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까지 비판한 김정은, 인생 첫 좌절 겪는 중
김정일은 두려움에 시달린 불행한 지도자
백두혈통, 왕손(王孫)에는 남녀가 없다
6월 도발 의미는 ‘본때 보이기’
굴욕적 남북관계 바로잡는 게 ‘판갈이’
일관되게 밀고 나갈 ‘독트린’ 필요한 시점
[지호영 기자]
2013년 개성공단 정상화 협상 때 주목받았으나 지금껏 언론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다. 북한의 도발 위협으로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된 상태에 처했던 6월부터 최근까지 그를 세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현장을 오랫동안 경험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북한 내부를 읽는 법이나 향후 대북정책의 방향 등에 관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남북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시사점이 적지 않았다.
김 전 본부장은 서울대 외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 4월 통일부 남북회담사무국 회담운영과를 시작으로 통일부 정보분석국장, 개성공업지구 협력지원단장, 통일정책실장, 남북회담본부장을 거쳐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지내다가 2018년 8월 공직에서 물러났다. 외교부 대북정책과장으로도 일했다.
박지원·이인영 북한만 바라보고 임명
- 청문회가 마무리되면서 외교안보 라인이 새로 꾸려졌다. 이번 인사 총평은?“한마디로 북한만 바라보고 한 인사라고 본다. 우리 국민이 어떻게 바라볼까,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 누구일까 고려한 게 아니라 현 정부가 추진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우선 생각한 것 같다.”
- 박지원 국정원장 임명은 어떻게 보나.
“이미 사법적 판단이 내려졌지만 대북 송금을 할 만큼 막후에서 뛴 사람이다. 남북관계가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과거 경험에 기반을 두고 뭔가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 한마디로 북한과 관계를 만들어낼 사람이라고 판단해 앉힌 것 같다.”
- 그런 판단이 맞다고 보나.
“변화된 국제정세와 북한 상황, 남북관계를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은 김정일 시대가 아니라 김정은 시대다. ‘박지원 인맥’이 아직 북한에 있는지도 의문이고, 있다고 해도 작동할지 의문이다. 게다가 북한과의 선(線)이라는 것은 그들이 원할 때 가동되는 것이지 우리 쪽 개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다.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도 마찬가지다. 외교·안보정책 전체를 컨트롤하는 자리인데 남북관계가 그야말로 ‘전략적 황금기’에 있을 때, 즉 북한이 굴욕감을 갖고 우리를 대하던 시기에, 그것도 비공식적 채널로 북한과 협상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의 북한을 보는 데는 오히려 왜곡된 인식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번 인사 배경을 크게 뭐라고 보나.
“정권 임기가 사실상 1년 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절박함을 느끼는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많은 정책, 이를테면 종전선언, 군사적 긴장 완화, 신(新)한반도경제공동체, 남북기본협정, 이산가족문제 등 거의 대부분이 원점에 머물거나 오히려 더 나빠졌다. 계량적 지표를 보면 박근혜 정부 때보다 못하다. 남북대화만 해도 앞선 정부는 37회, 지금은 36회다. 이산가족 상봉도 앞선 정부는 두 번 했지만 이번 정부는 한 번밖에 성사시키지 못했다. 중국 등에서 이뤄지는 민간 차원의 이산가족 교류도 거의 제로 상태다. 이런 상황이라면 방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왜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지 성찰해야 한다.”
대북정책 수정은 ‘신앙’ 저버리는 것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손을 잡고 판문점 분단선을 넘어 남쪽으로 건너오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주변 상황을 보는 역사관이나 가치관이 앞선 정부들과 다른 것 같다. 분단의 원인, 광복 이후 형성된 남북관계를 보는 자신들만의 관(觀)이 있다.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적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할까. 노무현 정부 때 이루지 못한 미완의 숙제를 임기 내 해결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 같다. 따라서 궤도를 수정하는 것은 마치 신앙을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 정부 출범 초기 가장 자주 들은 말이 ‘우리 정부는 박근혜 정부와 다르다’ ‘국민의 촛불로 이룩한 정부’라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생각=촛불 정신’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 대북정책이 이념에 따라 이뤄진다는 건가.
“아직도 햇볕정책 프레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깊게는 1988년 7·7선언 이후 우리가 압도적으로 앞선 경제력으로 북한을 변화시켜 우리 민족의 힘으로 자주부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생각에서 멈춰 있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과거 우리 상황이 너무 좋았던 시절에 북한이 보여준 굴욕적 태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김정은 체제는 김정일 체제와는 완전히 다른데 아직도 그걸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2019년 10월 금강산 현지지도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 말이 있다. ‘선임자들이 국력이 여린 시절에 남의 도움을 받고자 잘못된 정책을 폈다’고 했다. 선임자란 누굴까? 바로 아버지 김정일이다. 당시 발언은 조선중앙TV를 통해 일제히 보도됐다. ‘금강산 사업=김정일 사업’이라는 걸 주민이 다 아는데 그 현장에서 대놓고 아버지를 비판한 것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가는 곳마다 ‘일을 이 따위로 했느냐’ ‘진취적 기상도 없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다’고 화를 내며 꾸짖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주민을 야단친 게 아니라 아버지를 비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정일은 두려움에 시달린 불행한 지도자
- 김정은이 김정일을 비판했다?“두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김정은은 살면서 좌절이란 걸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이에 비해 김정일은 매우 힘든 삶을 산, 어떤 면에선 불행한 지도자다.”
- 불행한 지도자라….
“김정일은 통치 기간 내내 체제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과거로 시간을 돌려보자.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지목된 뒤 인고의 세월을 거쳐 1980년 제6차 당대회를 계기로 실질적 통치를 시작했다. 그 시기 중국, 1985년에는 소련이 개혁개방을 추진한다. 안보 위협이 생겼고 경제 지원까지 끊겼다. 그러곤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공산권이 대거 참여한 88올림픽은 체제경쟁에서 북한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한 것이다. 올림픽 이듬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독일이 통일됐다. 이윽고 러시아와 중국이 한국과 수교했다.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고 국제질서가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아버지 김일성이 죽은 이듬해인 1995년 대수해가 나 2000만 인구의 상당수가 굶어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가 과연 미래에 대한 비전을 꿈꿀 수 있었을까. 동구처럼 무너지거나 독일처럼 흡수통일될지 모른다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두려움과 불안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김정일이 내세운 ‘선군(先軍)정치’는 불안감에서 비롯한 위기관리 체제다.
북한은 1980년대 후반 핵무기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핵을 가질 때까지는 미국과 한국 비위를 맞추는 게 필요했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 그것이다. 당시 북한은 우리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줬다. 김정일 입장에서 당시 제일 비굴한 일이 뭐였는지 아나?”
그가 이렇게 묻더니 말을 이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수용한 것이다. 정권 수립 이후 내걸어온 ‘조선은 하나다’라는 원칙을 버렸다. 한국은 미국 괴뢰정권이며 식민지이니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정통성 있는 조선반도 주인이라는 사고의 기본 축이 무너졌다. 한국의 유엔 가입에 소련이나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고육지책으로 자신들도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온 슬로건이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다. 당시 김정일의 내면은 굉장히 흔들리고 복잡했을 것이다.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김정일은 정말 어렵게 살다 간 비운의 지도자다.”
북한이 망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 북한 체제가 그런 시절을 겪고도 건재하니 어떻게 보면 성공한 것이다.“결과적으로 보면 그 성공에 한국도 일조했다. 시간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은 어차피 망할 것이고 우리 뜻대로 북한이 변화될 거라는 믿음 속에서 교류협력을 통한 변화, 접촉을 통한 변화가 먹힐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캐피털(자본)이 들어가면 캐피털리즘(자본주의)도 들어간다는 자신감 속에서 말이다. 물론 당시 국제 정세나 동구 공산권의 몰락을 보면 그런 가설이 무리는 아니었으나 조금은 편안하고 느긋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가 북한의 생존전략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 백두혈통 종손인 김정남의 삶은 김정은과는 다른 것 같다.
“김정남은 유학 시절 소련이 망하는 것을 목격했다. 충격이 정말로 컸을 것이다. 이후 귀국해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가 짊어질 현실은 주민들이 굶어 죽고, 한국과 경쟁에서 철저하게 패한,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 모두를 자신이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버거웠을까. 일본에 밀입국하다가 들켜버리는 바람에 결국 후계자에서 밀렸지만 생전에 김정남이 보여준 행동의 내면에는 그런 복잡함이 바닥에 깊게 깔려 있을 것이다.”
- 김정은은 어떤가.
“김정은은 달랐다. 2001년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당시 경제는 많이 회복된 상태였고 핵개발도 진전됐다.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멋지다고 여긴 사람이 할아버지 김일성이었을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권 리더의 모습, 국내적으로는 인민의 진심 어린 칭송을 받는 모습이 담긴 기록영화를 보면서 한국에 쩔쩔매며 공개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신년사조차 직접 발표하지 않고 은둔하던 아버지 김정일과 많이 비교됐을 것이다.
김정은은 중국이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국력이 커질 때 정권을 맡았다. 중국의 고도성장, 군사대국화를 지켜보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의 세(勢)는 약해지고 중국은 강해질 것이며 이런 정세는 자신에게 절대 불리하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핵을 가졌다. 한국보다 잘살지는 못해도 핵 한 방으로 끝낼 수 있으니 조선반도 주인은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최근 20년간 ‘굴욕적 북남관계’는 정상이 아니며 바꿔야 한다고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김정은이 집권 직후부터 말해온 ‘판갈이’의 의미다.”
김정은이 생각하는 ‘판갈이’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남북관계 발전이나 한반도 평화가 아니다. 그들 표현대로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가 판갈이의 본질이다. 김정은은 1990년대 이후 한국이 돈을 앞세워 만들어놓은 남북관계 틀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 그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중국을 등에 업고 핵무기를 앞세워 자신이 주도하는 판으로 한반도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돈으로 변화시킬 수 없어
김 전 본부장은 “김정은을 돈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했다.“우리나 미국이나 경제적 인센티브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김정은 입장에선 기분 나쁜 말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2019년 금강산 현지지도 때 ‘선임자가 국력이 여린 시절에 남의 도움을 받고자 잘못된 정책을 폈다’고 한 건 ‘아버지 때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돈다발 흔든다고 넘어갈 사람으로 보지 말라’는 공개 선언이나 다름없다.”
- 협상에서 좀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속셈 아닐까.
“김정은은 겉과 속이 달랐던 아버지와 달리 속내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핵개발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집권 후, 아니 어쩌면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큰 좌절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 언제부터인가.
“2017년 이후 경제가 급격히 나빠진 상황에서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회담이 깨진 이후부터다. 북한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과 두 번이나 회담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문재인 대통령도 만나는 광폭 행보를 보였지만 결과는 다시 원점으로 가 있는 상황이다. 핵·경제 병진노선 10년 통치가 올해로 딱 마지막 해인데 아무 결실이 없다. 굳이 성과라고 한다면 한미연합군사훈련 일부 중단, 비무장지대 GP 일부 철수, 대북 확성기 방송과 전단 차단 정도인데 다 일시적인 거다. 경제는 어떤가. 올해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마지막 해인데 성과를 보면 마이너스다. 주민들에게 쌀밥에 고깃국 먹게 해주겠다는 경제강국 약속과 세계 어디도 부럽지 않은 군사강국 약속에 비하면 초라하다. 더 큰 문제는 대안이 없다는 거다.”
김정은의 좌절
6월 16일 북한이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주도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노동신문]
“김정은의 좌절감이 표현된 게 지난해 12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채택한 두 가지 노선, ‘경제는 자력갱생, 대남·대미관계는 정면 돌파’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내용이 없는 말이다. 자력갱생은 과거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쓴 말이고, 정면 돌파도 선전 문구에 불과하다. 김정은은 지금 무력감 속에서 내부적으로는 인민 관리와 경제 살리기에 집중하고 미국과 남쪽의 상황 변화를 예의 주시하면서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 그런 상황에서 나온 6월 김여정의 도발은 어떻게 봐야 하나.
“사실 남북관계는 2018년 10월을 끝으로 거의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우리 정부에 대한 비난과 모욕적 언사가 점점 과격해지더니 이번에 행동으로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문 대통령 방북과 평양선언에 그 나름의 큰 기대를 했다. 하지만 이후 별 변화가 없는 거다. 6월 도발은 ‘말로는 안 되겠다,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여당 압승을 보면서 우리 측을 강하게 압박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고 본다. 시간적으로 이 정부도 올해 지나면 끝이고 미국 대선도 다가오고 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되니 이거 안 되겠다. 조폭들 표현을 쓰면 ‘너 좀 맞자’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 ‘여기 와서는 다해줄 것처럼 요사를 떨더니 돌아가 하는 행동을 보니 아무것도 없다’는 평양 옥류관 주방장 말이 생각난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를 개선할 의사도 없고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다’는 북한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해 1월 1일 ‘한미군사훈련 중단, 외부로부터 신무기 도입 중단, 지상·공중·해상을 비롯한 군사적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실천적 조치, 개성·금강산 협력사업 재개, 평화체제를 위한 다자협상’ 등을 명시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별 진전이 없으니 뭔가 작은 것이라도 구체적 행동으로 보이라고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김정은은 사실상 문 대통령이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기대를 접은 것 같다.”
그는 향후 가장 중요한 변수로 ‘미국 대선’을 꼽았다.
“대선 이후 다시 판을 짤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변수가 아닌 상수라는 게 문제다. 우리 정부의 입장이 명확한 데다 바뀔 가능성이 없으니 예측이 가능하고 다루기가 쉽다. 바꿔 말하면 우리로서는 정책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뜻도 된다.”
한다면 하는 사람들
- 6월의 경우 김여정이 도발에 나서고 김정은은 뒤로 빠져 있었다.“김정은이 나서지 않았다는 건 어떤 여지를 남겼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북한은 도발 와중에도 미묘하게 몇 가지 여지를 남겼다.”
- 그게 뭔가.
“첫째, 남쪽과의 연락 통신선을 끊는다면서도 국정원과 당 중앙위 간 통신선은 제외했다. 다 끊지는 않았다는 거다. 둘째, 총참모부가 도발 조치를 발표했을 때 당 중앙군사위의 추인을 받겠다고 했다. 군이 군사위 추인을 받겠다고 밝힌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 같은 내용을 공개한 것 자체가 이상했는데, 군사위가 곧 열릴 것이라는 예고와 함께 조치가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김정은이 군사행동 보류 메시지를 중앙군사위를 열지 않고 예비회의에서 내놓았다. 이 역시 전례가 없다. 기존에 없던 회의를 굳이 만들었다는 건 향후 군사위 결정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즉 도발을 잠시 멈춘 것일 뿐 최종 결정이 남아 있고, 언제든 재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북한의 메시지를 예민하게 읽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북한은 성명 등을 낼 때 시기, 발표 형식, 단어 선택 하나하나까지 매우 신중하게 고른다. 북한은 자신들이 내놓는 메시지를 우리 쪽이 굉장히 심도 있게 분석하고 읽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저 배고파서 하는 소리’ ‘하나 마나 한 소리’ ‘늘 하던 소리’로 치부하면서 섬세하게 들여다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남북관계가 황금기였던 시절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도 보인다.”
- 김정은 시대의 메시지 발신 방식이 과거와 달라진 게 있다면.
“성격이 급해 한꺼번에 다 쏟아내는 경향이 있다. 김정일 시대에는 모니터, 보도 시점, 남쪽 국민 반응을 봐가며 하나하나 내놓았다. 냉온탕이 있긴 했지만 진폭이 별로 안 컸고 예측도 가능했다. 지금은 동시다발 몰아치기식이다. 변화 속도와 폭도 매우 크다. 폭발적이지만 치밀함이나 정교함이 부족하다. 리더십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밑에 사람들이 매우 힘들 것이다.”
그는 “북한을 무서워할 필요도 없지만 우습게 봐서도 안 된다”고 했다.
“북한을 대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다. 도발에 대해 경계하는 자세는 필요하지만 과도한 공포심은 도움이 안 된다. 목함지뢰 사건 때는 탱크가 내려오고 전시상태까지 선포됐다. 하지만 며칠 만에 다 끝났다. 핵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핵을 가졌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비핵화 필요성을 냉정히 논의해야 하지만 공포감에 휩싸여 할 일까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북한의 오랜 강점이 선전·선동이다. 우리가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으면 선전·선동 효과가 없어진다. 그들로서는 가장 효율적 무기 하나를 잃는 게 된다.
그들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 어려운 시절에 핵 개발에 온 에너지를 집중해 마침내 성공시킨 사람들이다. 합리적 잣대가 통하지 않는다. 2009년 북한이 희천발전소를 3년 안에 다시 짓겠다고 했을 때 ‘불가능하다’ ‘금방 무너질 것’ 등 별별 얘기가 있었지만 현재 평양의 전기 부족을 상당 부분 해결하고 있다.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란 얘기다.”
백두혈통, 왕손(王孫)에는 남녀가 없다
- 과연 4대 세습까지 갈까.“현재로서는 예상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나의 관심은 그런 것보다 김정은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뭘 지향하는지에 있다. 나머지는 내게 단순한 흥미거리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거다. 길게 보면 미래는 보인다. 그사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 김여정으로의 세습 가능성은?
“김여정이 현재 대남관계를 실무적으로 이끌고 있다. 대외적으로 나서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북한이 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라고만 호칭하고 소속 부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경우 대체로 힘이 가장 막강한 조직인 조직지도부를 실질적으로 맡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일 시기에는 김정일이 직접 조직지도부 부장을 맡았다.
조직지도부장이 누구이든 김여정이 조직지도부를 관장하고 있다면 당에서의 실질적 힘은 김정은 다음이다. 이번 대남 담화에서 ‘위원장 동지와 당,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에 따라 일을 한다’고 했다. 대적사업부 전체회의를 주재했다는 걸 보면 2인자 위치가 거의 확고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은 일찍이 예상된 바다. 김여정은 ‘백두혈통’이다. 일각에서는 여자가 지도자가 되는 게 어렵다고 보지만, 백두혈통에는 남녀가 없다. 신성한 왕손인데 성별이 중요하겠는가.”
- 내부 쿠데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북한의 권력 집단은 현재의 시스템을 즐기고 있다. 김정일 시기에 약간 힘들었지만 핵을 가졌고, 인공위성도 쏜다. 평양 사람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심지어 ‘남조선보다 더 잘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겪은 북한, 북한 사람들
김 전 본부장은 그동안 만난 북한 측 회담 관계자 중 가장 인상적인 사람으로 ‘김영철(노동당 부위원장)’을 꼽았다.“1990년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 대표일 때 처음 만났다. 당시에는 소장(국군 준장에 해당)이었다. 이후 남북 장성급 회담, 남북 국방장관회담 때 영상으로 만났다. 2014년 10월 판문점 남북군사당국자 접촉 때 다시 대면했다. 24년 만의 재회였는데 문득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져 ‘24년 만에 봅니다. 세월이 참 무상합니다’라고 했더니 물끄러미 쳐다만 보더라.”
- 별명이 ‘독사’라고 하던데 실제 그런가.
“굉장히 스마트하고 군사 문제에 정통하다. 남북회담과 관련해 북한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과거 회담 역사는 물론 우리 쪽에서 했던 제안이나 언급을 훤하게 꿰고 있다. 모진 말투, 오만한 태도로 힘들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 합의서는 읽지도 않고 나왔나’라며 윽박지를 때도 있었다. 김영철은 김일성 시대부터 3대에 걸쳐 북한 내부에서 신뢰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든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하고 서명을 받아올 수 있었던 사람으로 알고 있다. 북한 같은 체제에서 3대에 걸쳐 살아남았으니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대남 협상이나 방남한 주요 인사들의 삶이 여러모로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게 무슨 말인가.
“북한 대표들은 우리 언론에서 ‘온화하다’ ‘합리적이다’ ‘남쪽을 이해하는 사람’ 같은 긍정적 평가가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독사’처럼 부정적 평가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협상이 끝나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비판받을 수밖에 없고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대남 협상가들은 북에서 볼 때 적과 만난 사람들이다. 남측에 포섭됐다고 여겨질 수도 있고 발전상을 보고 변심했다고 의심받을 수도 있다. 요주의 인물이 돼 보위성이나 당 지도부로부터 감시받기 일쑤다. 그렇다 보니 ‘집에 달러를 숨겨놓았다’ ‘자식들이 어땠다’ 식으로 꼬투리가 잡힐 수도 있다. 그런데 서울에 와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내가 다음에 서울 가는 순서’라면서 들떠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협상 대표는 배우… 감독 역량이 중요
- 북한이라는 협상 상대는 어떤 특징이 있나.“첫째, 공개·비공개 접촉에서 입장차가 별로 없다. 따로 조용히 만나도 견해가 똑같다. 둘째, 우리 쪽도 청와대가 회담 영상을 보면서 지시를 내리지만 평양은 회담 중에도 일일이 지시가 내려온다. 나는 회담장에서 쪽지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데 북측 대표단에는 수시로 쪽지가 들어온다. 셋째, 남북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협상 대표들은 서울과 평양 수뇌부를 향해 말하는 거다. 결정은 양쪽 최고 지도부가 한다. 그런 점에서 협상 대표는 무대에 선 배우 같은 존재다. 감독이 있고, 관중도 있다. 배우 역량에 따라 무대가 화려해질 수도, 망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감독의 생각, 능력이 중요하다.”
- 남북대화나 협상에서 기술 같은 게 있나.
“우리 쪽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상대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타협의 여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 합의문 다음으로 회담이 잘됐는지 그렇지 않은지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회담장에서 어느 쪽이 제기한 문제가 의제가 되는지 하는 점이다. 축구에서 골 점유율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무리 반박을 잘했다고 해도 북측이 제시한 NLL(북방한계선)이나 국가보안법 문제 위주로 대화가 이뤄졌다면 그쪽이 깔아놓은 판에서 논 게 된다. 북측이 원하는 대남 여론전에 이용당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달리 우리는 회담 내용을 국민에게 알려야 하는 개방 체제라는 점도 늘 감안해야 한다. 회담이 열리기도 전에 언론에 우리 측 입장이나 전략 등이 보도된다. 협상 전략에서만 보면 매우 불리한 요소다. 협상이 끝나면 합의서가 나오는데 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 장관이나 대통령이 전문가는 아니다. 우리 측 감독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우리 쪽 전략이 충분히 반영돼 있으며 북측이 수용할 수 있는 문구를 만들어내는 게 협상팀의 역량이다. 기술적인 측면만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 대북협상가로서 제일 중요한 자질을 꼽는다면.
“남북관계 역사나 기본 전략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필수다. 각종 어젠다에 대한 정리가 잘돼 있어 서너 수 앞까지 내다보면서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갖춰야 한다. 또 타고나는 부분이긴 한데 상대가 치고 들어올 때 바로 대응하는 창의성과 순발력도 중요하다. 우리는 순환 보직이 제일 문제다. 북한을 오래 접촉한 사람이 별로 없다 보니 현장에서 말로 당한 후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 그런 점에서 북한 사람들은 똑똑한 협상가인가.
“평생 직업이 협상가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동안 남북대화 역사나 내용을 달달 외울 정도다. 어떤 땐 내가 모르는 우리 쪽 뉴스를 저쪽이 훨씬 많이 알 때도 있었다. 과거 남북고위급 회담 때 우리 측 대표가 인권 문제를 꺼낸 적이 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북측 대표가 분홍색 보자기로 싼 보따리 두 개를 책상 위에 턱 놓더니 ‘이거 풀어놓고 남쪽 인권 문제를 밤새면서 이야기해 보자는 겁니까’라고 하더라. 이미 준비하고 왔던 거다. 북쪽 사람들이 방향이 틀려서 그렇지 열심히 일하는 건 인정해 줄 부분이 있다.”
벼랑 끝까지 간 목함지뢰 협상
- 특히 기억에 남는 협상이 있다면.“개성공단 정상화 협상이 떠오른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북한이 개성공단 남북 간 통행을 차단한 상황이었다. 한미군사훈련이 핑계였다. 나는 3차 회담 때부터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7차 회담까지 이어진 끝에 정상화에 합의했다. 국내 여론은 개성공단을 아예 없애자고 할 정도로 좋지 않았고 북측 양보안을 이끌어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협상 첫날, 북쪽 사람들과 악수할 때 그 사람들 손에 땀이 흥건해 ‘아, 내가 마음놓고 떠들어도 판이 깨지지 않겠구나’ 하는 직감이 왔다. 김정은이 개성공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리라고 지시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결국 북한이 우리 기업들에 1년간 세금을 면제(보상 책임)해 주고, 관리 권한을 남북이 공동으로 행사하는 식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 2015년 목함지뢰 사건 때는 3박 4일 동안 한숨도 못 잤다고 들었다.
“GP에서 순찰을 돌던 우리군 하사들이 목함지뢰를 밟아 다치는 일이 발생한 것은 다 기억할 것이다. 조사 결과 북측이 지뢰를 묻고 간 것으로 판명이 났다. 우리는 응징 차원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전개했고 이에 북한이 비무장지대 안에 포 3발을 쏘았다. 여기에 맞서 우리 측이 155㎜ 포 29발을 쐈더니 김정은은 준(準)전시상태를 선포했다. 탱크가 이동하고 서해안 포문이 열렸다. 미사일 발사 준비 움직임까지 보이는 등 군사적으로는 거의 전쟁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 어떻게 회담이 이뤄졌나.
“김양건 당시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갑자기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을 만나자고 전화통지문을 보내왔다. 우리 측에서는 ‘북한 통전부장이 우리 안보실장을 만나는 건 형식과 격이 맞지 않는다. 만나고 싶으면 통일장관을 만나라’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북한은 다시 ‘총정치국장 황병서가 김양건과 같이 나갈 테니 만나자’고 수정 제의를 해왔다. 일단 북한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차원에서 김관진 실장과 홍용표 통일장관이 판문점 회담에 나갔다.”
- 분위기는 어땠나.
“북측의 주장은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모른다면서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거였다. 예상한 대로였다. 김관진 실장이 ‘내가 전군을 지휘했던 사람’이라며 어설픈 수작 부리지 말라는 뜻으로 이야기하자 조용해졌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의 공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내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협상 목표가 분명했다. 3박 4일 동안 밀고 당기는 협상이 이어졌다.
나는 남북회담본부장으로 회담 소프트웨어는 물론 하드웨어까지 모두 챙겨야 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잠을 잘 수도 없었지만 오지도 않았다. 길다고 하면 긴 ‘밀당’ 결과 절충안이 만들어졌다. 북한의 유감 표명이 담겼고 우리의 재발방지 약속 요구와 북한의 확성기 방송 중단이 하나로 묶였다. 북한도 만족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북한이 장거리미사일을 쏘면서 확성기 방송이 재개된다.”
남측 진보인사들을 ‘회색분자’라고 여겨
2019년 6월 30일 남·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동아DB]
“우리가 북한보다 여러 면에서 압도적 우위에 서 있던 1990년대에는 안보위협이 적었다. 북한의 공격을 걱정한 게 아니라 ‘언제 망하나’를 생각했다. 그러다 김정은이 핵을 가지면서 남북관계가 급격히 널뛰는 상황이 됐다. 천안함(폭침), 연평도(포격)를 비롯해 도발이 계속된다. 우리가 프레임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도발의 강약만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남북대화 자체에 환호하지만 대화는 문제를 푸는 방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서로가 문제를 풀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합의를 지키겠다는 이행 의사가 있어야 대화가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니하는 것만 못한 경우도 많다.”
그는 대표적인 예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꼽았다.
“쌍방이 속내가 다른데 겉으로 모양만 맞춘 경우다. 결국 속내가 다르다는 걸 쌍방이 알게 돼 불신만 키웠다. 남북관계, 북·미관계의 눈높이가 정상회담에 맞춰져 앞으로도 정상이 만나야 일이 풀리는 상황이 됐다. 향후 한반도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접근을 하는 데 큰 제한 요소가 될 것이다. 김정은이 한 합의를 북한의 누가 비틀거나 수정할 수 있겠나.”
- 우리는 정권에 따라 대북정책 방향이 너무 달라 문제 아닌가.
“북한 입장에선 보수나 진보나 별 차이가 없다.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 시기 중 남북대화와 아산가족 상봉이 언제 제일 많았을까.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때는 이산가족 상봉을 각각 두 차례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한 번뿐이다. 남북 대화도 별로 다르지 않다.
북한 기준에선 한국 정부가 진보냐 보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요구를 얼마나 수용하는지가 중요하다. 자신들이 원하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내세우는 이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략·전술 차원에서 필요한 상황이 되면 대화하고 만나고, 또 필요하면 도발하는 것이다.
오히려 북한은 한국에서 진보로 통하는 인사들을 ‘회색분자’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북한 인사들 중 우리 쪽 진보단체 인사들과 만난 것을 기분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제대로 된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도 아니면서, 겉으로만 자기들을 엄청 이해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 앞으로의 남북관계는 어떻게 보나.
“김정은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한반도에 평화는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한다. 급반전? 기대가 별로 안 된다. 적어도 올해 말부터 다음 정부까지는 위협과 압박을 계속할 것이다.”
그는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주목하면서 최근 30년의 남북관계를 다시 원점에서 생각하는 새로운 독트린이 필요한 시점”이라면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현재 알다시피 미국의 가장 큰 적은 중국이다. 미·중 대결은 총만 안 들었을 뿐 전쟁 수준이다. 우리 입장에선 공산당이 이끄는 중국과 가치를 공유할 수는 없다. 조정자나 중재자가 되겠다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조정이나 중재는 강자가 하는 것이다. 힘이 있어서 북한, 미국, 중국에 뭔가 줄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결국 매우 지혜롭게 행동하면서 교집합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가 과연 그럴 능력이 있는지 우려스러운 측면이 많다. 미국과 중국은 매우 냉정하다. 우리를 이미 박쥐로 보고 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를 겪으면서 누르면 굽힌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안보는 흥정 대상이 아니라는 자세를 명확히 견지하지 못해 극복하기 어려운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한반도의 주인은 우리라는 의식이 필요하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한 나라가 주변 강대국들을 혼자 상대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강한 나라를 등에 업어야 한다. 냉혹한 국제질서에 낭만은 없다. 적어도 20년, 30년 앞을 내다보는 외교·안보 비전이 절실하다. 일관되게 밀고 나갈 독트린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