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에 집 구경도 ‘선약 필수’
단독주택 중위가격 3.4% 상승
재택근무 확대로 텅 빈 샌프란시스코 오피스 단지
‘출근·등교 안 하니 쾌적한 외곽으로’ 합리적 선택
최저수준 대출금리(연 3% 이하)도 한몫
8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한 주택 앞에 ‘선약 필수(By Appointment Only)’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주춤했던 샌프란시스코베이 지역의 집값이 요즘 상승세다. 단독주택 시장이 아주 뜨겁기 때문이다. 현지 언론 ‘머큐리뉴스’가 부동산정보업체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올해 6월 이 지역에서 거래된 단독주택의 중위가격(median sale price)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4% 상승한 92만5000달러(11억 원)였다. 파는 사람이 시장을 주도하는 이른바 셀러즈 마켓(seller’s market)이 형성됐다.
매물 없는데 찾는 사람은 늘고
3월 중순 이후 샌프란시스코베이 지역에는 상당히 엄격한 통행제한 조치가 실시됐다.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가족이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됐다. 부모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자녀는 학교에 등교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넓고 여유롭고 쾌적한 집을 찾아 이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Palo Alto)에 살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는 필자의 친구도 요즘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방 3칸에 마당 없이 건물만 있는 타운홈(town home)에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친구는 재택근무 중이다. 사립학교에 재학하는 딸들도 모두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다. 친구의 아내는 집을 팔고 외곽에 있는 더 넓은 집을 사서 이사 가자고 한단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데 상황이 녹록지 않다고 한다. 왜일까.
“일단 물량이 모자랍니다. 집 사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팔려는 사람은 적어요.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집주인들이 코로나 걱정 탓에 사람을 집 안에 들이기 겁냅니다. 급한 경우가 아니면 집을 잘 내놓지도 않아요.”
실리콘밸리의 부동산중개업자 헬레나 최(한국명 최형란) 씨의 설명이다. 최씨는 통근이 어려워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던 외곽 지역 집의 인기가 높아졌다고 전했다.
외곽 지역은 실리콘밸리까지 통근이 어려운 대신에 새 주택이 많고 학군도 좋다.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는 거주지역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배정받아 다닐 수 있다. 반면 공립학교는 거주지역 기준으로 배정되는 이른바 ‘홈스쿨’ 입학이 원칙이다. 어린 자녀가 있는 학부모 대부분은 주택 구입 시 학군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베이 지역에서 주택가격은 올랐지만 매매 건수는 10% 이상 줄었다. 집을 매물로 내놓는 사람이 줄어 매매 건수 자체는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때문에 집주인이 외부인 방문을 꺼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주택에 대한 수요는 늘어 가격이 오른 것.
코로나19 사태로 샌프란시스코는 큰 피해를 보았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샌프란시스코의 대형 빌딩을 임차해 사무실로 썼다. 도시 생활을 선호하는 젊은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스타트업의 도시’로 불릴 만큼 기업과 인재가 몰려들던 샌프란시스코는 활기를 잃었다.
텅 빈 ‘스타트업의 도시’
7월 3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한 주택 앞에 ‘팔렸음(SOLD)’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다.
얼마 전 현지 방송채널 ‘ABC7’ 뉴스에는 샌프란시스코 소마(SOMA·시내 중심가 마켓스트리트 남부 지역)에 살다가 바다 건너 앨러미다 카운티(Alameda County)에 집을 산 한 신혼부부가 나왔다. 샌프란시스코보다 수십만 달러 싼 가격에 훨씬 넓고 좋은 주택을 살 수 있는 외곽으로 이사하기로 한 이들이다. 구글은 재택근무 조치를 내년 7월까지 연장했다. 재택근무 옵션을 허용하는 기업이 점차 늘고 있다.
넓고 쾌적한 집을 찾아 아예 도시를 탈출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따라 부동산 호황을 맞은 곳이 타호 호수(Lake Tahoe) 지역이다. 여름에는 바다처럼 넓은 호수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겨울이 되면 겨울스포츠를 즐기러 한 해 270만 명이 찾는 캘리포니아 북부의 대표적 휴양지다. 페이스북 공동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의 최고급 별장도 이곳에 있다.
타호 호수와 그 주변 도시는 샌프란시스코베이 지역에서 자동차로 무려 3시간~3시간 반 걸릴 만큼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이곳으로 이사 오는 사람이 늘면서 집값이 급등했다. 원래 주택 매물이 나와도 거래 성사까지 족히 3~4 개월은 걸리던 지역이었다. 요즘에는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 매물이 나오기 무섭게 팔린단다.
7월 29일 ‘CNBC’ 보도를 보면, 165만 달러(20억 원)에 나온 주택이 하루도 안 돼 200만 달러(24억 원)에 팔렸다고 한다. 67만 달러(8억 원)에 나온 집도 74만 달러(8억7000만 원)에 팔려나갔다.
금리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한몫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대출금리는 30년 고정금리 기준 연 3% 밑으로 떨어졌다. 2017년 여름, 필자는 실리콘밸리 중심부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새너제이에 집을 사기 위해 대출을 받았다. 같은 조건의 대출 금리는 연 3.75%였다. 당시로서는 좋은 조건이었다. 실제로 그 후 금리는 조금씩 올랐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를 낮추면서 30년 고정금리는 3% 아래로 떨어졌다. 최근 대출 알선 업체들은 이자율 낮은 새 대출 상품으로 갈아타라는 광고 우편을 이틀이 멀다 하고 보낸다.
필자가 지금 사는 새너제이 집에 이사 오며 잃은 것이 있다. 가장 큰 손실은 실리콘밸리 시내로의 접근성이 떨어진 것이다. 원래 살던 동네는 시내까지 길이 안 막히면 10분 만에 도착했다. 지금 사는 곳에서 운전 시간은 20~30분가량 늘었다.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에는 1시간 넘게 걸리기도 한다. 샌프란시스코와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출퇴근 시간에는 2시간 이상 걸리기 일쑤라 차 몰고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코로나19 백신·치료제로 일상 돌아갈 수 있을까
대신 넓은 공간을 얻었다. 방 2개 아파트에 살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마당이 생겼다. 책 읽고 글 쓸 수 있는 서재가 생겼다. 세 식구 모두에게는 각자의 방이 생겼다. 3000달러(350만 원) 수준의 월세를 더는 내지 않아도 된다. 다만 대출금을 갚고 각종 세금을 내느라 비슷한 비용을 치르고 있기는 하다.코로나19 사태로 집은 사무실 겸 학교가 됐다. 집 밖에 나갈 일이 좀체 없으니, 통근하기 편하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지역의 매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적어도 코로나19 바이러스 백신·치료제가 보급돼 감염 걱정을 떨치는 날까지 이런 추세는 이어질 것이다. 만약 백신과 치료제가 보급된다면? 그렇다고 감염 걱정이 없던 이전으로 100% 돌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