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호

우화는 사라지고 바람만 남았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충남 서천 갈대밭

  • 글·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김성룡 | 포토그래퍼

    입력2014-11-20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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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580만 명이라는, 당시로선 기록적인 관객몰이를 한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 병사 간의 우정을 통해 분단 문제를 휴머니즘의 시각으로 다뤘다. 한국군과 북한군이 첫 대면하는 장면은 충남 서천 갈대밭에서 촬영됐다. 우정과 비극의 시작점에는 지금도 갈대가 바람에 휘날린다.
    우화는 사라지고 바람만 남았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4년 6개월 전, 그러니까 2000년 4월 17일 오후 5시쯤 충청남도 금강 하구 갈대밭에서 박찬욱(51) 감독을 만났다. 당시 37세이던 그는 세상에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1992년 가수 이승철과 배우 나현희 주연의 영화 ‘달은…해가 꾸는 꿈’으로 한 번, 1997년 김민종, 이경영, 정선경 등이 나온 ‘삼인조’로 한 번. 그렇게 두 번 흥행에서 처절한 고배를 마신 후였다.

    이제 그는 세 번째 영화를 찍을 참이었다. 그게 바로 ‘공동경비구역 JSA’였다. 한국사회는 이 특별하고, 심지어 기이하기까지 한 작가주의 감독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안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찬욱은 영화광 출신의 ‘B급 무비’ 감독으로 불렸다. 기억하기로는, 아직 봄바람이 느껴지지 않던 충남 서천의 갈대밭에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그때. 박찬욱은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대해 다소 분노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웰 메이드(well-made) 상업영화 감독이라는 걸 보여주겠다. 이제 그럴 때도 됐다.”

    감독으로 데뷔한 지 어느덧 10년이 가까워졌다. 조금씩 초조해졌다. 그는 이날 갈대밭에서 DMZ 안으로 수색을 나갔던 한국군 병사 이수혁(이병헌)이 대오에서 이탈해 대인지뢰를 밟게 되고, 그런 그를 북한군 병사 오경필(송강호)과 정우진(신하균)이 발견하는 장면을 찍을 참이었다.

    현장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스태프들이 갈대밭에 들어가 촬영에 적합하도록 주변 정리를 했다. 발전차가 들어갔다. 야간 촬영을 위한 조명등 설치가 관건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연출부와 제작부가 울려대는 무전음이 터져 나왔다. 감독은 오히려 이럴 때 좀 느긋한 편이다. 감독은 늘 몸보다 머리가 바쁜 법이니까. 머릿속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면 구성에 여념이 없을 터다.



    현장에서는 잘 몰랐으나 이때 찍은 장면은, 이후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된다. 남북한 병사가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니까. 특이하게도 영화 속 이 장면은 긴장감과 함께 이상하게도 코믹한 분위기가 산발적으로 엇갈린다. 그런 느낌은 마치 박찬욱의 인증표와도 같은 것인데 당시에는 아주 기발한 블랙코미디로 받아들여졌다.

    코리안 뉴 시네마 바람

    이 장면에서 이수혁이 밟고 선 것은 마치 지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마치 ‘똥을 밟고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수혁을 발견한 북한군 병사들은 안됐다는 표정보다 “하이고, 그것 참 고약하게 됐네” 식으로 쿡쿡거린다. 마치 개구쟁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악의 없는 조롱을 흘리는 아이들처럼. 이병헌의 유명한 대사가 나오는 것도 바로 이때다. 그는 “우왕!” 하고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의 아이처럼 북한군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 이 개XX들아 그냥 가면 어떻게 해.”

    그 욕설에 오히려 여유 있게 느글거리며 북한군 병사 오경필이 돌아서자, 이수혁은 급히 말을 수정한다.

    “그냥 가면 어떻게 해…요. 살려주세요오!”

    그렇게 남북한 병사들은 만나고, 친해진다. 그들은 초코파이를 나눠 먹고 김광석의 노래를 같이 듣는다. 그러나 그들도 안다. 자신들의 관계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그리고 비극은 일찍 찾아온다.

    우화는 사라지고 바람만 남았다

    갈대밭 접경에서 금강이 유유히 흐른다. 금강 물줄기는 서해를 지나 연평도까지 닿는다.

    어쨌든 갈대밭에서 박찬욱과 송강호와 이병헌, 신하균이 이러고 있을 때 세상, 곧 남북한의 분위기는 급변하던 상태였다. 한 해 전인 1999년 6월 15일에는 이른바 서해교전이라 불리는 1차 연평해전이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확산됐다. 실제로 두 사람은 영화가 개봉된 지 6개월 만에 파격적으로 회동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그 회오리의 한가운데에서 만들어지고 개봉된 작품이었다. 영화가 세상의 흐름을 먼저 읽어낸다는 이야기는 이 작품을 통해 입증됐다. 이 영화 이후 한국 영화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급물살을 탄다.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이 이어진다. 바야흐로 코리안 뉴 시네마의 물결이 밀어닥친 것이다.

    충남 서천의 갈대밭은 15년의 세월 동안 많이 변해 있었다. 일단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탔다. 예전에는 오직 갈대밭만이 있어 갈대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내는 소리들이 뚜렷이 들려왔다. 금강 하구의 둑을 사이로 시야에서 가려져 둑 위로 올라왔을 때 마침내 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때의 전경은 저절로 입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때는 자연 그대로였다.

    유와 무, 이중의 위선

    그러나 지금은 여기저기서 공사가 한창이다. 마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비교적 큰 규모의 건물 공사가 펼쳐졌다. 갈대밭으로 이어지는 신성리 마을의 큰길들에는 아주 널찍한 아스팔트가 깔렸다. 이제 곧 주차장도 크게 확장될 것이다. 아직까지는 현지 여인들의 행상이 주를 이루지만, 곧 현대식 점포의 특산품 판매점도 경쟁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갈대밭 곳곳에 사람들이 편하게 오갈 수 있게 길이 나 있다. 그 중간에는 모여서 쉴 수 있도록 나무 데크로 바닥을 깔아놓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이제 옷을 버리거나 신발을 별로 더럽히지 않더라도 갈대밭 안을 ‘탐사’할 수 있다. 그건 좋으면서도 별로 좋지 않은 일이다. 예전처럼 저 무성한 갈대밭을 그냥 바라보게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이제 너무 인공적으로 변해버렸다. 문명의 이기는 없으면 불편하지만 있으면 약간은 볼썽사나워진다. 그 이중의 위선은 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갈대 체험장 입구 전망대 앞에 세워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입간판은 조금 심하다는 느낌을 준다. 송강호와 이영애, 이병헌의 영화 속 모습으로 만들어졌는데 유치함의 극치여서 한편으로는 키치(kitch)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박찬욱 감독이나 배우들이 이걸 보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찬욱은 영화 촬영 이후 이곳을 단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다고 했다.

    서천 갈대밭은 내비게이션으로 정확히 ‘충청남도 서천군 신성리 한산면 12-5’를 찍고 가면 된다. 그럼에도 정식 명칭은 ‘신성리 갈대 체험장’이다. 소재지가 한산면이니만큼 갈대밭만큼 한산 모시가 유명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실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한산모시관’이 있다. 대개 그곳을 들르면 의례적으로 사게 되는 것이 유명한 전통주인 한산 소곡주다.

    갈대밭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먹을거리가 없다. 아직은 먹을 데가 없다는 얘긴데, 이제 곧 그것이 만들어질 것 같아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다. 길바닥에 좌판을 깔고 단호박 등을 파는 행상 할머니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사람들? 엄청 오지. 주말에는 여기 말도 못혀.”

    모두 자동차를 갖고 사는 요즘, 서울 사람들은 충남 서천 정도는 ‘마실 나가는 수준’으로 들락거릴 것이다. 주말, 특히 요즘처럼 만추(晩秋)로 가는 길목에서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이곳을 찾아올 공산이 크다. 갈대밭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이 찾으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우화는 사라지고 바람만 남았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분단 상황에서도 진한 우정을 나누는 남북한 병사의 이야기를 다뤘다.

    “세상이 영화만 같았으면…”

    일각에서는 ‘공동경비구역 JSA’가 군 의문사 중 하나인 김훈 중위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찬욱 감독이 부인한다. 굳이 거기서 가져왔다면 판문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살인사건일 수 있다는 것 등 정도라고 그는 말한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원래 박상연 작가의 소설 ‘DMZ’의 판권을 영화사 명필름이 사면서 영화화 한 것이다. 명필름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건축학 개론’ 등 수많은 영화를 제작하며 국내 최고의 제작사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박상연 작가 역시 이후 영화로는 ‘화려한 휴가’와 ‘고지전’, TV드라마로는 ‘뿌리 깊은 나무’ 등을 써 국내 최고 시나리오 및 드라마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원작의 사용 여부를 놓고 다소 의견 차이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건 순전히 박찬욱의 작가적 특질 때문인데, 과거 1940년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그랬듯, 그는 원작에서 단 한 가지 정도의 설정만을 가져올 뿐 그 내용을 전면적으로 뒤바꾸거나 아예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박찬욱은 히치콕의 영화 스타일을 선호하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히치콕 적자(嫡子) 감독으로 손꼽힌다.

    박찬욱의 이 같은 작품관은 최민식 주연의 ‘올드 보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는데 이 영화는 쓰치야 가론 원작, 미네부시 노부아키 삽화의 일본 원작 만화에서 단 한 가지의 설정만을 가져온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설정이 바로 ‘감금’이었다.

    14년 전에 만든 ‘공동경비구역 JSA’를 지금 와서 복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착잡한 일이기도 하다. 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사이에 두고 남북한 병사 간 총격전과 살상 사태가 벌어지고 이를 둘러싸고 남북 양측 간에 야기되는 정치군사적 긴장관계와 총격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니, 그런 이야기인 척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남북 젊은이 간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우정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분단 문제를 휴머니즘적인 시각으로 다루는 영화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요즘 같으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북한을 향한 탈북자 단체의 삐라(전단) 살포 문제로 남북한 고위급 회담이 무산되는가 하면 김정은 등 김씨 일가의 왕조적 국가 운영 사태가 세계적 조롱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다.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유엔의 제재 조치가 이어질 전망이고 서해에서는 여전히 이런저런 국지전 양상이 심각하다.

    14년 전 박찬욱의 영화가 꿈꿨던 남북한 병사들의 우정은 이제는 마치 전설처럼, 있을 수 없는 우화처럼, 그나마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는 상황이다. 결국 영화는 꿈만 먹고사는 기형적인 나무에 불과한 것인가. 영화는 종종 지나치게 진보적이어서 세상이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세상이 영화만 같았으면….”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역설의 통일 의지

    ‘공동경비구역 JSA’를 텍스트만으로 분석하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당시의 한국 영화로는 특이하게도 이 작품은 장르가 융합된, 일종의 복합장르형의 영화였다. 영화는 총 3부로 짜여졌는데, 1부는 총격사건이 벌어지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미스터리 극 형식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중립국 감시위원회 스위스군 소속 여군 장교 소피아(이영애)가 등장한다. 2부는 시점을 뒤로 좀 돌려서 남북 병사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서는 다소 코믹한 장면이 많이 들어간다. 이수혁과 오경필이 서로의 벙커를 오가며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다. 2부는 그래서 한마디로 코미디다.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인 슬랩스틱이 이어진다. 그리고 3부에서는 주인공들의 갈등이 하나의 상황으로 모아지면서 결말로 치닫는다. 분위기가 장중하고 비장한데 일종의 전쟁 드라마인 셈이다.

    사건 해결을 위해 남북한 조사단들이 문제가 된 양측 병사들, 곧 이수혁과 오경필을 불러다 놓고 대질 심문을 벌이는 장면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압권 중의 압권이며 배우 송강호가 얼마나 뛰어난 자질을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경필은 그간 형제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누어왔다고 여긴 이수혁에게 난동을 부린다. ‘미제 앞잡이’, ‘남반부 종간나 새끼’ 같은 욕설을 퍼붓고 침을 튀기며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김정일 장군 만세’ 등을 외친다. 그러나 그걸 지켜보는 관객은 안다. 그의 의도되고 과도하게 치장된 충성심은 남한 병사 이수혁을 살리려는 고육지책임을. 이수혁도 살고 자신도 살고, 지금껏 벌어진 사건이 아무런 배경도 없는, 그저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임을 보여주려는 행동이라는 것을. 그래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장면은 ‘공동경비구역 JSA’가 단순히 남북 대치 상황을 그린 분단 드라마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역설의 통일 의지를 담은, 새로운 작품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이 결말 부분에서 열광했으며 그 결과는 관객 580만 명이라는 기록적인 흥행으로 이어졌다. 지금으로 따지면 1800만 명 가까이 모은 ‘명량’의 흥행과 맞먹는 수준이다. 2001년 2월에 열린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도 유럽 관객은 이 장면에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전 세계에 박찬욱이라는 이름을 알린 시발점이 됐다.

    우화는 사라지고 바람만 남았다

    갈대밭 너머 석양이 눈부시다.

    칼국수촌부터 춘장대까지

    14년 전, 이곳에서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진행됐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제 다 잊은 듯 보인다. 갈대밭을 경계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은 그동안의 무상한 세월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 물줄기는 서해로 합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서해가 북한의 서해와 맞닥뜨리는 곳, 곧 서해 5도 중 하나인 연평도에서는 여전히 군사적 대치의 긴장감이 팽배하다. 갈대밭에서 유유자적 주말을 보내는 사람들의 망중한(忙中閑). 그 평화로운 마음을 금강의 물줄기가 북쪽으로 전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갈대밭 이곳저곳을 다니다 출출한 배를 채우려면 다시 차를 타고 신성리를 빠져나와야 한다. 서울로 올라가는 15번 국도를 타면 허기진 배를 달래줄 길이 없다. 그래서 동서천 IC를 우측으로 두고 편도 2차선으로 나 있는 강변길을 달리면 10분도 안 걸려 만나는 곳이 ‘금강하굿둑 음식촌’이다. 마치 경기도 양평에 온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세워진 카페나 레스토랑들을 만나게 된다. 다 3층 이상 건물들로 금강과 그 건너편, 불야성으로 펼쳐지는 군산시의 전경을 즐길 수 있게 건축돼 있다.

    해가 막 넘어가는 시간쯤 그곳에서 만나는 금강 하구의 갯벌은 작은 장관이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놓은 듯한 폐선(廢船) 한 척이 있고, 갈매기와 새떼가 하루의 일상을 정리하려는 듯 천천히 날아다닌다.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 여기만큼은 발길을 돌리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금강하굿둑에는 칼국수촌이 있다. 갯벌을 봐서인지 조개와 바지락, 새우와 각종 채소가 잔뜩 들어간 해물 칼국수는 그야말로 제격이다. 먹을거리 촌은 늘 사람들의 직접적인 욕망을 담아낸다. 이곳에서 육류를 찾는 것은 정서적 훼손에 해당하는 일이다.

    칼국수촌이 조금 미진하다 싶은 사람들은 아주 조금만 더 발품을 팔면 된다. 금강하굿둑 음식촌에서 역시 한 10분쯤만 달리면 장항음식특화거리가 나온다. 여기는 한마디로 횟집촌이다. 서천과 장항은 기차로 한 정거장 차이의 이웃지간이다. 서울서 호남선 기차를 타면 서천역 다음이 장항역이다. 장항에서 회를 먹고 소주를 마신다는 것은 대체로 여기서 1박을 하겠다는 의지다.

    아마도 막 연인이 됐거나, 아니면 워낙 오랜 연인 관계여서 새로운 무엇이 필요한 남녀는 번잡한 주말이 아닌 주중 하루를 빌려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장항의 송석리를 거쳐 춘장대 해수욕장까지 가게 된다. 그곳에는 숙박시설이 제법 잘 차려졌기 때문이다.

    박찬욱 신화의 시작점

    박찬욱과 그의 스태프들이 영화를 찍을 당시에는 이런저런 음식촌이니 하는 것들이 없었다. 그들이 한가하게 음식을 즐기며 다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 모두 자신들이 만드는 영화 한 편이 엄청난 흥행 바람을 일으키고, 세상을 경천동지하게 만들며,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하게 그 현재적 의미를 남길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늘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신만만해하는 박찬욱 감독은 그랬을까.

    박찬욱은 이후 세계적 감독으로 성장했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 등 이른바 그의 ‘복수 3부작’은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올드 보이’는 2002년 5월 제5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2005년 만든 ‘친절한 금자씨’가 이듬해인 2006년 뉴욕 링컨 플라자에서 상영될 당시 박찬욱은 콧대 높기로 유명한 뉴욕의 지식인들, 곧 뉴요커들로부터 5분 이상의 기립박수를 받기까지 했다.

    박찬욱은 이후에도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캉’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낸 작품 ‘박쥐’로 일약 논쟁을 일으켰고, ‘올드 보이’는 할리우드 감독 스파이크 리에 의해 리메이크됐으며, 아예 그가 직접 할리우드로 넘어가 ‘스토커’를 찍기도 했다. 박찬욱은 현재 세라 워터스 원작의 ‘핑거 스미스’를 일제강점기 상황으로 치환하는 내용의 신작 ‘아가씨’를 준비 중이다. 시대극이고, 무엇보다 박찬욱이 연출하는 작품인 만큼 10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이곳 서천에서 시작됐다. 갈대밭 한가운데에서 모든 바람이 시작된 셈이다. 여기 갈대들은 그걸 알고 있을까. 세상의 중심이 바로 여기였음을. 변방이 중심이고 중심이 변방이라는 것.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갈대밭에는 바람만이 남는다. 사위는 조용해진다. 세상사의 풍파가 한풀 꺾이게 된다. 여자가 갈대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가 갈대와 같다. 늘 흔들리고 바로 서고 또 흔들리고 바로 서는 것을 반복하게 되는 법이다. 사람들이 이곳 신성리 갈대밭을 찾는 이유는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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