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호

[신평의 ‘풀피리’①] 원조 ‘블랙리스트 판사’의 쓸쓸한 歸村

  • 신평 변호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lawshin@naver.com

    입력2020-08-25 14: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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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중앙선대위에는 ‘공익제보 지원위원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지낸 신평 변호사(64·사법연수원 13기)는 이 조직의 공동위원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여권을 향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지식인의 본보기 역할을 하고 있다. 신 변호사가 8월 25일부터 매주 화요일마다 ‘신동아’에 에세이를 싣는다.
    신평 변호사 집 전경. [신평 제공]

    신평 변호사 집 전경. [신평 제공]

    ‘신동아’가 매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잘 될지는 모르겠으나, 한적한 시골에서 풀 냄새, 바람 냄새 맡고 푸른 하늘과 구름을 올려다보는, 땅에 푹 가라앉아 하는 편안한 이야기를 엮어나가고 싶다. 

    장마가 끝난 후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허나 이미 계절은 옮겨가기 시작했다. 얼마 전 고추잠자리 군단이 유유히 공중을 유영하며 일대를 점령하더니 모기를 쓸어가 버렸다. 모기 개체수가 확연히 줄었고 아침, 저녁에 부는 바람이 조금 선선하고 부드러워졌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연의 오묘한 질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농사일을 멈추고 오늘은 마당 정리에 나섰다. 풀을 뽑고 가지치기를 하고 어두운 구석에 몰아 쌓아둔 낙엽이나 잔가지를 옮겼다. 모기가 없으니 일이 얼마나 수월한지…. 그래도 땀은 비 오듯 쏟아진다. 뜨거워진 몸에 찬물을 끼얹고 냉수 한 잔 들이키면 세상은 온전히 내 것이다. 이렇게 마당 있는 집에서 그리고 농사를 지으며 평화로운 노년을 보낼 수 있는 것에 감사의 염이 울컥 솟아오른다.

    어른이란 무엇인가

    언제 사람은 어른이 될까? 우선 어른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보통 말하는 어른의 의미다. ‘성년이 되면 어른’이라는 말도 있다. 결혼을 해야, 아니 자식을 낳아보아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니다. 부모의 상을 치러보아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말도 있다. 분분한 말 속에, 자기 힘으로 집을 지어보아야 어른이 된다는 말까지 있다. 

    1993년 나는 사법부 정화를 촉구하는 글을 발표해 현행 헌법 시행 후 처음으로 법관재임명에서 탈락했다. 90년에 출간한 책 ‘일본 땅 일본 바람’에 나오는, 한국 사법부에 대한 부정적 묘사도 문제가 됐다. 사법부 일부에서 조치가 너무 심했다는 ‘반성적 배려’가 있었다. 이에 내가 법관으로 재임명된다는 말도 있었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깊어오자 뜻을 접었다. 아장아장 걷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1994년 한 겨울 삭풍을 맞으며 경주로 내려갔다. 기약 없는 걸음이었다.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고 다시는 경주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은 채, 무명의 존재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결심했다. 



    대법원장과 싸우다 쫓겨난 사람이라는 평판이 시골에도 퍼졌다. 변호사 사무실에 오기로 했던 직원이 겁이 나 못 오겠다고 하는 판이었다. 사건 의뢰가 올 리 없었다. 아이들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거리며 이 모든 일이 내 업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기적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렇지만 판사 경력이 저만치 된 사람이 사건 하나 수임하지 못한대서야, 그리고 저 사람이 그리 잘못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하며, 법원과 검찰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 열심히 일했다. 새벽부터 사무실에 나가서 서류를 작성했다. 차츰 “신 변호사는 법을 가장 잘 이용하는 사람이야!”라는 평판이 돌더니 사건이 밀려왔다. 

    경제 상황이 나아지며 가장 먼저 생각난 게 집짓기였다. 내 생을 다 쳐도 자식들은 그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였다. 거의 벌판이나 다름없는 곳에 800평 정도의 터를 마련했다. 200평은 집터로 나머지는 밭으로 만들었다. 또 다른 곳에 논을 구입했다. 

    본격적으로 집을 지을 준비를 갖추었다. 스케치북 두 권에다 그림과 글자로 빼곡히 집이 갖추어야 할 특성이나 세밀한 곳의 구성을 짰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내용들이 있다. (1) 실용성이 강해야 하고 (2) 집안의 어느 곳에서나 자연광이 충분히 비쳐야 하며 (3) 시멘트가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하고 (4) 또 집 어디에서건 편안한 느낌으로 앉을 수 있어야 한다는 등의 원칙이었다. 

    세부적으로는 다용도실에 빨래판 역할을 하는 냇돌을 놓는다는 것 등을 명시했다. 이것은 작은 양의 손빨래를 할 때나 김장을 할 때 아주 요긴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소상히 기록한 메모를 건축사에게 전해 설계를 했다.

    풀피리 소리 들려오는 듯

    신평 변호사가 집 근처에 조성한 밭. [신평 제공]

    신평 변호사가 집 근처에 조성한 밭. [신평 제공]

    상량식에서 대들보에다 ‘희정과 호승을 위하여 이곳에 터를 잡다’라는 문구를 붓으로 써넣었다. 이것은 바로 내가 집을 짓는 핵심이었다. 이 집에서 아이들이 자연의 손길을 느끼며 무사히 잘 자라나는 것이 아비인 나의 절절한 심정이었다. 

    매일 새벽마다 나와 집사람은 건축현장으로 갔다. 인부들이 나오기 전에 그들이 전날 공사를 하며 버린 담배꽁초나 자투리 건축자재 같은 쓰레기를 주웠다. 아이들에 대한 나의 간절한 선물인 이 집의 밑바닥에 그 쓰레기들이 무심코 깔린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었다. 

    벌써 집을 지은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집에 온 손님들은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집이 잘 정돈돼있고, 또 지금 시점에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집의 구조를 보며 놀라워하기도 한다. 

    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인들은 무작정 도시화로 쏠린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한다고 한다. 뉴욕 맨해튼의 집값이 대폭 하락했다. 뉴요커들은 집을 판 돈으로 교외의 마당 있는 집을 구매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코로나뿐만 아니라 어쩌면 앞으로의 세계는 ‘팬데믹의 일상화’로 이어질지 모른다. 반복되는 ‘락다운’(lock-down)과 ‘언택트’(untact) 생활을 극복하며 정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원을 가꿀 수 있고 반려동물과 함께할 수 있는 집의 중요성이 점점 부각될 것이다.
     
    집은 가격 상승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집 아닌가! 도시 중심부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마당 있는 집이라고 하여 경제적 가치가 정체돼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집을 보아서도 그렇다. 참다운 생활과 투자가치 양자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도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꽉 막힌 부동산정책에 하나의 대안이 되려나? 

    이렇게 변호사 생활을 하며 틈틈이 농사일을 하였다. 밭농사도 하였으나, 논농사가 훨씬 재미있다. 논일은 사실 모내기 전 논을 만드는 일이 힘들다. 일단 모내기를 해두면 물대기, 피 뽑기 같이 잔손만 가면 된다. 여름날 물이 졸졸 흐르는 논에서 피를 뽑고 있으면, 나비도 잠자리도 구경한다. 내 몸에 아무 거리낌 없이 앉는다. 지나가는 들쥐가 빠끔히 들여다본다. 거짓말 같은 환상의 장면이 언제나 전개된다. 저절로 무아지경에서 자연의, 우주의 위대한 질서에 포섭되는 황홀감에 빠져 들어간다. 

    변호사를 4~5년 하다가 대학에서 20년 간 교수생활을 했다. 학문 활동을 열심히 하며 대구로 이사 갔고, 서울에 오가는 일도 잦아졌다. 자연히 농사일과는 멀어졌다. 그러다가 정년을 조금 남겨둔 2018년 명예퇴직을 했다. 다시 경주로 돌아와 집을 돌보며 농사일을 하고 있다. 

    드문드문 변호사로서 사건을 맡기도 하나 시원찮다. 산업화, 민주화에 이어 공정성이 화두가 되리라 보고 ㈔공정세상연구소를 설립해 한 번씩 서울 나들이도 한다. 서울에 가있어도 내 마음은 언제나 내가 열심히 가꾸는 밭에 가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작물은 어떻게 되었는지, 꽃은 피었는지, 연은 줄기를 얼마나 더 뻗었는지 궁금해 죽는다. 멀리서 풀피리 소리가 하늘하늘 들려오는 것 같기만 하다. 앞으로 독자 여러분들에게 시골의 맑은 바람을 타고 풀피리 소리를 전해드리고 싶다.

    신평
    ● 1956년 출생
    ● 서울대 법학과 졸업
    ● 제23회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 제13기
    ● 인천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 대구지방법원 판사
    ●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헌법학회 회장 역임
    ● 저서: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 ‘들판에 누워’(시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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