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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극장] 운명적 사랑이 만든 기이한 ‘불멸(不滅)’

  • 윤채근 단국대 교수

[환상극장] 운명적 사랑이 만든 기이한 ‘불멸(不滅)’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아내를 의심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고려 개경의 선비 이임생은 안절부절못한 채 뜨락을 거닐며 어서 빨리 날이 새기만을 바랐다. 마침내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비쳐들 무렵 피곤한 기색의 아내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비석처럼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을 발견한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지 않고 여기서 뭐 해요?” 

대답 대신 아내에게 다가간 임생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내가 다시 물었다. 

“이 시각에 이게 뭐예요? 눈물은 또 뭐고요?” 

눈물을 훔치고 긴 탄식을 연거푸 쏟아내던 임생이 겨우 입을 뗐다. 



“난 도저히 알 수가 없구려. 자네가 식량을 구하러 처음 집 밖으로 나갔던 날을 기억하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대문을 열고 나가는 듯하더니 바로 돌아왔소. 마치 대문 바로 앞에 놓인 물건을 들고 오는 사람 같았지.” 

“그런데요?” 

“그다음에도 마찬가지였소. 누군가 대문 바로 앞에서 기다렸다 양식을 건네준 게 아닐까 여길 정도였소.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지. 그만큼 당신에 대한 정이 깊고도 깊었기 때문이오.” 

“이상했을 만도 해요. 설명하자면 한이 없을 얘기입니다.” 

아내의 두 팔을 꼭 그러잡은 임생이 격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다가 자네 귀가 시간이 점점 더뎌지기 시작했소. 급기야 이젠 밤을 지새우고 오는구려! 한이 없다는 그 얘기, 내가 알아선 안 될 얘기라도 좋으니 꼭 듣고야 말겠소! 이미 난 살아도 죽은 사람이나 진배없었으니까. 자네를 잃고 나 역시 사라져도 그뿐이요. 다만!” 

“진정하고 우선 방으로 들어가요. 공기가 찹니다.” 

“다만! 묻고 싶었소. 우리가 이 서루에서 기적처럼 재회한 밤을 기억하오?” 

남편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던 아내가 입술을 꼭 물더니 힘겹게 대답했다. 

“기억하고 말고요. 어떻게 잊겠어요?” 

아내를 덥석 끌어안은 임생이 속삭이듯 물었다. 

“자네는 사람이오? 아니면 귀신이오?”


홍건적의 난

홍건적 떼는 마치 역병처럼 개경에 나타났다. 고려 전역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미처 피난하지 못한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죽임을 당하거나 어디론가 끌려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홍건적은 규율을 갖춘 군병이 아닌 일개 부랑자 집단이기에 메뚜기 떼처럼 본능에 따라 움직이며 살육했다. 이임생과 그의 아내 최세연 일가도 그 와중에 몰살되고 말았다. 

각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이던 부부는 한강 이남으로 피신하던 도중 애지중지하던 두 자식을 잃었다. 삶의 의지가 꺾인 아내 세연은 자꾸 뒤처졌고 이름 모를 어느 나루터에서 끝내 적에게 생포되고야 말았다. 날래게 숲으로 몸을 감춘 임생은 아내의 최후를 바라보면서도 손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통곡을 참으며 난자당해 살해되는 아내의 마지막 모습을 멀리서 지켜봐야만 했다. 

홍건적은 놀다 지친 악귀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나라를 빼앗을 야심 따위가 있을 리 없던 그들은 약탈과 방화를 쉼 없이 일삼다 원래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무심히 돌아갔다. 다시 평화가 찾아왔고 남녘으로 피해 있던 임생은 귀경 행렬에 섞여 조용히 개경으로 돌아왔다. 화려했던 고려의 수도는 폐허가 돼 있고 살아남은 자들은 시체를 거두기에 바빴다. 

사고무친에 천애 고아가 된 임생은 죽기로 결심했다. 기왕 목숨을 끊을 거라면 아내와 처음 만났던 처가의 서루가 제격일 것 같았다. 선죽리 최고 부호이던 최씨 가문 본가는 불에 타 재가 돼 있었다. 장인이 무남독녀 세연을 위해 지었던 후원과 서루는 가까스로 난을 피해 형체를 유지한 채였다. 계단을 올라 서루 꼭대기 층에 이른 그는 아내가 소녀 시절 즐겨 앉던 자리에 웅크리고 누워 흐느껴 울었다. 석양이 지고 밤이 찾아왔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임생은 난간에 밧줄 한쪽을 걸고 다른 쪽을 둥글게 말아 목에 감았다. 아래층으로 몸을 던지려 할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새나 쥐가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삶에 미련은 없었지만 뭔가에 홀린 것처럼 동작을 멈춘 그가 소리 나는 아래층을 주시했다. 그건 틀림없는 사람 발걸음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사람 형체가 흐릿하게 나타나더니 계단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목의 밧줄을 푼 임생은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상대를 노려봤다. 그럴 리는 없었지만 그게 아내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꼭 껴안아 주리라 결심했다. 발소리는 조금씩 계단을 오르더니 임생이 있는 3층에 도달했다. 상대가 반갑게 속삭였다. 

“당신이에요? 저 세연이에요.”


다시 만난 부부

남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아내는 밖에서 가져온 짐을 풀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루 일층 탁자에 앉은 임생은 아내가 모든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탁자 건너편에 마주 앉은 아내가 조용히 속삭였다. 

“제 죽음을 이미 목도했잖아요?” 

임생이 목멘 음성으로 대답했다. 

“분명 그랬소. 자네는 내 눈앞에서 죽었지.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만난 뒤 단 한 번도 당신 정체를 궁금해한 적이 없소. 귀신이라도 상관없었으니까.” 

아내는 눈물 흘리기 직전의 표정이 돼 남편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임생이 다시 입을 뗐다. 

“자네를 다시 만난 그날 밤, 난 목숨을 버릴 작정이었소. 이임생은 그때 이미 죽은 거였지. 하필 그 순간 당신이 나타났소. 정해진 운명처럼 너무 자연스러웠지. 귀신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소? 나 스스로를 이 서루 안에 봉인하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왔지. 대문 밖으로 한 걸음만 나서도 당신이 사라질까 봐 무서웠소. 이게 꿈이라면 깰 테고, 당신이 귀신이라면 날아가 버릴까 봐.” 

왈칵 눈물을 쏟기 시작한 아내는 흐느끼며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그러셨다면, 정녕 그러기로 작정하셨다면, 그냥 우리 여기서 살아요. 왜 나가는지, 왜 늦게 돌아오는지 묻지 마시고, 그냥, 우리 그냥 오래오래 살아요.” 

아내의 두 손을 움켜쥔 임생이 말했다. 

“그러려고 했소! 자네만 옆에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었소, 그런데 더는 못 참겠는 거요. 도대체 어딜 갔다 오는지, 누굴 만나는지, 가져오는 이상한 물건들은 다 뭐며, 당신 말투는 또 왜 수시로 바뀌는 건지. 진실을 알고 싶소! 그래야 문 밖 세계 따위는 다 잊고 이곳에서 자네하고만 살겠다는 약속도 지킬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요!” 

충혈된 눈으로 남편을 응시하던 아내가 긴 한숨을 몰아쉬고 말했다. 

“진실을 알게 되면 당신은 이 유폐 생활을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우리 인연도 그것으로 끝나겠지요. 그래도 좋겠어요?” 

마른침을 삼킨 임생이 두 눈을 부릅뜨고 대답했다. 

“무슨 말을 듣게 되더라도, 난 자네를 버리지 않을 거요. 설령 다른 사내를 만나고 왔다 해도 다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무지한 채로 더는 견뎌지지 않을 것 같단 말이요!” 

남편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지던 세연이 속삭였다. 

“우리가 이 서루에서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해요?” 

임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연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청초한 열여섯 살이었지요. 당신은 열여덟이었던가요?” 

최세연은 개경 최고의 미소녀였다. 집안까지 부유했던 그녀는 모든 개경 사내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지어준 서루 꼭대기 방에서만 지내던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후원 담장 밖 나무에 매달려 자신을 엿보던 도령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장안에 머리 좋기로 소문난 이임생이었다.


씩씩한 소녀와 소심한 도령

도령은 기와 조각에 연서를 매달아 담장 안으로 던졌다. 꽤 멋진 시가 적혀 있었다. 그 후로 수많은 시를 주고받던 남녀는 부모 몰래 밀회를 나누기로 결심했다. 세연은 시녀들에게 커다란 대나무 광주리를 가져오게 했다. 달빛이 유난히 밝던 어느 봄밤, 겁 많고 소심하던 도령은 담장에 드리워진 광주리를 타고 후원에 잠입했다. 

세연은 후원 구석 나무그늘 아래 펼쳐진 담요 위에서 시녀들과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임생을 본 그녀가 시녀들을 물리고 속삭였다. 

“그대가 정녕 내 운명의 정인이라면, 어디 증명해 봐요.” 

당황한 임생이 얼굴만 붉히고 있자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며 다시 말했다. 

“내 마음을 훔쳐보라니까. 시처럼 시시한 것 말고, 다른 걸로.” 

“다른 것?” 

“응. 다른 것.” 

달빛을 반사하며 영롱하게 빛나는 세연의 눈동자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임생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러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오? 몹시 두렵소.” 

두 손을 허리춤에 대며 콧방귀를 뀐 세연이 말했다. 

“젊은 사내가 겁이 그리 많아 어디에 쓸까? 내가 다 감당할 테니 염려일랑은 마시고.” 

그날 세연의 손에 이끌려 서루 꼭대기 방에 들어선 임생은 다른 세상을 만났다. 소녀의 열정은 그의 혼을 모조리 태워버렸고 사랑을 알아버린 소년은 이번 생과 그다음 생 그리고 그다음 다음의 생에도 그녀와 함께하기로 맹세했다.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아내 표정에 실금 같은 작은 미소가 번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남편도 감개에 젖어 한마디했다. 

“양가 부모님 반대가 대단했지. 특히 자존심 세신 우리 아버님께선 가난 탓을 하며 끝까지 버티셨고.” 

“그래서 혼수를 우리 집에서 다 장만했잖아요?” 

“그랬지. 맞소! 내 자네를 참 무던히도 힘들게 했소.”


오래가지 못할 꿈

말을 마친 임생은 그냥 여기서 멈추고 더는 아무것도 묻지 말까 고민에 빠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동자도 부디 그래주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듯했다. 세연이 정다운 말투로 속삭였다. 

“간밤에 한숨도 못 잤을 텐데, 어서 눈 좀 붙여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답을 들어야겠소. 비록 오늘은 그냥 넘어간다 해도, 자네는 또 밖으로 나가야 할 테고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거요. 내 말이 맞소?”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아내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제가 나가는 건 그저 식량이나 구하려고 그러는 건 아닙니다.” 

“그럼 나는 알아야겠소! 도대체 대문 밖에 뭐가 있는 거요? 무엇 때문에 나는 한 발도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거요?” 

어두운 그늘이 아내 눈가에 드리워졌다. 초점을 잃은 공허한 눈길로 남편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서루에서 처음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기까지 당신은 늘 말했지요? 이 좁은 곳에 저 하나만 있으면 백 년은 너끈히 견딜 거라고. 그리고 당신은 우리 부모님께 발각되기 전까지 그 약속을 무던히도 잘 지켰어요.” 

“실은 지금도 그러하오. 당신 하나만 있으면 난 세상이 어찌 돼도 상관없소.” 

“아니요! 당신은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어요. 그런 마음이 있는 한 언젠가는 대문을 열게 되겠지요. 오래가지 못할 꿈이었던 겁니다.” 

“꿈?” 

“네. 제가 지난 몇 개월 동안 견딘 꿈이기도 합니다. 이제 털어놓겠어요.” 

세연의 혼은 구천을 떠돌다 염라대왕 앞으로 불려갔다. 그녀를 오래도록 관찰하던 대왕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죽은 자의 외로움과 상실감에 찌들어 있던 세연은 목청을 돋워 분연히 외쳤다. 

“뭐가 그리 즐거우신지요? 이제 갓 서른을 넘겨 부부의 즐거움을 한창 누릴 나이에 이 지경이 됐나이다. 정답던 자식들마저 싸늘한 시신이 됐고 일가붙이는 모조리 주륙을 당했지요. 뭐가 그리 좋으신 건가요?”


염라대왕의 제안

웃음을 멈춘 대왕이 귀를 긁적이다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너희 인간들 세계 얘기고. 나야 내 일을 할 뿐이다. 성질이 대단하구나?”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선 세연이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혼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성질 때문이 아닙니다. 여길 보세요. 다들 원한 품은 모진 혼들입니다. 동정심도 없으신가요?” 

눈살을 찌푸린 대왕이 세연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그녀가 다가가자 대왕이 속삭였다.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니다. 혹시 중유라고 아느냐? 모르지? 삶과 죽음의 중간을 이르는 불가 용어다.” 

“그런데요?” 

“네가 지금 중유 상태에 있다.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어. 달리 말해 보자면, 그러니까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네가 이승으로 잠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상대를 멍하니 노려보던 세연이 차츰 그 말뜻을 이해하고 급히 물었다. 

“짐승 같은 놈의 칼에 몸뚱이가 이미 발기발기 찢겼어요. 어떤 몸으로 돌아가나요?” 

입맛을 크게 다신 대왕이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새 몸은 못 준다. 이게 아주 특별한 경우라서. 어쨌든 혼으로만 돌아가는 거야. 중유로 떠도는 혼은 내가 아주 흥미 있어 하거든. 그래서 좀 웃었으니 이해해다오. 그 뭐냐, 내 재량권이 이럴 때 조금 생기거든.” 

“혼으로만 돌아가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 흔한 귀신 가운데 하나가 돼 이승 속을 헤매다 결국엔 이리로 되돌아와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네 경우는 아주 희귀해. 누군가 엄청난 업의 힘으로 널 이승으로 잡아끌고 있어. 그게 바로 네 남편이다. 재밌지 않으냐? 덕분에 넌 저승으로 완전히 넘어오지 않고 중유에 멈췄던 게다.” 

남편 생각에 울상이 된 세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왕이 덧붙였다. 

“애정의 힘이란 이리도 질긴 것이다. 비록 혼일망정 남편 입장에서는 아무 변화도 못 느낄 거야. 살아 있을 때랑 모든 면에서 아주 똑같지. 그런데 세상에 공짜란 없지 않으냐?” 

“대가를 지불하나요?” 

“그럼! 네게도 죄업이 있거늘 당연히 합당한 계약을 맺어야지. 이 법계가 저절로 돌아가는 줄 아느냐? 윤회를 끝없이 돌리려면 다 동력이 필요하다 이거다. 남편과 남은 행복을 누릴 텐데 너도 응당 일을 해야겠지?”


사랑이 만든 별세계

세연의 말을 다 들은 남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을 잃었다. 한참을 탁자 위만 바라보던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자네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중유 상태다? 그리고 자네를 이승으로 다시 불러낸 나는 염라대왕이 정해놓은 이 서루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다? 그 말인 거요?” 

고개를 가로저은 세연이 대답했다. 

“대문 밖으로 나갈 수는 있어요. 하지만 우리 부부의 연은 그것으로 풀립니다.” 

“어찌 그렇소? 밖이 어떻기에?” 

“밖은 다른 법계입니다. 이곳과 질서가 달라요. 중유에 있는 저는 두 군데를 오갈 수 있지만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모든 기억을 잃고 다음 윤회로 떨어질 겁니다.” 

“그럼 나 역시 원래 있던 세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신세라는 거 아니요? 그게 중유와 무슨 차이가 있소?” 

잠시 망설이던 세연이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우리가 재회하던 그날 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나요?” 

넋을 잃은 표정이 된 임생이 한참 생각에 잠겼다 대답했다. 

“난 자살을 하려고 밧줄에 목을 맡겼었소. 그 찰나 당신이 계단 위로 올라오지 않았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럼 뭔가 다른 일이 벌어졌었소?” 

“그날 당신은 죽었어요.” 

입을 벌린 임생이 뭐라고 말하려다 멈췄다. 세연이 다시 말했다. 

“죽었어요, 그날 밤에. 그리고 당신의 그 무서운 집착이 업을 낳았고 저를 불러낸 겁니다.” 

“전혀 기억나지 않소.” 

“그 기억만 도려낸 모양입니다.” 

“그럼 여긴 어디란 말이요? 지옥이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저를 중유에 멈추게 한 당신의 업력이 만든 별세계입니다. 염라대왕께서 하사해 준 작은 선물이기도 하고. 물론 대가는 치르고 있어요.” 

“대가?” 

고개를 끄덕인 세연이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제가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낯선 물건을 가져오기도 하고 말투가 바뀌기도 하는 까닭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가끔 먹는 이상한 음식 생각나나요?” 

“생각나오. 자네가 가져오는 물건이 괴상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음식은 정녕 이상하기 짝이 없소.” 

몸을 일으킨 세연이 부엌에서 물건 하나를 집어 오더니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통조림생선이었다. 알루미늄 캔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이건 미래의 음식입니다. 여기 기준으로 그렇다는 거예요. 제겐 요즘 음식일 뿐이지만.”


차원에 갇힌 부부

침상에 누운 부부는 오래도록 서로를 얼싸안고 말이 없었다. 달빛이 교교하게 창문 안으로 비쳐들었다. 몸을 일으켜 세운 임생이 창밖에 펼쳐진 개경의 야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모든 게 허구라는 거요?” 

나른한 목소리로 세연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여긴 우리만의 작은 보금자리예요. 애초 이럴 운명이었나 봅니다, 우린.” 

길게 숨을 몰아쉰 임생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요? 영원히?” 

슬픈 미소를 머금은 세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영원히! 당신이 이 삶이 지루해 대문을 열기 전까지.” 

도로 아내를 품은 임생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절대로!” 

남편의 등을 토닥이던 세연이 천천히 말했다. 

“절대로라는 건 없습니다. 수많은 법계의 수많은 인연이 만나고 헤어지지만 절대로 끝나지 않는 그런 인연은 없거든요.” 

“어찌 그리 잘 아오?” 

남편을 밀치고 일어나 앉은 세연이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처음 대문 밖으로 나갔을 때 세상은 아직 고려였습니다. 왕만 바뀌어 있었지요. 전 음식만 챙겨 돌아왔어요. 분명 며칠을 지내다 왔는데 이곳 시간은 거의 그대로더군요. 다음에 나갔을 때 고려는 쇠락해 있었고, 그다음에 나갔을 때 세상의 주인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여기의 하루는 바깥세상의 몇 년, 때로는 수십 년에 해당합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임생이 급히 물었다. 

“그럼 당신은 대문 밖에서 한평생을 살다 돌아오기라도 한다는 거요?” 

울먹이던 아내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게 제가 치러야 하는 대가입니다. 처음에는 짧은 역할만 하고 바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운명이 뒤틀린 자의 남은 인생을 대신 살아주거나, 업이 다했음에도 이승에서 버티는 자를 처리하기도 했지요. 그래야 윤회가 바르게 돌아가거든요. 최근엔 아예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살고 옵니다.” 

미세하게 표정이 일그러진 임생이 우울하게 물었다. 

“그럼 다른 누군가의 배필로 살다 돌아오기라도 한다는 건가?” 

절망과 희망의 중간쯤의 눈빛으로 세연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를 부여잡은 남편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고 그를 향해 고개를 쳐든 아내의 심장은 거세게 요동쳤다.

* 이 작품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수록된 ‘이생규장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신동아 202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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