생운동이 정점을 찍은 것이 정치적 결과였다면, ‘신촌’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다운타운의 출현과 그 안에서 발현한 언더그라운드의 흐름은 문화적 결과였다. 들국화와 김현식의 신화는 신촌의 부흥과 궤를 같이한다. 저항과 자유의 공존, 또는 양립이 폭발했던 것이다.
이 분위기는 20대에 그치지 않았다. 10대도 마찬가지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로 불리며 심지어 언론에 보도조차 되지 않았던 시절, 20대의 정치적 고민은 10대에게 미치지 않았다. 아직 어렸던, 호기심과 감성이 발아하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주어진 건 해방감이었다. 두발 및 교복 자율화로 당시 10대는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세대였던 것이다. 시간도 많았다. 사교육 철폐는 오후와 주말, 그리고 여가를 선물했다. 인터넷은커녕 PC통신도 없던 시절이다. 문화의 보급 통로는 TV와 라디오, 잡지가 전부였다.
TV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이 기성세대까지 아우르고자 했다면, 음악 프로는 명확히 청년 세대를 겨냥해 전파의 화살을 쐈다. 1980년대까지 음반시장에서 팝과 가요의 시장점유율은 8대 2였다. 사람들은 팝을 즐겨 들었고, 음반 구입이라는 능동적 소비를 주저하지 않았다. 밤마다 심야 라디오방송에 귀 기울이며 녹음 테이프를 만들었고, 주말이면 청계천을 누비며 불법 복제 음반인 ‘빽판’을 사들였다.
당시 라디오 키드의 문화를 신해철은 이렇게 말했다. “음악 초보자는 ‘2시의 데이트’를 들으며 장르 구분과 명곡에 대한 기초를 배웠다. 김기덕을 통해 초급반을 마친 다음에는 중급반 격인 ‘황인용의 영팝스’로 건너가서 심장을 때리는 음악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다음 ‘전영혁의 음악세계’라는 마스터클래스로 넘어갔다.” 두터운 청소년층이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형성할 수 있는 시대였다.

1988년 겨울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그룹 ‘무한궤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신해철이다.
모든 창작자의 출발은 마니아다. 바꿔 말하면 마니아는 곧 창작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품는다. 팝과 록을 들으며 감수성을 키우던 청소년들은 하나둘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 1970년대 욕망이 통기타였다면 80년대 욕망은 일렉트릭기타였다. 뒤늦게 소개되기 시작한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플린 등 1960, 70년대 전설적인 밴드들과 동시대에 탄생한 헤비메탈은 음악뿐 아니라 ‘소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도대체 저런 소리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그래서 아이들은 기타를 잡았다. 그리고 시나위, 부활, 백두산 등 1세대 헤비메탈 밴드가 탄생했다. 서울 종로 파고다극장을 중심으로 주말마다 20대 초반의 헤비메탈 밴드들이 ‘항쟁’을 벌였고, 웬만한 고등학교에선 속속 스쿨 밴드가 등장했다. 어쨌든 호기심은 왕성했고 시간은 많았던 것이다.
신해철 역시 이런 라디오 키드이자 로큰롤 키드 중 하나였다. 중학생 때 1970년대 하드록에 꽂혀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했다. 수위를 달리던 성적이 곤두박질쳐 결국 아버지가 기타를 부수고 말았다는 스토리는 비단 신해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운 문화를 갈망하던 이들이 반드시 록만 소비했던 것도 아니다. 명동 뒷골목에서 유통되던 ‘논노’ 등 일본 패션잡지와 회현동 지하상가에서 몰래 거래되던 안전지대, 체커스 같은 최신 일본 음반은 거품경제의 최전성기를 누리던 멋스러운 일본 문화에 매료된 이들에게 교과서 구실을 했다. 팻 메스니를 필두로 한 동시대 재즈 뮤지션들이 소개되면서 지적이고 세련된 음악을 추구하는 일군의 젊은이들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소비가 창작으로 폭발한 해가 바로 1988년이다.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인 그해 여름, 강변가요제에서 이상은이 ‘담다디’로 대상을 수상했다. ‘담다디’의 주말이 지나고 온 월요일,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꺽다리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이 스무 살의 키 큰 아가씨는 단숨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대상을 받으면 으레 펑펑 울던 그 전 신예들과 달리 그녀는 “울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며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부모도, 친구도 아닌 “마이클 잭슨”이라고 말했다. 후일 이상은은 ‘담다디’를 준비하던 과정에 대해 “음악은 비틀스를, 비주얼은 체커스를 연구했다”고 밝혔다. 팝의 클래식과 일본 음악의 트렌드가 반영된 결과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