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대왕신종, 외형만큼 아름다운 소리
애끓는 주파수로 듣는 사람 사로잡아
종 보존 문제로 타종 두고 갑론을박 오가
2004년 이후로는 들을 수 없게 된 종소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인 성덕대왕신종. [동아DB]
향기(響氣)로운 한국의 종
예부터 절에서는 새벽과 저녁에 시간을 알려주거나 불교 행사 등을 알리기 위해 종을 쳤다. 불가에서는 종소리를 부처의 진리에 비유한다. 세인의 혼탁한 영혼을 맑게 깨쳐주는 소리,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부처의 설법 소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지옥의 중생도 사찰의 종소리를 들으면 모두 깨어나 극락으로 간다”는 말까지 있다.매년 12월 31일 자정, 그러니까 새해가 시작되는 1월 1일 0시. 서울 한복판 보신각(普信閣)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선 제야(除夜)의 타종 행사가 열린다. 매서운 추위에도 수많은 사람이 모여 33번의 종소리를 들으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의 희망을 노래한다. 종소리는 이렇게 매력적이고 심오하다.
우리의 종은 서양의 종과 모양도 다르고 특징도 다르다. 우리 종은 몸통 선이 부드럽게 내려오다 아랫부분이 약간 안쪽으로 오므라져 있다. 그 선은 중국이나 일본의 종보다도 훨씬 더 부드럽다. 한국 종은 커다란 나무 막대(당목·撞木)로 종의 바깥쪽을 쳐서 소리를 낸다. 땅에서 그리 높지 않은 곳에 걸어놓기 때문에 종소리가 아래쪽으로 쫙 깔리면서 굵직하고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서양의 종은 컵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것처럼 위쪽이 좁고 아래쪽이 벌어져 있다. 우리가 나무막대로 종을 치는 것과 달리 서양의 종은 종속에 달아놓은 추를 이용해 종의 안쪽을 두드려 종을 친다. 방울을 흔드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높은 곳에 매달아놓기 때문에 종소리는 강하면서도 가는 편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통일신라 771년)이 있다. 우리에게 에밀레종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종이다. 통일신라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위업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혜공왕 때인 771년에 이르러 제작을 마무리했다. 높이 3.66m, 아래쪽의 입구 지름 2.23m, 무게 18.9t. 처음엔 경주 봉덕사에 봉안했지만 이후 경주 영묘사, 경주 봉황대 앞, 경주 동부동 옛 경주박물관(당시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을 거쳐 지금은 경주 인왕동의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돼 있다.
외모부터 출중한 성덕대왕신종
종 꼭대기 연결 부분인 성덕대왕신종의 용뉴, 몸체에 장식된 비천상, 종 말미의 장식 부분(위부터). [동아DB]
종 몸체 표면의 맨 위와 아래에는 띠를 둘러가며 모란넝쿨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고품격의 디자인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종은 모두 맨 아래 입구가 일자로 돼 있는데 성덕대왕신종은 종 입구에 8개의 굴곡을 만들어놓았다. 이 같은 굴곡은 종 입구에 변화를 주어 세련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다른 종들과 구별되는 성덕대왕신종만의 특징이자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몸체 표면에는 서로 마주 보는 공양비천상(供養天人像) 두 쌍이 표현돼 있다. 천인들의 모습을 간략하면서도 우아하고 생동감 넘치게 표현했다. 그 모습이 매력적이어서 종 앞에 다가가면 자꾸만 손을 뻗어 직접 만지고 싶어진다.
종 꼭대기의 용뉴(龍鈕)는 또 어떠한가. 용뉴는 종을 매달기 위해 만든 용 모양의 고리를 말한다. 직접 육안으로 명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이 용뉴의 용은 그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다. 그 용 모습을 보고 나면 오랫동안 머리에 남는다.
성덕대왕신종은 주조(鑄造) 방식으로 제작됐다. 이 거대한 범종을 주조로 만든 것을 두고, 지금의 과학자들도 고개를 내젓는다. 고난도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주조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8세기 신라 과학기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호소력 넘치는 주파수의 종소리
성덕대왕신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은 종소리다. 깊고 그윽하며 여운이 긴 종소리를 두고 “최고의 종소리” “신비의 종소리”라는 찬사가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덕대왕신종 종소리의 신비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그동안 여러 음향공학자가 그 비밀에 도전해 왔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볼 때, 비밀의 핵심은 다름 아닌 맥놀이 현상의 극대화에 있는 것 같다. 맥놀이는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맥놀이가 길게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종소리는 여운이 오래가고 그로 인해 더욱 그윽해진다.
그럼, 맥놀이 현상은 어떻게 구현되는 것인가. 8세기 신라 장인들은 종소리의 맥놀이를 어떻게 극대화할 수 있었는가. 다시 말하면 성덕대왕신종에서 맥놀이가 어떻게 발생하고 지속되는지 규명하는 것이 종소리의 신비를 밝혀내는 관건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를 규명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음향공학자들은 성덕대왕신종 몸체의 비대칭에 주목한다. 성덕대왕신종의 몸체 안쪽을 보면, 안팎의 표면 두께가 일정하지 않고 다소 불규칙하다. 안쪽에 부분적으로 덧댄 꺼칠꺼칠한 쇳덩어리, 바깥쪽 윗부분의 연뢰 36개가 몸체 두께의 비대칭 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무늬, 두께, 무게의 비대칭에 힘입어 한 부위의 종소리가 다른 부위의 종소리와 교란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맥놀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종소리를 분석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성덕대왕신종 종소리는 800Hz까지의 주파수 영역에 고르게 분포한다고 한다. 이 영역의 종소리는 타종 이후 10초 정도가 지나면 저주파 성분이 주로 남아 더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이다. 주파수 영역에서 주요 성분은 64Hz, 168Hz, 360Hz, 477Hz라는 분석도 있다. 64Hz는 저음으로 땅을 타고 전파되며, 168Hz와 360Hz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소리나 애끓는 소리의 특성을 지닌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 주파수 성분이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대략 3초마다 맥놀이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음향공학자들의 치열한 탐구는 흥미롭고 고마운 일이다. 그럼에도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를 온전하게 주파수로 계량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계량화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심금을 울리는 소리나 애끓는 소리의 특징 성분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소리나 애끓는 소리의 주파수 영역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알쏭달쏭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운 얘기다. 그 자체가 성덕대왕신종 종소리의 신비이자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칠수록 나빠지는 종의 건강 상태
성덕대왕신종의 신비로운 종소리를 지금은 직접 들을 수 없다. 2004년부터 타종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타종할 경우, 종에 충격을 주어 자칫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른 것이다. 771년 제작된 성덕대왕신종은 13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다 보니 점점 약해지고 있다. 그러니 타종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강원도 평창 오대산의 국보 36호 상원사종 역시 오랜 타종으로 균열이 생겨 타종을 중단한 상태다.성덕대왕신종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타종에 대한 고민은 1970년대 시작됐다. 성덕대왕신종은 원래 봉덕사에 봉안됐다. 그러다 1460년 영묘사로 옮겼고, 1506년 봉황대 앞으로 옮겼다. 이어 1915년 동부동의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훗날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됐다. 그리고 1975년 5월 당시 신축한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타종으로 인한 종의 훼손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바로 1975년부터였다. 실제로 1975년 5월 지금의 위치로 성덕대왕신종을 옮기고 난 뒤 타종이 부쩍 줄어들었다. 그해부터 제야의 타종만 남겨두고 일반 타종을 중단한 것이다.
동부동 옛 국립경주박물관 시절에는 제야의 타종뿐만 아니라 수시로 타종을 했다. 외국에서 국빈이 방문하면 특별 타종을 했고 단체관람객에게 직접 타종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동부동 옛 경주박물관 시절, 그러니까 1915년부터 1975년 5월까지 60년 동안 11만여 차례 타종했다고 한다. 한 달에 152차례 타종한 셈이다.
이를 보면, 동부동 박물관 시절까지는 타종에 대해 특별한 고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1975년 5월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종을 옮긴 후부터 타종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종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쉽겠지만, 어찌 보면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생긴 고민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1975년 5월 이후 성덕대왕신종 타종은 매년 12월 31일 제야의 타종만 실시했다. 타종 횟수가 확 줄어든 것이다. 그러던 중 성덕대왕신종 종소리를 듣고 싶다는 민간의 요청이 늘어나자 1984년 한때 매일 새벽 일출 시간에 3번 타종하는 일도 있었다.
성덕대왕신종의 소리가 끝나는 날
1996년 9월 13일 종합안전진단을 위해 에밀레종을 타종하는 전문가들. [동아DB]
“종은 종소리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외관상의 미학적인 가치도 중요하다. 타종은 분명 종에 균열을 가져온다. 지금 괜찮다고 해서 종을 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금이 가고 나서야 타종을 중단하겠다는 말인가.” 타종 반대론자들의 이야기다.
한편 타종 찬성론자들은 “종은 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종은 소리가 날 때 존재 의미가 있다. 성덕대왕신종 존재의 본질은 종소리이기 때문에 종을 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을 정기적으로 타종하면 오히려 생명이 오래갈 수 있다”는 의견을 편다.
1993년부터 타종이 완전히 중단되자 이 문제가 예전보다 더 뜨거운 관심거리로 부상했다. “종은 쳐야 종이다”라는 의견과 “종을 계속 치면 종이 훼손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경주박물관은 종의 안전 상태를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종합학술조사를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1996년 9월, 비공식적으로 47차례 타종했다. 이때의 타종은 연구 분석을 위한 음향 녹음이 주목적이었다.
조사 결과, 주조 당시 형성된 기포 문제와 약간의 부식 현상을 제외하곤 별다른 결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타종이 불가능할 정도의 결함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1999년 11월 국립경주박물관과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2000년부터 매년 10월에 타종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타종 시기는 종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외부 기온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10월 초로 잡았다. 단, 성덕대왕신종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즉각 타종을 중단한다는 단서 조항이 붙었다.
그런데 타종 재개일을 한 달 앞둔 2000년 9월 타종이 취소됐다. 하지만 1년 뒤인 2001년 9월 타종을 재개하기로 결정했고, 한 달 뒤인 2001년 10월 타종했다. 타종을 중단한 지 9년 만의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1년 10월 9일, 2002년 10월 3일, 2003년 10월 3일 타종하게 됐다. 그렇게 3년 동안 진행되다 2004년 타종을 앞두고 다시 중단됐다.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타종하면서 표면의 균열 및 진동 음향 등에 관한 자료를 확보해 놓았고, 타종 과정에서 큰 문제점이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계속 타종할 경우 금속의 피로도가 증가할 수 있어 올해부터 타종 행사를 중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타종 여부에 관한 고민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1993년부터 2004년까지 10여 년간 타종을 둘러싼 논의는 이렇게 치열했다. 타종을 놓고 매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이 문제는 성덕대왕신종의 존재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에 따라 그 판단이 달라진다. 성덕대왕신종 타종이 워낙 민감하고 중요한 사안이기에 종의 보존을 위해 고민하고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제 종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운 에밀레종의 라이브 무대
1975년 5월 27일. 성덕대왕신종이 옛 경주박물관에서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사를 갔다. 옛 박물관 담장을 헐고 성덕대왕신종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경주시민은 모두 한마음이 돼 동부동에서 인왕동까지 길가에 줄지어 모였다. 그들은 긴 행렬을 이루며 성덕대왕신종의 이사를 지켜보았다. 일부는 종의 뒤를 줄곧 따라갔다. 이사 가는 길, 그들은 깊고 그윽한 종소리를 떠올렸을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이미 경주 사람들과 한 몸, 한마음이었다. 어디 경주 사람들만 그럴까. 성덕대왕신종의 깊고 그윽한 종소리는 모든 이의 가슴속에 신비롭게 자리 잡았다. 그것은 세대를 뛰어넘어 유전한다. 그런데도 실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없다니. 특히 젊은 세대는 성덕대왕신종의 실제 종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많은 이가 비싼 돈을 들여 루브르박물관에 간다. 대부분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간다. 고해상도의 모나리자 이미지와 영상이 넘쳐나는데도 사람들은 루브르에 간다. 왜 그러는 걸까. 단 하나, 실물을 보기 위해서다. 성덕대왕신종이 명작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은 빼어난 조형미와 과학적 주조기술 때문만이 아니다. 그윽하고 신비로운 종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성덕대왕신종의 조형미는 빼어나지만 어느 정도 탐구하면 대강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종소리는 끝이 없다. 탐구하면 할수록 더 미궁 같은 신비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보다 더한 매력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더더욱 실제 종소리가 듣고 싶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