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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힐링 healing 필링 feeling

‘내’가 찾은 ‘나’의 길…어찌 여유롭지 않으리

늦가을 창덕궁 순례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내’가 찾은 ‘나’의 길…어찌 여유롭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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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능력을 가진 사람의 여유를 보았고 그런 사람과 함께 걷는 소박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 남겨둔 풍경이 눈에 밟혀 자꾸만 뒤를 돌아본 기억, 몇 년 사이 처음이다.
‘내’가 찾은 ‘나’의 길…어찌 여유롭지 않으리

창덕궁 후원.

“그래서, 형이? 형이 가서 강의를 들었어?”

“…응.”

“번역하신 양반이 어려워했겠는데? 현직 교수인 경제학 박사가 와서 강의를 들으니.”

“그렇다고, 궁금한 걸 어쩌겠어. 잘 모르면 가서 들어야지.”

두 달 전쯤, 어느 상가(喪家)에서 들은 얘기다. 조문하러 가보면, 으레 유족의 친우나 선후배가 뒤섞여 앉기 마련인데, 그날 혼자서 갔던 나는, 어느 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로 있는 상주의 선후배들, 그러니까 나와는 인맥으로나 학맥으로나 직선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없는 문상객들과 어울려 앉게 됐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래도 점선으로는 이렇게 얽히고 저렇게 설킨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분은, 내가 출강하는 학교에서 자주 뵌 일이 있는, 노동경제학을 가르치는 신정완 교수였다. 경제학이 원래 그런지, 아니면 신 교수의 학문적 넓이와 깊이가 그런지, 과문하여 모르겠지만, 그는 학술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는 후배와 니체에서 하이데거를 거쳐 니클라스 루만의 책 이야기로, 다시 거기서 잠시 쉬기 위해 온 상주와 옛날이야기 하다가, 새로 온 문상객과 근황을 주고받다가, 다시 루만 얘기로 넘어가서는, 번역자도 고생했겠지만 원래 루만 책이 너무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강의를 들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하이데거와 루만과 고인의 병세와 방금 도착한 문필가의 근작 등에 대해 한두 마디 할 수 있는 말을 더하다가, 쉰이 넘은 현직 교수가 수강을 하러, 그것도 어엿한 대학의 강의실이 아니라, 민간의 인문학 공부 모임에 일부러 가서, 루만 번역자의 강의를 들었다는 얘기에, 그 흔한 표현대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듣기로는, 예전에, 그야말로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요 상아탑이던 시절 서울대 철학과의 박홍규 교수가 자택에서 라틴어로 서양 고전을 강독 교습하면 같은 학과의 제자는 물론 영문과의 김우창 같은 착실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했고, 또 훗날 바로 그 김우창 교수가 강의를 하면, 학부나 대학원생을 위한 교습임에도 타 학교의 교수들까지 와서 청강을 했더라는 풍경이 있었으나, 요즘은 그런 진경산수가 마르고 닳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신정완 교수는 루만을 이해하기 위해 그 번역자인 정성훈 선생의 강의를 듣기 위해 학교 밖으로 출타했던 것이다. 이런 풍경은, 귀하다.

‘내’가 찾은 ‘나’의 길…어찌 여유롭지 않으리

필자 일행이 창덕궁에서 문화해설사 박광일 씨의 설명을 듣는다.

문화해설사 박광일 씨의 해박한 현장수업

이런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 지금 그와 흡사한, 그런 학문적 정열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하지 않던 일을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사연인즉, 이러하다. 10월 하순 탄탄한 벤처 회사를 경영하는 이승종 네무스텍 대표가 연락을 해왔다,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면서 창경궁을 둘러보는 행사가 있는데 참여할 거냐고. 그의 친절에 대한 답례로 그렇게 하겠다고는 답했으나 11월이 되면서는 조금 망설였다.

좋은 책이 너무 많아서, 그런 책들을 통독하고 나서 혼자 자유롭게 살펴보면 될 일을 굳이 문화해설사의 도움을 얻어야 할까, 하는 오랜 습관이 먼저 작동했다. 이 점이 내가 그럭저럭 글을 쓰고 살게 된 이유다. 자료에 대한 욕심, 큰 서점이나 헌책방에 가면 신간으로 시작해서 전문 서적까지 두세 시간은 금세 보내버리는 고질병, 한번 들어가면 서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돌고돌고 도는 도서관 산책, 특정한 키워드가 입력되면 그 단어가 지시하는 수만 갈래 길로 방황하는 인터넷 서핑 중독. 하여간 그런 버릇 때문에 내게 필요한 자료와 지식은 내가 살펴서 확보한다고 살아왔으니, 창덕궁? 그마저 내가 몇 권 정도 훑어본 후 그중 한두 권을 탐독해 한가할 때 나 혼자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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