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문 없이 전화로 ‘사무검사’ 통보”
“‘블랙리스트’ 만들어 특정 단체 겨냥한 듯”
“증빙자료 ‘산더미’ 요구, 정상적 행정 아냐”
공동대책위 “자료 요구 불응할 것”
통일부 “대상 단체 대표 모두 탈북민? 우연의 일치”
“통일부 공무원이 전화로 탈북민 단체를 전수 조사한다고 말했어요. 갑자기 무슨 조사냐고 묻자 ‘사무검사’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법인 설립 목적에 맞게 활동했는지 총회·이사회 회의록 등을 살펴보겠다고 하더군요. 공문 1장 없이 전화로 말이에요. 어안이 벙벙했죠.”
7월 15일 서재평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은 통일부 공무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여태껏 통일부에 운영 실태를 정기 보고했습니다. 보고 내용이 부실하다고 지적받은 적도 없고요. 탄압의 표적이 됐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탈북자동지회는 북한 노동당 비서 출신으로 탈북한 고(故) 황장엽 씨가 1999년 세운 북한인권운동 단체다.
8월 1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30여 개 시민단체가 모여 ‘정부의 북한인권·탈북민 단체 탄압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위). 통일부가 64개 시민단체에 보낸 ‘등록요건 유지 여부 점검표’. [북한인권·탈북민 단체 공대위 제공]
“‘김여정 하명 검사’ 응하지 않을 것”
통일부가 북한인권·탈북민 단체를 탄압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7월 16일 통일부는 부처에 등록된 25개 비영리 법인(전체 433개)에 대한 사무검사(단체 운영 상황을 파악하는 행정 절차)를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법인이 아닌 비영리 민간단체 64곳의 등록요건 점검에도 나섰다. 사무검사·등록요건 점검 대상이 된 곳 모두 북한인권이나 탈북민 정착 지원과 관련된 단체다. 25곳 중 13곳은 탈북민이 대표다.북한인권·탈북민 단체들은 “통일부의 ‘찍어내기식’ 표적 검사”라며 반발하고 있다. 도희윤 선진통일교육센터 대표는 “통일부의 느닷없는 요구는 정치탄압이다. 통일부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특정 단체들을 겨냥한 것으로 의심된다”며 “통일부가 우리 단체 사무실을 현장 방문하겠다고 연락했으나 응할 생각이 없다. 김여정이 하명한 검사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익명을 원한 북한인권 활동가는 “통일부 조치에 북한인권 활동가들이 공분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북한의 요구를 그대로 따른다. 북한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며 “우리 정부가 보위부 남한지부인가. 아니라면 갑작스레 단체들을 검사하는 이유를 해명하라”고 말했다.
이영환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대표는 통일부가 요구한 자료가 지나치게 방대하다고 지적했다. 통일부는 64개 단체에 ‘등록요건 유지 여부 점검표’를 보내 6가지 항목에 대한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이 대표는 “통일부는 ‘사업 수혜자가 불특정 다수’이거나 ‘구성원 상호간 이익 분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한 증빙자료’로 해명하라고 한다”며 “어떤 양식으로 어찌 증명하라는 가이드라인도 없다. 관련 문서를 모두 합치면 산더미 같다. 정상적 행정 절차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433개에 달하는 법인 중 북한인권·탈북민 단체 25곳만 사무검사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통일부 관계자는 “‘탄압’ 의혹은 오해다. 올해 정의연(정의기억연대) 사태 이후 사무검사를 계획했다. 일부 시민단체가 대북전단 살포로 물의를 일으켜 국회와 언론의 지적도 있었다. 통일부에 등록된 단체의 운영상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라고 밝혔다. 선정 기준에 대해 묻자 “지난 3년 동안 활동 보고서를 내지 않았거나, 제출했어도 내용이 부실한 단체다. 25개 단체 중 13곳의 대표가 탈북민인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답했다.
“25개 단체 어딘지 밝히기 곤란”
통일부는 8월 13일 현재 사무검사 대상 25개 단체가 어느 곳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실이 통일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 중 사무검사 대상임이 확인된 단체는 탈북자동지회·북한민주화위원회·겨레얼통일연대·비전코리아 4곳이다. 모두 탈북민이 대표인 단체다.이에 대해 통일부 관계자는 “25개 단체가 어느 곳인지 구체적으로 모두 밝히기 곤란하다. 자칫 단체들의 명예가 실추될 수 있다. 검사 대상 단체에는 모두 연락해 사실을 통보했다”고 밝혔다.
관련 단체 관계자들은 사무검사가 법인 취소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 등록이 취소되면 단체의 모금 액수는 개인당 1000만 원 이하로 제한된다.
7월 17일 통일부는 탈북민 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과 큰샘의 법인 설립허가를 취소했다. 두 단체는 6월 접경지역에서 북한으로 ‘삐라’를 날리거나 페트병에 쌀을 담아 바다로 띄워 보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6월 16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며 대북전단 살포를 빌미로 삼았다.
통일부는 설립허가 취소 사유에 대해 “두 단체가 정부의 통일정책과 통일 추진 노력을 심대하게 저해함으로써 설립허가 조건을 위배했다”면서 “접경지역 주민의 생명·안전의 위험도 초래했다”고 밝혔다. 주무 관청은 법인이 “목적 이외 사업을 하거나 설립 허가 조건 위반, 기타 공익을 해하는 행위를 한 때”(민법 38조)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
법원은 통일부의 조치에 제동을 걸었다. 8월 12일 서울행정법원은 큰샘의 “비영리법인 설립허가 취소 처분의 효력을 정지해 달라”는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했다. 재판부는 “신청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긴급한 필요가 있음이 소명된다”고 인용 취지를 설명했다.
탈북민·북한인권 단체들은 공동 대응에 나섰다. 8월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정부의 북한인권·탈북민 단체 탄압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출범했다. 북한인권·탈북민 단체 30여 곳이 참여했다.
탈북민 출신 인권운동가인 강철환 공대위 공동위원장은 “통일부의 사무검사와 등록 요건 점검 모두 거부한다. 중장기적으로 북한인권 운동을 훼방 놓는 문재인 정부에 맞설 것”이라고 밝혔다.
황필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도 통일부의 조치에 우려를 표했다. 공감은 소수자 인권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진보 성향 비영리단체다. 2004년 ‘아름다운 재단’ 산하 조직으로 출발해 2012년 독립했다. 황 변호사의 말이다.
“시민단체에 대한 검증이 부족했다면 통일부가 개선하면 됩니다. 맥락 없이 법적 근거만 들이대 사무검사에 나서니 오히려 의심스럽습니다. 물론 현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비판적 시민단체를 더 노골적으로 억압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시대를 겪었다면 현 정부는 시민단체의 비판 정신을 살려줘야 해요.”
국제사회의 이목도 쏠리고 있다. 7월 31일 토마스 오헤아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은 미국의소리(VOA) 방송과 인터뷰하면서 “한국 정부가 시민단체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때까지 현재 진행 중인 조치를 중단하도록 권고했다”고 밝혔다. 7월 30일 통일부는 킨타나 보고관과 화상 면담을 통해 이번 조치가 합법적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한국 정부의 냉혹한 협박”
미국의 전직 고위 당국자 10여 명은 8월 12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시민단체 탄압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 리처드 앨런 전 국가안보보좌관과 로버타 코언 전 국무부 인권담당 부차관보, 게어 스미스 전 국무부 인권담당 부차관보 등이 서한에 이름을 올렸다. 앨런 전 보좌관은 1980년 미국 정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 집행을 막는 데 일조했다. 이들은 서한을 통해 “한국 정부의 조사는 단체들이 북한인권 문제를 다루기에 일어난 냉혹한 협박이다. 북한인권 단체에 대한 공격 대신 지지를 촉구한다”고 비판했다.논란이 확산되자 정부는 진화에 나섰다. 8월 12일 통일부는 사무검사 대상을 사회·문화 분야 법인 109곳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비영리 민간단체 등록요건 점검도 통일부 담당 단체 180곳 전체로 확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