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더불어 그동안 조선을 강점·통치한 핵심적 중앙기관이던 조선총독부가 해체되면서 한반도에는 일시적으로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그러나 평양에는 8월 16일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가 수립되고 서울에는 9월 12일 ‘남조선주둔미국육군군사정부’가 수립되면서 권력 공백은 메워졌다. 일본군을 대체해 미군과 소련군이 새로운 통치권력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미국의 점령통치와 소련의 점령통치는 모두 초기의 일정한 기간에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대체로 1945년 9월 하순부터 11월 하순의 3개월 사이에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는 길은 매우 험난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각각 자국의 점령지역 안에 자국에 충실한 정부를 세우기 위한 잠정적인 계획을 세운다. 제2회는 이 기간에 관련된 논점들을 다룬다.
논점1
여운형이 일제 총독부로부터 이양받은 권력의 실체는 무엇이었나.
조선총독부가 일제의 항복이 임박했음을 정확히 인지한 때는 1945년 8월 10일이었다. 도쿄방송은 이날 오전 9시 30분 “일본 정부는 천황의 지위에 아무런 변경이 없는 조건이라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는데, 총독부 경무국은 단파방송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한 것이다. 다급해진 총독부는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그들을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시키려면 ‘조선의 명망 있는 지도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총독부의 제2인자인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는 총독부 안에서 한인으로 최고의 지위에 있는 조사과장 최하영(崔夏永)을 불러 ‘조선의 명망 있는 지도자들’에 대해 물었다. 최하영은 그들에 대해 대답했다. 그러나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송진우, 총독부 제의를 거절하다 | 정무총감 엔도는 8월 12일 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西廣忠雄)를 통해, 그리고 8월 13일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간부들 및 경기도지사 이쿠타 세자브로(生田淸三郞)를 통해, 송진우(宋鎭禹)에게 제한된 범위 안에서 행정권을 넘겨주겠으니 도와달라고 제의했다. 송진우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지 동아일보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됐고 ‘친일’의 흠을 전혀 남기지 않은 철저한 배일주의자(排日主義者)였다. 송진우는 어떠한 권한이든 연합국으로부터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제의를 거절한 채 칭병하면서 칩거했다.
여운형, 총독부 제의를 받아들이다 | 이틀 뒤인 8월 14일 오후 11시 조선총독부는 일제가 곧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국영통신사 도메이쓰신(同盟通信) 경성지사를 통해 전달받았다. 더욱 다급해진 총독부는 고위 간부회의를 열어 여운형(呂運亨)과 대화하기로 결정했다. 여운형은 1919년 3월 1일 거족적·거국적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서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약칭 임정)에 참여했으며, 항일운동과 관련해 중국에서 체포된 뒤 본국으로 송환돼 투옥됐던 경력을 지녔다.
여운형은 엔도의 요청에 응해, 두 사람 사이의 역사적 면담은 1945년 8월 15일 오전 8시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엔도의 관저에서 이뤄졌다. 의심의 여지없는 항일독립운동가인 여운형은 이 기회를 활용하는 것이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운형은 엔도에게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그것이 수락되면 자신도 총독부의 제의에 응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것들은 ①모든 정치범 및 경제범의 즉각 석방 ②집단생활지인 서울의 3개월(8~10월)분 식량 확보 ③치안 유지와 새 국가 건설을 위한 활동에 대한 일체의 불간섭 ④학생 및 청년의 훈련과 조직화에 대한 일체의 불간섭 ⑤조선 내의 각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들의 새 국가 건설 활동에 대한 협력 및 일체의 불간섭 등이 포함됐다. 엔도에게 여운형의 제의는 자신이 예상한 범위를 넘어선 것들이었다. 그러나 엔도에게는 아무런 다른 대안이 없었다.
더구나 이미 8월 9~10일 한반도의 북단에 진입했으며 14일에는 그 일부가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이 계속해서 남하하는 경우 서울도 소련군의 점령 아래 놓일 위험성이 크며, 이렇게 되는 경우 좌파 성향이 짙은 여운형의 협조는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엔도는 여운형에게 일제에 의해 아홉 차례에 걸쳐 투옥됐던 항일민족주의자 안재홍(安在鴻)에게도 함께 치안 유지에 협력해 달라고 전해줄 것을 부탁하면서 여운형이 제시한 요구들을 무조건 수락했다.
이 면담과 관련해 적어도 다음 세 개의 논쟁이 뒤따랐다. 첫째, 여운형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이양받은 권력의 실체에 관해서다. 한때 여운형도 그러했지만 측근의 몇몇 사람은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엔도는 훗날 일본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정권’이 아니라 ‘치안권’을, 그것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 넘겨주었다고 회고했다. 여러 자료를 살핀 뒤, 연구자들은 여운형이 받은 것은 ‘정권’이 아니라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치안권’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논점2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미군 자료는 정확한 것인가.
광복 이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
한국을 점령한 미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1945년 10월 5일 여운형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대가 일본인의 돈을 얼마나 받았느냐. 그대가 일본인의 돈을 받았다는 보고가 많이 들어왔다”고 힐난했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받은 일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논란은 뒤따랐다. 맥아더 원수가 일본을 점령한 뒤 일제 전범들을 처벌하기 위해 1946년 5월~1948년 11월 도쿄에 세운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이 문제가 제기됐을 때, 그 재판에 기소된 전범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 엔도는 “아는 것이 없다”고 답변했다.
연구자들의 의견도 엇갈렸다. 어느 연구자는 받은 것이 사실이라고 논평한 반면, 조선=한국 근·현대사의 권위자인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명예교수 이정식(李庭植) 박사는 여운형이 돈을 받았다는 자료는 미군정의 그 기록 이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논평했다.
논점3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비록 치안권이라도 인수받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세운 것은 정당한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 | 여운형은 자신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일제강점기 끝 무렵이던 1944년 여름에 비밀리에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을 중심으로 1945년 8월 15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계동의 한 건물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조선건국동맹이 과연 실존했었느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연구자가 있다. 그러나 실존했었다는 여운형과 그의 지지자들의 회상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여운형은 이튿날 당시 종로구 원서동에 있던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대중집회를 열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출범을 선언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출범은 남과 북의 조선=한국인 다수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져, 남과 북 모두에서, 특히 남한 곳곳에서 빠른 속도로 지부들이 발족됐다.
북한에서는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인민위원회’ 또는 ‘자치위원회’라는 이름 아래 별개의 위원회들을 발족했으나, 북한의 중심지인 평양에서는, 일제와 타협한 일이 없었던 민족주의자 조만식이 중심이 돼 서울의 건준을 한반도의 ‘중앙적’ 통치기관으로 받아들이고 북한을 대표하는 지방기관으로서의 ‘평남건준’을 출범시켰다. 남북한에서의 이러한 상황 전개에 유의해, 당시 미군정청 관리였으며, 귀국한 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미국의 남한 점령 통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랜트 미드는 건준을 한반도에서의 ‘사실상의 정부’라고 논평했다.
프랑스 중국 필리핀에서 점령자로부터 정권을 받은 사례들 | 여기서 하나의 논점이 제기됐다. 그것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 또는 ‘치안권’을 인수받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세운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했느냐의 논점이다.
이미 송진우는 일제로부터는 ‘정권’이든 ‘치안권’이든 어느 것도 받아서는 옳지 않다고 주장했었다. 그는 ①1940년 나치독일이 군사점령한 프랑스에서 1차 대전의 영웅 필리프 페탱 원수가 그들로부터 ‘정권’을 받아 프랑스 남부도시 비시에서 ‘프랑스국(國)’을 세워 그 수반으로 일했던 것 ②1940년 일제가 군사점령한 중국 난징에서 중화민국 정부의 요인이었던 왕정위(汪精衛)가 그들로부터 ‘정권’을 받아 난징국민정부를 세우고 그 행정원장에 취임했던 것, 그리고 ③1943년에 일제가 군사점령한 필리핀에서 호세 라우렐이 일제로부터 ‘정권’을 받아 제2공화국을 세우고 대통령에 취임한 것 등은 모두 괴뢰정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면서, 조선=한국에서도 일제로부터 ‘정권’을 받아 정부를 세운다면 그것은 정당성과 합법성이 결여된 괴뢰정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원칙주의자였던 송진우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고 이해된다.
여운형의 사례는 앞의 사례들과 달랐다 | 대조적으로 정치의 현실성을 중시하는 경우, 여운형의 결정은 수긍될 수 있다. 35년 동안 조선을 점령통치했던 일제의 항복이 임박했고, 남한과 북한에 대한 미군과 소련의 개별적 군사점령을 눈앞에 둔 초비상시국에서, 우선 조선=한민족의 통일적 중앙정부를 세워 점령군으로부터 그것을 기정사실로 인정받아 놓는 것이 독립국가 수립의 지름길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여운형이 직면한 당시의 상황은 페탱과 왕정위 및 라우렐이 각각 직면했던 상황과 큰 차이가 있다. 그 세 경우 모두 적국이 자국을 군사점령한 직후에 해당되지만, 여운형이 직면한 상황은 기존의 적국이 패망의 결과로 확실히 물러나고 승전한 새 점령국을 맞이해야 하는 역사의 완전히 새로운 단계였다. 조선=한민족에게 일정하게 자신의 새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행동 공간이 주어졌을 때, 비록 ‘제한된 범위의 치안권’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할지라도 건준을 세웠다는 것은 적국의 괴뢰정부를 세운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독자적 ‘통치기구’를 세우려고 한 시도로 풀이될 수 있다.
논점4
‘조선인민공화국’은 정당성과 합법성을 가졌는가.
여운형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이틀 전인 1945년 9월 6일 서울에서 약 1300명으로 구성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 대회의 의결을 거쳐 자신이 이끌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선인민공화국(약칭 인공)으로 개편했다. 이 대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아직 미국에 머물러 있던 이승만을, 그와는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그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선출하고, 부주석에 여운형을 선출했다. 거듭 말하지만, 여운형은 미국으로 하여금 이 ‘인공’을 남한의 공식적인 정부로, 한발 더 나아가 한반도의 유일한 공식 정부로 승인하도록 유도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 구상과 계획에 대해서는 앞으로 따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 우선 토론돼야 할 것은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과연 그 이름에 걸맞은 자격을 가졌느냐에 대해서다. 첫째, 이 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이 어떤 절차를 밟아 ‘대표’로 선출됐는지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확실하지 않다. 둘째, 이 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의 명단은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셋째, 이 대회가 열린 날짜와 장소 및 의제가 사전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일이 없었다. 국가의 수립을 선언하는 일과 같은 매우 중요한 의제는 사전에 공개됐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할 때, 이 대회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라는 이름에 결코 부합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 대회가 수립을 선언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적법성과 정당성은 인정되기 어렵다.
논점5
인공 수립은 여운형의 작품이었나 박헌영의 작품이었나.
1945년 8월 16일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 5000여 군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여운형의 또 다른 측근 이기형(李基炯) 역시 여운형은 수동적이었으며, 조선공산당이 이 일을 추진했다고 회고했다. 여운형의 이론적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던 이동화(李東華)도 같은 취지로 회고했다. 월북해 북한의 고위인사로 활동하던 여운형의 딸 여연구(呂鷰九)는 훨씬 더 강한 어조로 박헌영이 ‘인공’을 조직했다고 비난했다. 아버지가 박헌영이 사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채 대회에 꼭 참석해 줘야겠다고 요구해 응했을 뿐이라고 변명한 것이다. 이러한 변명들을 종합해, 이정식 교수는 “인민공화국의 설립은 박헌영계의 공산당에 의한 궁중혁명이었다”라고 단정했다.
여운형은 인공 수립의 적법성과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예상했던 것 같다. 이 점은 그가 이 대회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직후 연설하면서 “비상한 때는 비상한 인물들이 비상한 방법으로 비상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데서 드러난다. 같은 맥락에서, 여운형은 10월 1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 시급한 비상조치로 연합군이 진주하면 즉석에서라도 국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 즉 조선인민공화국이었다. 인민이 승인한다면 조선인민공화국은 그대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일련의 발언은 여운형이 그저 박헌영계의 정치적 음모에 빠져든 것은 아니고 그 스스로 일정한 범위 안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논점6
여운형은 왜 조급하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을까.
그러면 여운형은 왜 그러한 길을 밟았던가? 그는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 당시로서는 드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졸업생으로 마르크시즘·레닌이즘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국제정세에 대해 밝았던 이동화로부터 ‘현하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과 전망’이란 논문을 보고받았다. 이 논문은 기본적으로 일제가 패망한 이후의 국제정세를 ‘수렴론(收斂論)’에 서서 접근했다. 풀어 말해, 미국도 자본주의를 수정하는 길을 걷고, 소련도 공산주의를 수정하는 길을 걸음으로써 결국 공통의 광장으로 수렴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2차 대전 때 나치독일 · 파시스트이탈리아 · 일제 등 추축국에 맞서기 위해 잠정적으로 협력한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상호공존의 관계로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 여운형은 이 논문을 읽은 뒤, 이동화에게 “과연 미국과 소련이 협력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갈까?”라고 물었다. 이것은 여운형이 이 논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지만 그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래서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공식적인 정부로 선포해 기정사실로 만들어놓고 곧 서울에 진주할 미군으로부터 추인을 받게 되면 소련 역시 거기에 호응하리라고 예견했던 것 같다. 이후 그가 걸은 길이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 그는 언제나 미점령군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소련점령군과의 대화 역시 시도하는 정치 행보를 취하며, 소련점령군이 자신의 제의에 호응할 것이라는 기대를 1947년의 어느 시점까지는 유지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우선 미군에 접근했다. 9월 6일 자신의 친동생 여운홍, 그리고 백상규(白象奎) 및 조한용(趙漢用) 등 3인을 인천으로 보내 미군의 입항을 기다리게 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9월 8일 미군의 기함(旗艦)에 승선해 하지를 포함한 미군 고위 간부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대표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운형을 비롯한 7명의 한인 지도자 명단을 넘겨주고 미군은 이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여운홍은 9월 6일부터 인천에 머물렀기 때문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바뀐 것을 모르고 있었다.
미국, ‘인공’을 부인하다 |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미군 고위 간부들은 여운홍의 제의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자신들이 점령할 남한에서 ‘좌익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는 기본 지침을 받고 남한에 도착한 그들은 서울의 조선총독부와 교신하면서 이미 ‘조선인민공화국’을 공산주의자들의 집결체라고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군은 서울에 진주한 때로부터 사흘 뒤인 9월 12일 자신이 세운 미군정 이외에는 어떤 정치적 실체도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함에 따라 여운형의 그 복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뿐 아니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은 물론 그것의 기반이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도, 그리고 각 지방에 세워져 기능하던 인민위원회들도, 모두 부인했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자신이 이제까지 유지해 온 조직을 활용해 1945년 11월 12일 서울에서 조선인민당을 창당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논점7
미국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했더라면
그것이 기초가 돼 한반도에 통일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을까.
미군정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미국의 몇몇 학자는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다. 당시 미군정청의 관리였고 훗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으로 봉직한 그레고리 헨더슨이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들은 미군정이 ‘인공’을 인정했거나 최소한 ‘건준’을 공식적 정부로 인정했더라면 우선 해방 이후 남한에서의 혼란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어 ‘인공’도 그러했지만 ‘건준’ 역시 한반도 전체를 끌어안은 전국적 정치조직체였던 만큼 그것을 바탕으로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남북 분단이 굳어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련, ‘인공’을 부인하다 |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당시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미국도 그러했지만, 소련 역시 ‘건준’이나 ‘인공’을 전혀 인정할 수 없었다. 특히 ‘인공’에 관해 당시 남한에서 소련을 대표하던 유일한 국가기관인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관의 알렉산드르 폴랸스키 총영사는 본국 정부에 “남조선에서는 이 정부를 누구도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냉소적으로 보고했다.
총영사관의 제2인자 아나톨리 샤브신 부영사의 부인으로 총영사관 도서실장이던 파냐 샤브시나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은 미숙함과 불철저성을 보여줬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인민공화국 건국에 대한 모든 발상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대외적인 조건으로 보아 처음부터 혁명의 토대가 북조선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그것이다”라고 썼다. 샤브시나가 솔직히 지적했듯, 소련은 ‘혁명의 토대’가 남한이 아니라 북한에 놓여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논점을 깊이 연구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 러시아·동유럽연구소 교수 에릭 반 리(Erik Van Ree) 박사의 분석도 흐름을 같이한다. 그는 소련은 처음부터 ‘건준’이나 ‘인공’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았다고 논평했다. 북한을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터에 조선 전체를 통할하겠다는 정치조직이 남한에서 출현한 것을 호의적으로 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소련의 언론매체들이 이들에 대해 전혀 보도하지 않은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김일성, ‘인공’을 부인하다 | 소련도 그러했지만, 당시 북한에서 소련군의 비호 아래 조선공산당을 이끌던 김일성 역시 ‘인공’을 부인했다. 북한의 관영사학을 대변해 김일성 공식 전기를 쓴 백봉(白峰)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평양, 1968)은 1945년 11월 15일 열린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제2차 확대위원회에서 김일성이 ‘인공’에 대해 “정권이란 몇몇이 모여서 선포하는 것으로 세워질 수 없음을 지적하시었다”고 자랑스럽게 썼다.
김일성 스스로도 훗날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회상했다. ‘김일성저작선집’ 제1권(1979)에 따르면, 김일성은 그 회의에서 “인민공화국은 우리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반공분자이며 친미분자인 리승만을 비롯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들과 가짜 혁명가인 파벌분자들이 들어가 있으며, 참다운 애국자인 건실한 공산주의자들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라고 연설했다.
김일성은 또 “이러한 정부가 인민대중의 리익을 옹호하는 정권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인민공화국은 소위 특권계급을 위한 반인민적인 부르죠아정권이라고밖에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이러한 정부를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비난한 후 “우리는 인민공화국을 우리 인민의 정권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또 인정할 의무도 없습니다. 인민공화국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참다운 인민정권을 세우는 것을 포기하는 반인민적 행위입니다”라고 부연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미군정이 ‘인공’을 승인했더라면 그것이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기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김일성도 그렇고 더구나 소련도 남한에서 출범한 ‘인공’을 남북통일정부 수립의 뼈대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논점8
미군정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했더라면
그것을 기초로 한반도에 통일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을까.
수십 년 타향을 헤매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1945년 환국했지만 미 군정에 의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미군정이 임정을 부인한 것은 확실히 잘못이었다. 미국은 일제 패망 이전에도 임정을 하나의 망명정부로 승인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상황이 전적으로 바뀐 일제 패망 이후에도 여전히 그러했던 것이다. 만일 미국이 임정을 승인하고 임정을 신속하게 귀환시켜 적어도 남한만이라도 ‘통치’하는 정부로 기능하게 했더라면 남한에서의 혼란은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것을 뼈대로 삼아 공식적 정부 수립 또는 건국이 가능했었을 것이다.
소련, 임정을 폄하하다 | 비록 그렇게 했다고 해도, 임정을 뼈대로 한반도 전체를 통할하는 통일정부의 수립이 수월할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해 대답은 부정적인데, 이 물음과 관련해 당시 소련과 북한이 취한 태도를 살피기로 하자.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 가진 인식은, 일제의 패망을 76일 정도 앞둔 1945년 6월 29일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이 마련한 ‘코리아’라는 보고서 그리고 일제의 항복이 눈앞에 닥친 1945년 8월 1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국 ‘공보’에 게재된 ‘코리아의 국내외 정세에 대해’에서 감지된다. 앞의 경우, 소련은 코리아에 친소정권이 들어서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을 담으면서 미국과 중화민국에 대한 경계심을 표시했으며, 후자의 경우 임정에 대한 반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 그리고 임정의 마지막 주석이던 김구 모두를 ‘반동적’이라고 깎아내리고, 임정을 ‘장제스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보수적 성향의 세력’으로 폄하한 것이다. 임정의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에 대해서도 “김구보다는 덜 반동적이지만 친미적이다”라고 논평했다.
이승만과 김구를 비롯한 조선=한국의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소련의 비방은 일제가 패망한 직후에도 계속됐다. 글 두 편을 살펴보자. 첫째, 모스크바에서 출판된 소련의 국제 문제 전문지 ‘노보예 브레미야’(새로운 시대·1945년 8월 15일)에 실린 야브로이의 ‘조선, 그 과거와 현재’다. 이 글은 미국에서 이승만을 돕는 로버트 올리버가 워싱턴에서 출판한 ‘코리아: 잊혀진 나라’(1944)에 대한 서평이다. 여기서 야브로이는 이승만을 ‘반소주의자’ ‘반동’ ‘친미주의자’로 매도한 데 이어 임정의 주요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폄하했던 것이다.
야브로이의 글은 임정 지도자들에 대한 비방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해방된 조선이 미국과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되고 소련과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소련이 점령한 북한만은 결코 반소친미의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 글은 앞으로 조선이 토지개혁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히틀러의 독일로부터 해방된 유럽국가들에서 수행되는 방식에 따라 조선에서도 토지개혁을 수행함으로써 조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권고한 것인데, 이 권고는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소련이 북한에 엄중하게 부과할 과제임은 물론이었다.
둘째,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의 주코프가 작성한 보고서 ‘조선인 정치가 이승만의 특징’(1945년 8월 23일)이다. 이 보고서는 “조선인 정치망명가들 사이에서 이승만은 가장 반동적인 인물이다. 최근 그는 한 차례도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에 반소비에트적 성명을 제출했다”라고 상기시켰다.
이상에서 살핀 두 편의 글은 무엇을 말하는가. 되풀이해 말하지만, 그 글들은 조선에서 반소적인 정치인이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해 소련이 깊은 경계심을 지녔음을 보여줬다. 거기에는 조선에서 반소적인 정치인이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은 반드시 막겠다는 소련의 암묵적인 의지가 담겨 있다. 결국 소련은 최소한 자신이 점령한 북조선에서만이라도 반소적인 세력을 제거하고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겠다는 뜻을 지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친소정권이 토지개혁을 비롯해 사회주의적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는 뜻을 아울러 보여주었다.
북한, 임정을 모욕하고 폄하하다 | 임정에 대한 북한의 태도는 소련의 그것보다 훨씬 모욕적이었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임정의 역사적·정신적 기반인 3·1운동에 대한 당시 북한 지도자들의 인식을 살피기로 한다. 그들의 인식은, 특히 김일성의 인식은 1946년 3월 1일 발표된 기념사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 운동을 이끌었던 ‘령도층’이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환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나약, 무능, 동요, 무경험’했기에 군중을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그들이 부르주아 계급이었음을 상기시킨 뒤 ‘투항 변절 타락’의 길을 걸었다고 비난했다. 민족지도자 33인에 대해서나 그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서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3·1운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그 운동의 직접적 산물인 임정에 대한 모욕으로 이어졌다. 당시 북한에서 조선공산당을 통할하던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 선전부장 오기섭(吳琪燮)은 1946년 1월 2일 평양에서 열린 대중강연회에서 임정을 ‘대한림시정부’라고 한 뒤 ‘대한림시정부’는 사실상 별것 아니라고 조롱했다. 그는 “‘대한림시정부’는 거의 모두 리조(李朝) 량반의 자제들로써 구성돼 인민의 토대가 없는 망명정치가단체에 지나지 않으며, 3·1운동 이후에는 국내와 관계가 없고 조선해방운동과 분리돼 있었다”라고 폄하한 데 이어, 심지어 “대한림시정부는 외교권을 팔아먹은 매국단체이며, 어떠한 국제 회합에도 참석이 용인된 일이 없고 따라서 참석해 본 일이 없는 유령기관이다”라고까지 비방했다. 임정 산하의 광복군에 대해서도 “광복군이라고 해야 174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깎아내렸다.
오기섭은 일제강점기에 박헌영을 지지하면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해 13년에 걸쳐 투옥됐던 항일투사였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1950년대 중반 김일성이 박헌영계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할 때 제거됐다. 그러나 그의 임정부인론이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 정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임정을 폄하하고 부인했다. 2019년 문재인 정부가 3·1운동과 임정수립 100주년을 맞아 남과 북이 함께 기념행사를 개최하자고 제의했을 때 전혀 응하지 않은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상에서 살폈듯, 소련과 북한 모두 임정을 철저히 부인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이 임정을 조선=한민족의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고 해도 소련과 북한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임은 확실하다.
논점9
미군의 점령 당시 포고문과 소련의 점령 당시 포고문은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직후 내각 청사 앞에서 소련군 민정사령부의 주요 간부와 북조선노동당의 주요 계파를 대표하는 당 중앙위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소련의 포고문 | 북한 동북부로부터 공격해 들어오면서,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할 이반 치스치아코프 대장의 이름으로 8월 15일에 평양과 원산에서 우리말로 쓰인 ‘포고문’을 발표했다. ‘치스코프 대장의 포고문’이라는 표제의 이 포고문은 북한의 많은 곳에서 전단 형태로 살포됐다.
이 포고문이 발표된 날짜가 정확히 언제였는지에 대해, 그사이 학계에서 논란이 뒤따랐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 포고문을 게재한 신문과 연감에 날짜가 전혀 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연구자는 8월 24일에 발표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의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발굴된 자료에 근거해 소련과학원 동방학연구소가 1981년에 펴낸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 1945~1980’(대한민국 국토통일원 조사연구실 번역, 1988)은 그 날짜를 8월 15일로 명기했다.
길지 않은 이 포고문은 “조선인민들에게!”로 시작해 곧바로 “조선인민들이여! 쏘련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략탈자들을 구출해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로 이어졌으며 “조선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라는 문구로 이어지다가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로 끝을 맺었다. 중간중간에 어색하기도 하고 심지어 유치하기도 한 표현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조선인민들을 격려하는 흐름을 유지했으며, 읽는 이에 따라서는 감동적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확실히 이 포고문에 나타난 정신은 우리가 바로 앞에서 살핀 소련의 일련의 문서 또는 논설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의 진로를 친소반미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겠다는 언설은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는 구절이 헛구호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일깨워주었다.
미국의 포고문 | 소련점령군사령관의 포고문과는 대조적으로 9월 1일과 9일 발표된 미국의 남한점령사령관 하지 중장의 ‘포고문’ 제1호와 제2호 그리고 9월 9일 남한 상공에서 살포된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포고문’ 제1호와 제2호는 남한을 ‘해방된 지역’이 아니라 ‘점령된 지역’으로 규정함과 아울러 점령통치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군법회의’를 거쳐 ‘사형’을 비롯한 법적 처벌을 가하겠다는 따위의 협박적이면서도 살벌한 어휘들로 채웠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이 시기에 관한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또 하나의 논점이 제기됐다. 그것은 “소련은 북한에서 조선인의 자율권을 인정하고자 했음에 반해 미국은 남한에서 조선인의 자율권을 인정하지 않고 강압통치를 하고자 했다”는 문제 제기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점은 이미 그때 남한의 지도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북한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제기됐다. 예컨대, 김일성은 평양에서 열린 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의 제2일(1948년 3월 28일) 회의에서 행한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사업결산보고’에서 치스치아코프의 포고문과 맥아더의 포고문을 대비하면서, 소련은 “략소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존중하며 옹호하고 (있음에 반해…) 미군은 략소민족의 자주권을 침범하며 그들을 다시 노예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소련의 포고문과 미국의 포고문 비교 | 하지의 포고문과 맥아더의 포고문은 확실히 적절하지 못한 어휘들로 구성됐으며 한인들을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미국 측 포고문과 소련 측 포고문을 비교함에 있어서 그것들이 발표된 시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치스치아코프의 포고문은, 앞에서 지적했듯 1945년 8월 15일 발표됐다. 이 시점에서 치스치아코프가 과연 코리아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된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소련이 북위 38도선 이북의 코리아를 점령통치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을까. 스탈린이 트루먼으로부터 이 사실을 통고받은 시점은 소련의 현지시간으로 8월 15일 오후 또는 8월 15~16일 심야였을 개연성이 높은 점을 고려할 때, 치스치아코프의 포고문은 자신의 군대는 다만 일본군을 패퇴시키기 위해 코리아의 북부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며 그 지역을 잠시 점령한다는 목표를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한 목표 아래, 소련군은 북한 민중을 격려하고 자신에 대한 북한 민중의 자발적 지지를 높이는 쪽으로, 다시 말하면, 심리전의 차원에서 포고문을 작성했던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시기를 깊이 연구한 이완범(李完範) 교수는 “(이) 포고는 자신들이 점령군이라는 사실을 위장하기 위해 고도의 간교한 수사(修辭)를 구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논평했다.
이에 비해, 하지의 포고문과 맥아더의 포고문은 코리아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해 점령한다는 결정과 합의가 명백하게 성립됐고 그러한 뜻이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일반명령’ 제1호로 시달된 이후에 발표됐다. 따라서 미군 측은 점령통치의 법적 · 제도적 기초가 되는 이 ‘일반명령’ 제1호의 틀 안에서 일련의 포고문을 작성했을 것이다.
실제로 소련점령군도 하지의 포고문과 맥아더의 포고문이 발표된 그 시기에, 자신의 최초의 포고문 취지와는 다르게 북한을 자신의 ‘점령된 지역’으로 다루고 있었다. 우리가 다음 회에서 보게 되듯, 이 시기에 소련은 코리아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방안을 구상했으며, 부산-진해·제주도·인천 등을 자신의 관할 아래 두는 방안을 구상했고, 북한에 소비에트체제를 이식하는 방안을 연구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가 아니라, “이제는 모든 것이 우리들 소련의 수중에 있다”였던 것이다.
논점10
미군정청 수립 직후 미군정청은 왜 한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조치를 취했던가.
미군은 남한에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사려 깊지 못하게 행동했다. 무엇보다도 미군은 일본 경찰이 칼을 찬 채 도열한 상태에서 인천에 상륙했으며 일본 경찰은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한인 2명을 ‘질서유지’라는 명분 아래 사살했기 때문에, 한인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미군이 서울로 들어올 때도 한인들이 미워하는 일본군으로 하여금 연도에 도열해 있게 했다. 잘못은 계속됐다. 하지는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한인을 모욕하는 일련의 발언들을 했을 뿐만 아니라, 38도선에 대해 의아해하는 한인들에게 “나는 모른다. 본국 정부의 국무부에 물어보라”라는 식으로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것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그는 총독부의 일본인 및 조선인 관리들이 군정청에서 근무하도록 허용했다. 이런 조치에 대해 한인들이 항의했는데도, 미군정청 군정장관 아치볼드 아널드 소장은 9월 14일 조선총독부의 국장급 이상 고위관리들만 해임했을 뿐 일제시대의 경찰기구는 앞으로도 ‘존속’된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남한 사람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9월 18일 트루먼 대통령이 직접 그 이하급 일본인 관리들 전원의 해임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널드의 성명은 취소되지 않았으며 한인의 증오 대상인 일장기(日章旗)는 10월 10일에 가서야 관청에서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미군정은 일제시대의 경찰기구들과 경찰관들을 중심으로 10월 21일 자신의 산하에 경무국을 창설했다. 경무국은 1946년 4월에 경무부로 승격된다.
그러면 미군정청은 왜 이러한 조치를 취했던가. 그 해답은 당시 미국 트루먼 정부의 아시아 정책에서 찾게 된다. 트루먼 정부는 추축국이 패망한 시점에서 앞으로 미국의 적(敵)은 소련과 공산주의라고 판단하고, 동아시아에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지난날에는 적국이었다고 해도 일본을 ‘민주화’시키고 ‘부흥’시켜 자신의 동맹국으로 키워야 한다는 정책 방향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