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된 수식어 동원해 실소 짓게 하기
재미·풍자 버무려 한 줄로 댓글 작성
‘좋아요’ 숫자가 필력 가늠하는 척도
“드립 주고받으며 위로 얻어, 우리만의 소통 방식”
“주접 댓글은 MZ세대의 온라인 놀이 문화”
[땅끄부부 유튜브 캡처]
1월, 한 누리꾼이 6분 안팎의 피아노 연주 영상을 보고 감탄사를 쏟아내며 남긴 댓글이다. 2018년 9월 16일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 속에는 ‘피아노 영재’ 박지찬 군이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주제곡 ‘인생의 회전목마’를 연주하는 모습이 담겼다. 현란한 손놀림과 섬세한 감정 표현력이 보는 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이 영상은 8월 초순 현재까지 285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댓글은 9700개가 달렸다.
과장된 수식어 동원해 실소 짓게 하기
앞의 댓글은 누가 봐도 과장 섞인 농담이다. 하지만 누리꾼들은 이 댓글을 재밌어 하며 ‘좋아요’ 버튼을 눌러 공감을 표했다. 4100개 넘는 ‘좋아요’를 얻었다. 그 밑으로 덧글이 45개나 달렸다. 누리꾼들은 “저는 달팽이관이 돌아가고 있어요” “지금 360도 헤드 스핀(머리를 땅에 대고 도는 춤 동작)하는 중입니다” “어디 댓글학원이라도 다녔느냐” “약빤 드립력(약을 먹은 듯 제정신이 아닌 애드리브란 뜻)”이라고 썼다.이외에도 이 영상에는 센스 만점, 재치 만점 댓글이 주를 이룬다. “귀여운 아이가 연주한다고 해서 영상을 보러 왔는데, 귀여운 건 내 피아노 실력이었다” “최소 모차르트 인생 2회차” “저 아이는 피아노 레슨 진도표에 거짓으로 체크하지 않겠지” “전국의 놀이공원은 지찬이에게 회전목마 우선권을 줘라” 등의 댓글이 누리꾼의 웃음을 유발한다. 정치 기사에 달리는 댓글의 진지함이나 분노와는 거리가 멀다. 하나같이 개그와 드립의 연속이다.
과장된 수식어를 동원해 보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짓게 하는 댓글을 요즘 말로 ‘주접 댓글’이라고 한다. 주접의 사전적 정의는 몸치레가 추레함을 뜻하지만, 온라인 공간에서는 주접의 의미가 조금 다르게 쓰인다. 글이나 사진, 영상 등 콘텐츠를 보고 그것에 대해 과장과 허풍을 섞어 재치 있게 받아치는 행위를 총칭한다. 영상 내용보다 영상에 달린 댓글 보기에 열중한다면, 당신은 주접 댓글 특유의 재미를 좀 아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국내에 주접 댓글이 확산하기 시작한 것은 2018년 유튜브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이 같은 행위가 유행하면서부터다. 주접 댓글을 양산해 내는 콘텐츠는 소위 ‘댓글 맛집’으로 불린다. 주접 댓글은 빠르게 퍼져나간다. 누리꾼들은 소문을 듣고 댓글 맛집을 찾아온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주접 댓글을 읽고 또 직접 남긴다. 마치 백일장 대회를 치르듯 댓글창에서 자신의 글솜씨를 뽐낸다. 그때부터는 콘텐츠 자체보다는 콘텐츠에 달린 주접 댓글을 가지고 노는 판이 벌어진다.
재미·풍자 버무려 한 줄로 댓글 작성
어린이 유튜버 ‘띠예’의 영상에 달린 댓글이 화제다. [유튜버 ‘띠예’ 영상 캡처]
기성세대는 ‘이게 도대체 뭔가’ 의아해하지만, 젊은 세대는 놀이하듯 즐긴다. 심지어 ‘레전드(전설)급’ 주접 댓글을 따로 모아 편집한 게시물이 온라인 공간에서 돌아다닐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주접 댓글이 모여 원래의 콘텐츠를 뛰어넘는 콘텐츠가 된 셈이다.
주접 댓글이 주목받는 것은 MZ세대의 온라인 문화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MZ세대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고 짧은 언어로 대화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능숙하다.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주접 댓글은 바로 이런 MZ세대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쏟아지는 요즘, 순수한 매력을 가진 어린이 유튜버의 영상에도 주접 댓글이 끊이질 않는다. 80만 구독자를 보유한 어린이 유튜버 ‘띠예’의 자기소개 영상에는 한 누리꾼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띠예는 본명이 지예구나. 이모는 회사에서 노예야.” 띠예의 본명과 회사의 노예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지만 누리꾼들은 맥락 없이 이어지는 주접 댓글을 재미있게 받아들인다. “나는 공노비다” “사노비라도 되고 싶은 1인”이라며 덧글을 우르르 달았다.
“드립 주고받으며 위로 얻어, 우리만의 소통 방식”
배우 정우성 씨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누리꾼들이 남긴 주접 댓글을 읽고 있다. [tvn 유퀴즈온더블럭 캡처]
취업준비생 윤수연(25) 씨는 “주접 댓글의 암묵적 규칙은 재미있고 기발한 콘텐츠에만 남기는 것”이라며 “세상살이가 힘들고 팍팍하니 우울하거나 무기력해질 때마다 드립을 주고받으며 웃음과 위로를 얻는다. 일상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우리 세대만의 소통 방식”이라고 말했다.
능청맞은 자기풍자 내지 자기희화화로 폭소를 자아내는 주접 댓글도 인기다. 주로 운동 동작이나 다이어트 노하우를 소개하는 영상에 이런 댓글이 많다. 226만 구독자를 보유한 홈트레이닝 전문 유튜버 ‘땅끄부부’의 전신 스트레칭 영상에는 “이거 한 지 거의 4년이 됐는데 유연한 돼지가 됐어요” “저는 오늘도 눈으로 운동합니다” “내 몸뚱 감아” 같은 주접 댓글이 올라왔다.
말도 안 되는 난센스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은 주접 댓글에도 반응이 뜨겁다. 이런 댓글이 가장 활발하게 올라오는 곳은 주로 아이돌이나 인기 연예인 관련 콘텐츠다. 누리꾼들은 배우 정우성의 한결같은 외모와 매력을 칭찬하면서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과학자들이 우성오빠에 대해 연구했는데, 오빠는 폴리에틸렌(Pe), 리더포듐(Rf) 등등(Ect)으로 이뤄졌대요. 무슨 소리냐고요? 오빠는 퍼펙트(Perfect·완벽한).” “정우성 씨의 삐져나온 잔머리가 되고 싶어요. 계속 거슬리게.” “오빠, 오늘도 얼굴이 ‘열일’하시네요. 이러다 근로기준법 위반하겠어요.”
유튜브에 올라온 아이돌 ‘제국의 아이들’ 무대 영상에 달린 댓글이 화제가 되면서 댓글창이 놀이터가 됐다. [아이돌 ‘제국의 아이들’ 무대 영상 캡처]
누리꾼들의 찰떡같은 비유는 입꼬리가 올라가게 한다. 23년차 국내 최장수 아이돌 그룹 ‘신화’ 멤버들의 의리와 우정을 담은 유튜브 영상에는 “동네 친구들끼리 모여서 만든 그룹” “얼굴은 연예인인데 노는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형들”이란 댓글이 달렸다. 이 영상은 지금까지 167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날카로운 분석력으로 촌철살인을 날리는 ‘사이다’ 주접 댓글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든다. 아이돌 그룹 ‘제국의 아이들’ 노래 ‘후유증’ 유튜브 무대 영상에는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 그룹” “모두가 연예인이 될 팔자인데 그게 아이돌은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란 댓글이 누리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제국의 아이들이 2010년부터 2016년까지 활동할 당시에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1위에 한 번도 오르지 못했으나 임시완·박형식·황광희 등 멤버들의 개인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참신한 표현으로 재미·공감 선사할 때 짜릿”
주접 댓글에는 젊은 세대의 현실 비관적 측면도 엿보인다. ‘기업 인사담당자가 꼽은 불필요한 스펙’이란 제목의 게시물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내 기업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불필요한 스펙 1위로 ‘한자 또는 한국사 자격증’이 꼽혔다. 극기·이색경험, 석·박사 학위, 회계사 등 고급 자격증, 제2외국어 능력, 동아리·봉사활동 경험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 게시물에 한 누리꾼이 남긴 “그냥 ‘폭발물설치’ 자격증이나 딸래. 업무 연관성은 면접에서 떨어지면 찾아보는 걸로”라는 댓글은 누리꾼들의 마음을 울렸다. 이 게시물에는 “내 인생 하이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파이팅” “이 주접 댓글들을 보고도 문과(文科)한테 치킨집이나 차리라는 말이 나오느냐”라는 댓글도 달렸다.주접 댓글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면서 과거에는 주목받지 못했다가 뒤늦게 히트를 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유튜브에 올라온 가수 ‘비’의 노래 ‘깡’ 뮤직비디오가 대표적 사례다. 발표 당시에는 촌스러운 가사와 과장된 퍼포먼스로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일부 누리꾼들은 한물간 비의 행보를 조롱하며 주접 댓글을 달았는데, 이것이 온라인 공간에서 뜻밖에 화제가 됐다. 나중에는 주접 댓글을 보기 위해 영상을 찾아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로로 보면 비극, 세로로 보면 희극”이란 댓글은 이 현상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표현이다. 콘텐츠 자체를 즐기기 위해 전체 화면(가로)으로 뮤직비디오를 보는 게 아니라 작은 화면(세로)으로 댓글을 함께 본다는 의미다. “추천 영상에 뜨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깡’을 검색해 들어오시는 분들은 ‘좋아요’ 눌러주세요” “댓글 읽는데 노래가 너무 거슬리네요”라는 댓글에는 ‘좋아요’가 각각 57만여 개, 1만8000여 개를 기록했다.
주접 댓글을 즐겨 보는 직장인 박초롱(33) 씨는 “참신한 표현으로 누리꾼들의 재미와 공감을 이끌어내면 왠지 사람들한테 인정받은 기분이다. 내 댓글에 ‘좋아요’ 숫자가 많으면 뿌듯하다”며 “주접 댓글 가운데 평소 내가 생각하는 것을 명확하게 꼬집으면 온몸에 전율이 흐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런 재미에 주접 댓글을 자꾸 찾게 된다”고 말했다. 유튜버로 활동하는 대학생 김현우(27) 씨는 “요즘엔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에 주접 댓글이 많이 달리는데, 누리꾼들이 주기적으로 영상을 보러 오는 덕분에 수익 창출은 물론 콘텐츠 제작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MZ세대 온라인 놀이 문화로 떠올라
빙그레가 선보인 만화 캐릭터 ‘빙그레우스 더 마시스’. [동아DB]
최근 주접 댓글은 광고계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우선 이런 주접 댓글을 염두에 둔 콘텐츠를 선보이는 기업이 여럿 등장했다. 빙그레, 오뚜기, 동아오츠카 등이 대표적. 이들은 SNS에 콘텐츠를 올리는 전담부서를 두고 누리꾼들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한창이다. 하지만 무작정 이목을 끌려는 콘텐츠는 반감을 사기도 한다. 댓글로 함께 놀 수 있는 판을 만들어줘야 MZ세대는 ‘이 기업이 일을 참 잘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2월 빙그레는 ‘빙그레 왕국’의 왕위 계승자라는 콘셉트의 만화 캐릭터 ‘빙그레우스 더 마시스’를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선보였다. 빙그레 제품과 로고로 온몸을 치장한 캐릭터가 화제를 모았다. 망가지거나 격식을 깬 유머 코드를 담은 B급 콘텐츠가 돋보였단 평가다. 빙그레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어는 14만 명에 달한다.
기업들이 MZ세대의 주접 댓글을 눈여겨보는 이유는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시작하는 연령대이기 때문이다. MZ세대는 기성세대에 비해 기업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강승수 빙그레 홍보팀 차장은 “빙그레의 콘텐츠가 젊은 누리꾼들의 놀이터 역할을 하면서 브랜드 가치가 상승하는 효과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주접 댓글 열풍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전우영 교수는 “코로나19 여파로 오프라인에서 활동시간이 줄면서 상대적으로 온라인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미 주접 댓글이 하나의 콘텐츠로 자리매김한 상황이어서 더 많은 젊은 누리꾼이 주접 댓글 놀이에 노출되고 그 매력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