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공연한 창작 뮤지컬의 레전드
동호회 자발적 모금…뮤지컬 팬덤 문화 시초
일본어 오역으로 주인공 ‘베르터’는 ‘베르테르’가 되고…
‘독서혁명’의 대변혁을 준 18세기 괴테 원작
[CJ ENM 제공]
마침 법조인 출신 작가 괴테가 쓴 유려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창작한 뮤지컬이 개막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베르테르’다.
7주 만에 탄생한 베르테르
요한 볼프강 괴테(1749~1832)는 독일 문학의 기틀을 세운 작가로 기억하지만 그는 스트라스부르크대 법대를 졸업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로 활동한 법조인이었다. 법대 입학 전부터 틈틈이 시를 쓰고 희곡을 습작했다. 베슬라 고등법원에서 근무하던 괴테는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샤로테’라는 법관의 딸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그녀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잔인한 짝사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절망한 그는 두 사람에게 편지를 남기고 홀연히 고향으로 도망쳤다. 그로부터 2년 뒤, 고요하게 살던 괴테는 유부녀와의 사랑으로 낙심해 권총으로 자살한 지인의 소식을 접한다. 충격을 받은 괴테는 이 사건과 몇 년 전 자신이 겪은 짝사랑의 절절한 경험을 소설에 담았다. 불타는 짝사랑 감정이 샘솟았는지 가속도가 붙어 7주 만에 집필을 끝냈다. 때는 1774년,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소설이 출간되자마자 유럽이 들썩였다. 책은 날개 돋친 듯 수십만 부가 팔렸다.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로 서점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책을 읽으려고 글자를 익히는 사람이 늘었다. 그만큼 문맹률도 낮아졌다. 그래서 이 소설의 탄생은 ‘독서혁명’이라고 불린다. 반면 수많은 젊은이가 소설 속 베르테르가 입은 노란 조끼와 푸른 연미복 차림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부작용도 속출했다. 본의 아니게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그래서 ‘모방 자살’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한다.아이러니하게도 83세까지 장수한 괴테는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린 ‘전적’이 있다. 74세 노년에도 사랑에 대한 정열은 식지 않아 19세 소녀에게 구애할 정도였다. 괴테가 품는 사랑의 열정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순수성은 가히 의심이 간다. 젊은 날 괴테의 사랑이 연상되는 소설 속 베르테르의 사랑이 퇴색되는 순간이다.
흔히 청소년을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라 칭한다. 문학의 질풍노도는 좀 다르다. 괴테가 태어날 당시는 합리적인 이성을 앞세운 계몽주의가 대세였다. 젊은 지식인들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계몽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그들은 기교에서 벗어난 가슴 뛰는 격정의 해방을 꿈꿨다. 독일 문학청년들은 이를 기반으로 질풍노도 문학운동을 탄생시켰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독일 낭만주의의 여명을 열었다. ‘선봉장’ 괴테는 기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편지 소설이라는 서간체 장르를 개척해 메마른 유럽인의 감성을 적셨다. 소설의 대부분은 주인공 베르테르가 친구인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가 차지한다. 소설 초·중반에는 날짜별로 열거된 편지뿐이고, 후반부에선 빌헬름이 받은 편지와 지인들에게 얻은 정보를 엮어 사건을 재구성해 다시 서술한다. 빌헬름의 존재는 괴테의 결정적인 ‘신의 한 수’다. 독자들은 빌헬름을 편집자로 인식하기 때문에 소설은 단번에 현실에서 충분하게 일어날 이야기로 느껴진다.
고전에 한국적 트렌드 가미한 뮤지컬
젊은 변호사 베르테르는 업무차 어느 마을에 온다. 그는 샤로테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반하지만 그녀에겐 약혼자가 있다. 아무리 맘을 다잡아도 베르테르는 도저히 사랑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공사관 비서를 자원해 그녀 곁을 떠난다. 공사에 반기를 들고 파면당한 베르테르는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샤로테를 찾아온다. 그녀가 위안도 되지만, 결혼생활에 행복해하는 샤로테를 바라보는 베르테르는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한계에 부딪혀 고뇌하다가 결국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탕탕탕!타인과 소통하려 쓰는 편지이건만 베르테르는 일기처럼 일방적으로 자신의 속마음만 토로한다. 소설은 편지뿐이어서 지겨울 만도 하지만 독자는 베르테르의 애달픈 감정에 푹 빠져 책장을 넘긴다. 이는 대문호 괴테가 단순히 아름다운 사랑만을 토로하지 않고 소소한 미사여구에 집중하지 않는 연유다. 그래서 소설은 술술 잘 읽힌다. 나폴레옹은 전쟁터에서도 읽을 정도로 베르테르에 심취했고 청년들이 자살로 사망한 베르테르를 추앙했다. 자살을 금기시하는 교황청에서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할 정도였다. 고(故) 신격호 롯데 회장도 여주인공 샤로테의 애칭인 ‘로테’에서 기업 이름 롯데를 따왔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200년 넘게 연극, 오페라, 영화, 뮤지컬로 재창작되고 있는 공연 레퍼토리다. 탄탄한 서사구조, 시적 표현, 완성도를 모두 갖춘 괴테의 진의를 왜곡하지 않는 것도 큰 숙제다. 아무리 콘텐츠가 좋아도 미학적으로 스토리텔링을 잘 풀어내지 못하면 빛 좋은 개살구다.
올해로 20년째 묵묵히 공연되는 뮤지컬 ‘베르테르’는 고전의 품격에 한국적 트렌드를 가미한 감성 음악과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마니아들을 매료했다. 현재까지 30만 명 이상의 관객이 관람했고, 작품성과 흥행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대한민국 대표 창작 뮤지컬로 자리 잡았다. 동호회에서 자발적 모금 활동을 펼 정도로 한국 뮤지컬 팬덤 문화의 시초가 됐다.
‘베르테르’는 각 인물의 미묘한 심리를 잘 표현한 현악기 중심의 실내악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정적인 선율이 인상적이다. 그래서 뮤지컬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특히 초연 20주년 기념작인 올해 무대는 유약해 보이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는 ‘베르테르’의 복잡한 내면을 유려한 음악으로 선사한다. 뮤지컬 ‘베르테르’는 학창 시절 필독서 소설이 주던 순수하고 정열적인 사랑의 추억을 다시금 만끽하게 한다. 8월 28일부터 11월 1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다.
한편 뮤지컬 ‘베르테르’는 2013년 도쿄 아카사카 ACT 시어터에서 공연되며 글로벌 콘텐츠로서도 그 역량을 확인했다. 사실 주인공 베르테르의 독일식 이름은 ‘베르터’다. 일본은 1893년 아시아에서는 가장 빨리 괴테의 소설을 번역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번역본 출판을 시작했다. 다만 독일어 원본이 아닌 일역본을 참조하다 보니 독일식 원어보다 일본식 발음인 ‘베르테르’로 굳어졌다. 독일어 제목인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에서 ‘라이덴(Leiden)’은 우리말로 ‘슬픔’보다는 ‘고뇌’ 혹은 ‘고통’이 더 적당하지만 이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알려진 제목을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할 거 같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문화와 사회’(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