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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풍경

서울 간 ‘오빠’가 감옥 갇힌 ‘임’으로

박태준 ‘오빠 생각’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서울 간 ‘오빠’가 감옥 갇힌 ‘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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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간 ‘오빠’가 감옥 갇힌 ‘임’으로

박태준의 노래비 앞 탐방객들. 카메라 렌즈 앞에서 ‘오빠 생각’을 유장하게 그리고 구성지게 불렀다.

최씨는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증언했지만, 오빠 최영주가 광복 직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제는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최순애와 아동문학가 이원수 간의 로맨스다. 이듬해 가을 ‘어린이’지에 게재된 이 시를 읽고 이원수가 감동을 받았다. 이원수는 요즈음 말로 ‘필이 꽂혀’ 열세 살 소녀에게 편지를 띄우기 시작한다. 당시 수원에 살던 최순애와 멀고 먼 지리산 골짜기 경남 함안에 있던 이원수의 편지 교환은 차츰 열기를 띠게 되고 드디어 결혼을 기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0여 년간 연애편지를 교환한 끝에 1935년 첫 대면을 약속한 날 이원수는 문학 서클의 독서회 사건으로 일본 고등계 형사에 체포당해 1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최씨는 이 대목에서 “서울에 간 오빠를 기다리며 부르던 노래 ‘오빠 생각’이 옥에 갇혀 있는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노래로 변해, 남몰래 부르며 울었다”고 회고했다. 요즈음 말로 고무신을 바꿔 신지 않고 오매불망 일편단심 기다린 것이다. 시 발표 이후 10여 년 동안의 ‘오빠 생각’이 ‘임 생각’으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과수원 집 딸인 최씨는 유난히 코스모스를 좋아해 과수원 언덕에 가득 심어놓고 이원수의 출옥을 기다렸고 1년 뒤 이씨가 석방되자마자 결혼했다. 요즈음 세대에게는 믿기지 않을 순애보다.

작곡의 기본도 모르고 만든 노래?

노래를 만든 이는 박태준이다. 박태준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로 시작되는 이은상의 시에 곡조를 붙인 ‘동무생각(사우·思友)’의 작곡가이자 우리나라 근대 음악의 개척자다. ‘오빠 생각’은 시로 발표된 바로 그해 박태준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졌다.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박태준은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 문예교사로 있었다. 그는 ‘오빠 생각’을 작곡한 후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하기로 결심, 미국으로 건너가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칼리지를 졸업한 뒤 26년간 연세대에 재직했다. 그 어렵던 시절, 선교사 덕분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것이다.

박태준은 2년 후배인 현제명과 더불어 근대 음악계의 선구자쯤으로 인정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현제명과 박태준이 같은 대구 출신에다 계성학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이어 연세대 교수까지 함께 한 기이한 인연을 가졌다는 점이다. 박태준의 음악 활동은 동요에서 비롯된다.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 ‘가을밤’에 이어 수많은 동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가곡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오빠 생각’을 비롯해 ‘사우’ ‘책상 위의 오뚝이’ 등은 작곡의 기본도 몰랐던 20대 초반에 지은 것들이다.



노래 ‘오빠 생각’은 유장한 곡조에다 비장미까지 갖춰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오빠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는 겨레의 마음으로 제각각 해석되며 퍼져나갔다. 가사의 서정성과 토속성, 그리고 한국인의 한의 정서와 맞물리면서 사랑받던 동시는 노래로 불려지면서 그야말로 국민가요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요를 국민가요쯤으로 불리게 한 두 사람, 박태준과 최순애는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박태준의 부인 김봉렬이 증언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하루는 그 양반이 어린이 잡지를 한 권 들고 와 ‘뜸북뜸북 뜸북새’ 하며 읽더니 곡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시가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더니 결국 그날 밤 노래로 만들더군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지요.”

최순애도 박태준 선생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며, 방송국을 통해 기별이 있었지만 어떤 급한 사정으로 만남이 이뤄지지 않아 끝내 만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오빠 생각’의 흔적은 찾기가 쉽지 않다. 최순애의 고향 수원 북수동 생가터 격인 과수원은 수원성 복원사업으로 인해 아무런 자취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최순애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오랫동안 고향 수원을 떠나 서울 관악구 남현동에 살았다. 그래서 말년에 살던 남현동 예술인마을의 이웃들이 최순애의 행적을 간간이 증언해 준다. 그는 한동네 살던 미당 서정주와 내왕이 잦았다고 한다. 서정주가 장난스레 붙인 닉네임이 ‘뜸부기 할머니’다. 이런 연유로 오랫동안 최순애는 ‘뜸부기 할머니’로 불리다가 1998년 조용히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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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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