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까지 비판한 김정은, 인생 첫 좌절 겪는 중
박지원·이인영 북한만 바라보고 임명
남북대화·이산가족상봉 횟수 앞선 정권보다 적어
대북정책 수정은 ‘신앙’ 저버리는 것
김정일은 두려움에 시달린 불행한 지도자
굴욕적 남북관계 바로잡는 게 ‘판갈이’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함께 손을 잡고 판문점 분단선을 넘어 남쪽으로 건너오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2013년 개성공단 정상화 협상 때 주목 받았으나 지금껏 언론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다. 북한의 도발 위협으로 남북이 긴장 상태에 처했던 6월부터 최근까지 그를 세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현장을 오랫동안 경험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북한의 내부를 읽는 법이나 향후 대북정책의 방향 등에 관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남북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시사점이 적지 않아 그와의 대화를 8월 4일, 6일, 8일 세 차례로 나눠 싣는다. 이 기사는 그 첫 번째다.
김 전 본부장은 서울대 외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 4월 통일부 남북회담사무국 회담운영과를 시작으로 통일부 정보분석국장, 개성공업지구 협력지원단장, 통일정책실장, 남북회담본부장을 거쳐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지내다가 2018년 8월 공직에서 물러났다. 외교부 대북정책과장으로도 일했다.
박지원·이인영 북한만 바라보고 임명
김기웅 전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장. [지호영 기자]
“한마디로 북한만 바라보고 한 인사라고 본다. 우리 국민이 어떻게 바라볼까,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 누구일까 고려한 게 아니라 현 정부가 추진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우선 생각한 것 같다.”
-박지원 국정원장 임명은 어떻게 봤나.
“이미 사법적 판단이 내려졌지만 대북 송금을 할 만큼 막후에서 뛴 사람이다. 남북관계가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과거 경험에 기반 해 뭔가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 한마디로 북한과 관계를 만들어낼 사람이라고 판단해 앉힌 것 같다.”
-그런 판단이 맞다고 보나.
“변화된 국제정세와 북한 상황, 남북관계를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은 김정일 시대가 아니라 김정은 시대다. ‘박지원 인맥’이 아직 북한에 있는지도 의문이고, 있다고 해도 작동할지 의문이다. 게다가 북한과의 선(線)이라는 것은 그들이 원할 때 가동되는 것이지 우리 쪽 개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다.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도 마찬가지다. 외교·안보 정책 전체를 컨트롤하는 자리인데 남북관계가 그야말로 ‘전략적 황금기’에 있을 때, 즉 북한이 굴욕감을 갖고 우리를 대하던 시기에, 그것도 비공식적 채널로 북한과 협상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의 북한을 보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왜곡된 인식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인사 배경을 크게 뭐라고 보나.
“정권 임기가 사실상 1년 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절박함을 느끼는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많은 정책, 이를테면 종전선언, 군사적 긴장완화. 신(新)한반도경제공동체, 남북기본협정, 이산가족문제 등 거의 대부분이 원점에 머물거나 오히려 더 나빠졌다. 계량적 지표를 보면 박근혜 정부 때보다 못하다. 남북대화만 해도 앞선 정부는 37회, 지금은 36회다. 이산가족 상봉도 앞선 정부는 두 번 했지만 이번 정부는 한번 밖에 성사시키지 못했다. 중국 등에서 이뤄지는 민간 차원 이산가족 교류도 거의 제로 상태다. 이런 상황이라면 방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왜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지 성찰해야 한다.”
대북정책 수정은 ‘신앙’ 저버리는 것
-정책에 문제가 있다면 수정하면 된다.“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주변 상황을 보는 역사관이나 가치관이 앞선 정부들과 다른 것 같다. 분단의 원인, 해방 이후 형성된 남북관계를 보는 자신들만의 관(觀)이 있다.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적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할까. 노무현 정부 때 이루지 못한 미완의 숙제를 임기 내 해결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 같다. 따라서 궤도를 수정하는 것은 마치 신앙을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 정부 출범 초기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이 ‘우리 정부는 박근혜 정부와 다르다’ ‘국민의 촛불로 이룩한 정부’라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생각=촛불 정신’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대북 정책이 이념에 따라 이뤄진다는 건가.
“아직도 햇볕정책 프레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깊게는 1988년 7·7선언 이후 우리가 압도적으로 앞선 경제력으로 북한을 변화시켜 우리 민족의 힘으로 자주부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생각에서 멈춰 있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과거 우리 상황이 너무 좋았던 시절에 북한이 보여준 굴욕적 태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김정은 체제는 김정일 체제와는 완전히 다른데 아직도 그걸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2019년 10월 금강산 현지지도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 말이 있다. ‘선임자들이 국력이 여린 시절에 남의 도움을 받고자 잘못된 정책을 폈다’고 했다. 선임자란 누굴까? 바로 아버지 김정일이다. 당시 발언은 조선중앙TV를 통해 일제히 보도됐다. ‘금강산 사업=김정일 사업’이라는 걸 주민이 다 아는데 그 현장에서 대놓고 아버지를 비판한 것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가는 곳마다 ‘일을 이 따위로 했느냐’ ‘진취적 기상도 없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있다’고 화를 내며 꾸짖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주민을 야단친 게 아니라 아버지를 비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정일은 두려움에 시달린 불행한 지도자
-김정은이 김정일은 비판했다?“두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김정은은 살면서 좌절이란 걸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이에 비해 김정일은 매우 힘든 삶을 산, 어떤 면에선 불행한 지도자다.”
-불행한 지도자라….
“김정일은 통치 기간 내내 체제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과거로 시간을 돌려보자.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지목된 뒤 인고의 세월을 거쳐 1980년 제 6차 당대회를 계기로 실질적 통치를 시작했다. 그 시기 중국, 85년에는 소련이 개혁개방을 추진한다. 안보위협이 생겼고 경제적 지원까지 끊겼다. 그러곤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공산권이 대거 참여한 88올림픽은 체제경쟁에서 완전한 패배를 의미한 것이다. 올림픽 이듬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독일이 통일됐다. 이윽고 러시아와 중국이 한국과 수교했다.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고 국제 질서가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아버지 김일성이 죽은 이듬해인 1995년 대수해가 나 2000만 인구의 상당수가 굶어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가 과연 미래에 대한 비전을 꿈꿀 수 있었을까. 동구처럼 무너지거나 독일처럼 흡수통일 될지 모른다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두려움과 불안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김정일이 내세운 ‘선군정치’는 불안감에서 비롯한 위기관리 체제다.
북한은 1980년대 후반 핵무기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핵을 가질 때까지는 미국과 한국 비위를 맞추는 게 필요했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 그것이다. 당시 북한은 우리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줬다. 김정일 입장에서 당시 제일 비굴한 일이 뭐였는지 아나?”
그가 이렇게 묻더니 말을 이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수용한 것이다. 정권수립 이후 내걸어온 ‘조선은 하나다’라는 원칙을 버렸다. 한국은 미국 괴뢰정권이며 식민지이니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정통성 있는 조선반도 주인이라는 사고의 기본 축에 무너졌다. 한국의 유엔 가입에 소련이나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고육지책으로 자신들도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온 슬로건이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다. 당시 김정일의 내면은 굉장히 흔들리고 복잡했을 것이다.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김정일은 정말 어렵게 살았던 비운의 지도자다.”
북한이 망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북한 체제가 그런 시절을 겪고도 건재하니 어떻게 보면 성공한 것이다.“결과적으로 보면 그 성공에 한국도 일조했다. 시간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은 어차피 망할 것이고 우리 뜻대로 북한이 변화될 거라는 믿음 속에서 교류협력을 통한 변화, 접촉을 통한 변화가 먹힐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캐피털(자본)이 들어가면 캐피털리즘(자본주의)도 들어간다는 자신감 속에서 말이다. 물론 당시 국제 정세나 동구 공산권의 몰락을 보면 그런 가설이 무리는 아니었으나 조금은 편안하고 느긋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가 북한의 생존전략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백두혈통 종손인 김정남의 삶은 김정은과는 다른 것 같다.
“김정남은 유학 시절 소련이 망하는 것을 목격했다. 충격이 정말로 컸을 것이다. 이후 귀국해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가 짊어질 현실은 주민들이 굶어 죽고, 한국과 경쟁에서 철저하게 패한,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 모두를 자신이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버거웠을까. 일본에 밀입국하다가 들켜버리는 바람에 결국 후계자에서 밀렸지만 생전에 김정남이 보여준 행동의 내면에는 그런 복잡함이 바닥에 깊게 깔려 있을 것이다.
-김정은은 어떤가.
“김정은은 달랐다. 2001년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당시 경제는 많이 회복된 상태였고 핵개발도 진전됐다.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멋지다고 여긴 사람이 할아버지 김일성이었을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권 리더의 모습, 국내적으로는 인민들의 진심어린 칭송을 받는 모습이 담긴 기록영화를 보면서 한국에 쩔쩔 매며 공개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신년사조차 직접 발표하지 않고 은둔하던 아버지 김정일과 많이 비교가 됐을 것이다.
김정은은 중국이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국력이 커질 때 정권을 맡았다. 중국의 고도성장, 군사대국화를 지켜보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의 세(勢)는 약해지고 중국은 강해질 것이며 이런 정세는 자신에게 절대 불리하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핵을 가졌다. 한국보다 잘 살지는 못해도 핵 한 방으로 끝낼 수 있으니 조선반도 주인은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최근 20년간 ‘굴욕적 북남관계’는 정상이 아니며 바꿔야 한다고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김정은이 집권 직후부터 말해온 ‘판갈이’의 의미다.”
김정은이 생각하는 ‘판갈이’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남북관계 발전이라든가 한반도 평화가 아니다. 그들 표현대로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가 판갈이의 본질이다. 김정은은 1990년대 이후 한국이 돈을 앞세워 만들어 놓은 남북관계 틀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 그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중국을 등에 업고 핵무기를 앞세워 자신이 주도하는 판으로 한반도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2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