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얻은 ‘민주화 운동가’의 명예
1987년 항쟁, 양김·언론·검찰·재야·시민 합작품
학생만 시위? 도시빈민도 경찰에 돌 던지며 싸워
1995년 與, 필요에 의해 386에 민주화 훈장 달아줘
70년대 운동권과 80년대 운동권 분기점 반미주의
美로부터 해방? 87년 전두환 무력진압 막은 게 미국
실제 기여한 만큼만 누리게 제 몫 찾아줘야
2000년 3월 26일 서울 여의도 당시 민주당사에서 열린 ‘386세대를 위한 후원회’에서 서영훈 대표(왼쪽에서 세 번째) 등이 민주당 386세대 후보인 임종석(왼쪽에서 두 번째), 이인영(오른쪽에서 세 번째), 우상호(오른쪽에서 두 번째) 씨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금액 3만8600원을 모금함에 넣고 있다. [동아DB]
‘산업화 세대’란 195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청년기를 보내고 이제 은퇴 연령대에 이른 1차 베이비부머를 주로 지칭한다. ‘민주화 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고 이제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할 나이가 된 이른바 ‘386세대’를 뜻한다.
대한민국 권력의 무게추가 1950년대생에서 1960년대생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말은 반박할 여지가 크지 않다. 하지만 산업화 세대에서 민주화 세대로 주류가 교체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386세대는 민주화 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민주화 세대로 불리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징조작’이자 ‘프로파간다(Propaganda) 행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화 세력으로 포장
1986년 3월 5일 김영삼·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등이 직선제 개헌추진 천만인서명운동본부 현판식을 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동아DB]
세대사회학 전문가인 박재홍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는 2006년 ‘교수신문’에 ‘先산업화 後민주화, 정치적 세대구분 옳지 않아’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박 교수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라는 용어가 정착된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50∼60대 산업화 세대와 30∼40대 민주화 세대라는 표현의 기원은, 제15대 총선을 앞둔 1995년 말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이 영입 대상 인사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정계 원로 등의 안정 희구 세력을 산업화 세력으로, 재야 운동을 하는 개혁 세력을 민주화 세력으로 포장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1995년 당시 신한국당이 민주화 세력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던 대상은 386세대뿐만 아니라 재야 운동권 전반을 포괄했다. 물론 어찌 됐든 당시 집권 여당이 386세대에 민주화의 훈장을 달아줬다는 점은 분명하다.
1995년은 구소련이 붕괴하고 몇 년이 지난 뒤다. 북한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던 시절이다. 한국에서는 왕년의 운동권들이 새로운 인생을 찾고 있던 무렵이기도 하다. 정작 이들은 변변히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었다. 일부는 출판·영화·음악 등 문화 영역에서 활동하며 크고 작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정치가 ‘소프트 파워’(문화·예술 등이 행사하는 영향력)와 거리를 두던 시절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학생운동권에 대한 불신 섞인 눈빛도 여전히 존재했다. 386세대가 사교육 시장에 적극 뛰어들어 돈을 벌기 시작한 시점은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학생운동권의 ‘장기(長技)’는 조직력이다. 김영삼의 신한국당은 386세대를 ‘젊은 피’로 수혈키로 결정한 뒤 민주화 세력이라는 레토릭(rhetoric)을 활용하며 이미지를 세탁해 줬다. 당시 집권당이 직접 나서서 민주화 세력(혹은 세대)이 완전무결하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역사적 공헌을 했다고 포장해 준 것이다. 바야흐로 일부 386세대 인사들의 삶에 새로운 활로가 뚫렸다.
설령 신한국당의 간택을 받지 못했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김영삼이 386세대 출신 운동권을 영입하자 평생 ‘빨갱이’라고 음해받아 왔던 김대중 역시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그는 1995년 7월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듬해 치러진 제15대 총선에서 김대중은 32세의 김민석(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서울 영등포 을에 출마시켰다. 각각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송영길과 우상호 역시 1990년대 후반 김대중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386세대가 비로소 사회 주류로서 첫 걸음을 뗐다.
중국 동북공정에 견줄 ‘민주공정’
정리하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정치권은 30대 젊은 인물을 영입하려 했다. 당시 30대가 386세대다. 이들 세대 사이에는 합법·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조직 활동을 해본 경험은 있으되 사회 진출에는 어려움을 겪던 고학력자 무리가 떠돌았다. 하지만 당장 정치권에 진출할 만한 그럴듯한 경력이 전무했다. 이에 그들이 필요했던 주류 정치권은 앞장서서 386세대 일부에 민주화 세대라는 훈장을 달아줬다.실은 산업화뿐 아니라 민주화에 끼친 1960년대생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 중학생과 고등학생까지 돌 던지고 싸운 1960년, 혹은 박정희에 맞선 투쟁이 펼쳐진 1970년대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다. 1980년대에 386세대가 대학생 신분으로 전두환의 신군부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그 긴 투쟁의 역사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시기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세력의 크기나 당사자들이 겪은 고난의 비중을 보더라도 그렇다.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정치 거목은 의원직 박탈, 가택연금, 의문의 교통사고와 납치, 사형 선고 등을 겪으면서도 군부독재 종식을 향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양김을 따르는 가신 그룹, 즉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역시 무수한 고초를 치렀지만 보스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고 결국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뤄내는 데 기여했다.
그에 비하면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대학생들이 민주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는 그리 크지 않다. 물론 신군부가 볼 때 성가신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군부의 권력 핵심을 위협할 만큼의 힘은 발휘하지 못했다. 학생운동권은 권력을 갖기에 너무도 어렸다.
1987년 항쟁이 전개된 과정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 점은 분명하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라는 두 거대 기성 언론이 반기를 들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보도했다. 신군부는 덮고 넘어가려 했지만 검찰이 반발해 사건을 수면으로 꺼내 정치 쟁점으로 승화시켰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까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저항적 기독교 세력, 이른바 ‘재야’의 원로들이 힘을 보탰다. 게다가 김영삼과 김대중 두 명의 지도자가 대안으로 존재했다. 국민 여론이 그 두 명을 통해 언제든지 정권 교체의 물결로 이어질 개연성이 컸다.
당시 대학생들이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은 아니다. 열심히 시위를 했고, 서울대생 박종철과 연세대생 이한열이 희생됐다. 그들의 죽음은 정권을 쓰러뜨릴 더 큰 시위의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촉발 원인에 지나지 않았다. 기저에 깔린 동력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국민 사이에서 꾸준히 누적돼 온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렇기에 서울에서 시위가 격화하자 이른바 ‘넥타이부대’가 정권에 반대하며 목청을 드높였다. 대학은 고사하고 중학교도 못 나왔을 도시의 기층 빈민들이 경찰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싸웠다.
결국 신군부는 항복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약속했고 헌법은 개정됐다. 신군부가 권력을 몽땅 빼앗긴 건 아니지만 양김과 그 추종 세력인 상도동, 동교동계에 힘이 실렸다. 제6공화국은 개막과 함께 ‘3김 시대’(김영삼·김대중·김종필)로 전환됐다. 그러니 북한에서 흘러들어온 주체사상 문건을 달달 외우며 이 나라를 혁명적으로 둘러엎을 궁리나 하던 젊은이들의 힘으로 신군부가 쓰러졌다고 포장하는 건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마치 중국의 동북공정에 비견할 만한 ‘민주공정’이다. (*동북공정은 중국 국경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사의 일환으로 편입하려는 중국 당국의 프로젝트로, 역사왜곡 논란을 빚었다.)
1983년생이 월드컵 겪었다고 월드컵 신화 만들었나?
1987년 항쟁 무렵 대학에 다닌 이들을 그럼에도 민주화 세대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87년 정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87년의 대격변을 스스로 만들어낸 덕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이는 마치 2001년에 대학에 들어가 2002년에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 월드컵을 경험한 나를 ‘월드컵 세대’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나는 2002년 월드컵의 분위기 속에서 청년기를 보냈고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런 면에서 나를 월드컵 세대라 부르는 건 타당하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나 혹은 내 또래들이 만든 건 아니다. 월드컵에서 뛴 선수 중에는 내 또래가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월드컵 자체는 분명 내 윗세대의 작품이었다.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는 작은 부품이자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월드컵 세대와 달리 386세대의 자의식이 매우 비대하다는 데 있다. 386세대는 처음부터 주류의식에 가득 차 있었다. 이 나라의 의사결정 및 여론을 자신들이 쥐락펴락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을 정치권에서 소환한 방식 자체가 그 세대의 비대한 자의식을 더욱 부추겼다. 학생운동 좀 하다가 야인으로 떠돌았는데 불현듯 ‘민주화 운동가’라는 명예를 얻게 됐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386세대는 어떤 이름으로 호명돼야 마땅할까? 잠시 세대 문제를 연구한 최초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의 지혜를 빌리자. 만하임은 ‘세대 문제’에서 세대를 구분하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첫째, 세대 위치. 이는 1980년대생, 2000년대생처럼 출생 시기에 따라 나누는 방식으로 가치 평가와 무관하다. 386세대에는 80년대 학번이라는 범주가 덧붙지만, 기본적으로는 1960년대생이라는 세대 위치가 그들을 개념화한 셈이다.
둘째, 실제 세대. 세대 위치가 사회적 요소에 따라 구분되는 것을 뜻한다. 가령 1929년생과 1924년생은 세대 위치상으로는 유사하지만 실제 세대는 확연히 구분된다. 1924년생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에 입대 연령인 스무 살이 되면서 전쟁터에 끌려갔다. 한 번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후 1950년 한국전쟁에서 또 입대 연령에 포함돼 두 번의 군 생활을 한, 지지리도 운 나쁜 ‘묻지 마라 갑자생’이다. 반면 1929년생은 입대 연령, 즉 성인이 됐을 때 이미 일제가 망했다. 태평양전쟁까지 몸소 겪을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제 부역 논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셋째, 세대 단위. 지역·소득·교육·기타 변수에 따라 같은 경험을 공유한 이들을 묶는 개념이다. 386세대라는 이름에서 1980년대 학번에 방점을 찍으면 비슷한 시기 대학을 함께 다닌 경험을 강조하는 것으로, 세대 단위에 주목하는 셈이다. 같은 논리에 따라 민주화 세대라는 명칭은 세대 단위 안에서도 특정 집단을 다시 분류하는 개념이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 중,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고 훗날 자신들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용어일 테니 말이다.
386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反美
1987년 6월 시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동아DB]
386운동권의 주류는 왜 반미주의에 경도됐을까.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한 해석 때문이다. 그들의 ‘공식적’인 미국관(觀)을 요약하면 이런 식이다.
‘광주항쟁이 발생할 무렵 미국은 항공모함을 한국 쪽으로 보내고 있었고, 따라서 군사적으로 전두환 정권을 압박해 공수부대를 원천 차단하거나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광주의 비극을 방치했는데, 이는 어쩌면 방치를 넘어선 적극적 공모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전시작전권은 유엔사령부에 있고 결국 미군의 허락 없이 한국군은 움직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주의 비극 배후에는 미국이 있고 우리는 1980년 현재까지도 미국의 식민지에 불과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민족은 해방돼야 한다. 미국을 혼내주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독립해 진정한 민족국가를 되찾기 위해, 북한과 적극적으로 손잡거나 민중의 저항을 꾀하는 등 혁명을 모색해야 하며, 미국의 꼭두각시인 일본과는 더욱 철저하게 대립해야 한다.’
1980년 이전에는 진보라고 해서 반미주의를 당연시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친미 우파였던 장준하, 반공 진보 기독교 사상가였던 함석헌 등을 떠올릴 수 있겠다. 기층 단위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임미리가 저서 ‘경기동부’에서 묘사하고 있는바, 훗날 성남시로 승격하는 경기 광주군에서는 1971년 8·10 사건 이후 빈민운동, 야학운동, 선교활동 등이 활발히 벌어졌다. 무리한 강제 이주의 폐해와 개발 및 보상 과정에서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춘 운동이었다.
하지만 명맥은 훗날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광주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광주’ 출신의 학생들이 나타나 ‘경기동부’의 모태가 됐다. “대학가에 퍼진 광주 학살 미국 책임론을 감안하면 그 뒤 성남의 청년·학생운동이 NL쪽으로 기운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경기동부’ 중)
물론 대학가의 반미 감정이 동일하지는 않았다. 특히 서울과 광주의 인식차가 컸다. 박찬수는 ‘NL 현대사’에서 “익명을 요청한 전남대 출신 인사의 말로는, 당시(1985) 공동 투쟁을 준비하면서 서울과 광주 사이에 반미 구호의 수준과 미국문화원 타격 수위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대세 변화는 분명했다. 1986년 9월 8일 전남대 5·18 광장에서는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출범식이 열렸다. 이 조직은 훗날 PD로 진화하는 CA(제헌의회) 계열이 주도한 것이다. 하지만 “학생 수백 명은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면서도 ‘수입개방 강요하는 미제를 몰아내자’ ‘제헌의회 소집투쟁으로 미제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쳤”(‘NL 현대사’ 중)고, 사흘 뒤에는 같은 장소에서 ‘반미구국투쟁위원회(반미투)’가 출범했다.
운동권 내부에 속한 이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노선 투쟁이 전개됐겠으나, 외부자의 시각에서 거대한 흐름의 변화는 분명해 보인다. 주한미국대사관 한국과장을 지낸 전직 외교관 데이비드 스트라우브는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에서 반미가 주류가 된 과정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1979~1980년 사건들 이후 발생한 반미주의 내러티브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1987년에도 한국인들은 미국의 행동을 과거와 똑같은 렌즈를 통해 보고 있었다. 이 반미 내러티브는 계속 살아남았으며,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특히 소위 386세대라고 일컬어지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세대 사이에 남아 있다.”
그들은 민주화된 대한민국 추구하지 않았다
설령 이와 같은 반미 내러티브가 사실이라 해도 이후 현대사의 진행을 놓고 보면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미국이 기여한 바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 반미의 관점에서 현대사의 다양한 사건을 논하는 김형민(필명 산하)은 1987년 항쟁의 성공 이면에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순순히 인정한다. 진보 성향 인터넷매체 뉴스톱에 실린 ‘6월 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칼럼의 한 대목이다.“그러나 역시 가장 큰 작용을 한 것은 미국이지 싶다. 미국 CIA는 판세를 읽은 후 주한미군에서 탱크 5대를 지원받아 특전사, 수방사 등의 한국군 부대 정문 앞에 가서 고장이라도 난 듯 버티고 세워놓았다고 한다. 즉 ‘나오지 마라’는 시위를 한 셈이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주한 미국대사 릴리였다. 그는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력을 동원하지 마십시오. 레이건 대통령의 뜻을 거슬러 군대를 동원한다면 80년 광주에서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재발될 겁니다.’ 한 나라의 대사가 주재국 대통령에게 할 소리 수준은 넘어 있었다. 릴리는 이 한 마디를 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군바리야. 정말 그러면 너도 죽어.’”
미국에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방관한 책임이 있다고, 즉 반미 내러티브에 어느 정도 타당한 구석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 해도 미국은 1987년 전두환의 무력 진압 시도를 가로막았다. 다시 말해 서울이 제2의 광주가 되지 않도록 기꺼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빚을 어느 정도 갚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김형민의 ‘역사 팩트체크’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한번 새겨진 적개심과 증오는 뇌에 새겨진 문신과 같다. 사실과 논리를 아무리 부어서 박박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반미주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상과 이념을 버리는 차원을 넘어선다. 자신의 젊은 시절, 그 청춘을 함께한 친구와 동료, 그들이 제공하는 편안한 인간관계와 따스한 추억을 모두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미는 한 세대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 즉 존재의 이유가 되고 말았다.
반미를 외친 세대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바는 없는가?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곧 민주화 세대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민주화된 대한민국을 추구하지 않았다. 과거 학생운동권이었으나 현재 편의점주로 활동하고 있는 봉달호(필명)는 ‘신동아’ 7월호에서 정직하게 고백한다.
“반미, 종북이 본질이었던 우리 운동을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는 것은 도둑질하려고 은행에 들어갔다가 우연찮게 은행 강도를 잡은 도둑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형국이랄까. 물론 강도를 잡은 것은 맞지만 원래 자신의 의도를 고백하지는 못하더라도 조용히 반성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역사 재평가와 제 몫 찾아주기
그 ‘강도’를 자칭 민주화 세대가 혼자 잡은 것도 아니다. 1987년 항쟁의 성공에는 김영삼·김대중이라는 불세출의 정치 지도자와 그들을 믿고 따르던 세력, 그리고 묵묵히 투표하고 시위에 참여한 다수의 시민이 있었다. 또 1980년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내정 간섭 논란의 여지를 무릅쓰고 신군부를 억누른 미국의 역할 또한 재평가돼야 한다.다시 말해 자칭 민주화 세대의 역사적 공헌과 위상은 과대평가됐다. 물론 그들의 역할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화라는 자랑스러운 역사적 성취는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의 것이다. 민주화 세대는 없다. 다만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반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세대가 있을 뿐이다. 그들이 실제로 기여한 바에 걸맞도록 제 몫을 찾아주어야 마땅하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