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에 아랑곳 않는 ‘김어준 추종자’
막무가내 토론 불사 유시민에 호감 갖는 청년
진보·논객 캐릭터까지 친근하게 ‘포장’해 제공
운동권 학습서적 권하는 동아리 선배 캐릭터
라이프스타일 잡지처럼 인생 전반 해답 제공
보수 논객은 전문가 아니면 저격수
인생 선배, 친구로서의 호감 못 줘
지엽말단적인 ‘팩트’에 매몰, 유튜브 중독
방송인 김어준(52) 씨(왼쪽)와 유시민(61) 전 장관은 명실상부한 ‘말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뉴스1]
바꿔 말하면 그간 김무성과 통합당은 보수 유튜버, 아스팔트 태극기 부대에 모종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뜻이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보수 유튜버 사이에서나 떠돌던 세월호 유족에 대한 낭설을 차명진 전 의원은 기어이 입에 담았다. 여의도연구원에 따르면 그 결과 수도권 경합 지역에서 후보 10여 명의 당락이 갈렸다. 보수 유튜버의 세계관은 오프라인, 현실 세계, 진짜 정치의 영역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오히려 있는 표도 떨구고 말았다.
김어준은 누구인가
보수 진영에 속하는 이들은 큰 의문을 품을 법하다. 분명 자신들은 ‘김어준 모델’을 모방하고 있는데 왜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그 이전 웹진 ‘딴지일보’를 통해 방송인 김어준(52) 씨가 한 여론 플레이가 바로 그런 것인데 말이다.뉴미디어를 활용해 노골적으로 천박하고 화끈하게 편파적인 내용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음모론을 거리낌 없이 유포하면서 틈틈이 펀딩도 받는 비즈니스 모델. 김어준은 그런 식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왜 보수는 안 된단 말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김씨와 유시민(61) 전 장관 더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의 진보 논객들이 오늘날 담론 시장의 주류가 된 이유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일찌감치 인터넷과 팟캐스트 등 뉴미디어에 발을 담그고 수요를 창출해 온 게 성공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김어준 모델’을 극복하려면 김어준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김어준은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계획대로라면 서울대 87학번이 됐어야 마땅했다. 그랬다면 1학년 1학기에 1987년 민주항쟁을 경험한 386세대 끝물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89학번으로 홍익대에 들어갔다. 대학 생활에서도 겉돌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1989년 1월 1일부로 해외여행이 자유화됐다. 홍대 89학번 김어준의 인생은 평행우주 속 서울대 87학번 김어준의 그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구시대의 막내에서 새 시대의 맏이로.
1989년 직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어준이 ‘딴지일보’를 만든 1998년에도 해외여행은 희귀한 경험이었다. 모두가 코스모폴리탄의 로망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딴지일보’의 성공은 바로 그런 로망에 터를 잡고 있었다. 비속어를 쓰며 시시껄렁한 풍자를 하는 농담 사이트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포장지에 불과했다. ‘딴지일보’는 비속어 섞인 농담을 스스럼없이 던지는 ‘쿨’한 코스모폴리탄이 되고픈 판타지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곳이었다.
김어준은 ‘딴지일보’ 총수라는 직함을 달고는 이회창, 노무현, 박근혜 등 당시 쟁쟁한 정치인들을 불러놓고 ‘삼각팬티를 입느냐 사각 팬티를 입느냐’ ‘UFO를 믿느냐’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개그 풍자 사이트여서 할 수 있을 법한 질문 같지만, 당시 정치 뉴스 독자층 특히 고학력층이 목말라했던 탈권위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대변한 것이기도 했다. ‘딴지일보’에 실리는 다른 글도 마찬가지였다. 비속어를 섞고 합성 ‘짤방’을 곁들였지만 바탕에는 진지한 교양주의와 서구적 상식에 대한 동경이 깔려 있었다.
김어준이 경력 초기부터 개인주의자, 국제주의자, ‘쿨’한 남자의 이미지를 쌓아나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황우석 사태를 거치고 심형래의 영화 ‘디워’를 옹호하면서 자산을 모두 깎아먹은 듯했지만 경력 초기에 쌓아둔 상징자본이 워낙 확고했다. 그는 이내 ‘한겨레’에 연애 상담 칼럼을 쓰면서 내상을 회복했고, ‘황빠’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세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인 2011년 ‘나는 꼼수다’를 내놓으며 오늘날의 김어준이 됐다.
터무니없는 음모론과 정치적 말싸움
유시민 전 장관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1월 1일 경기 고양시 일산 JTBC 스튜디오에서 열린 JTBC 신년특집 토론회에서 ‘한국 언론, 어디에 서 있나’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JTBC 캡쳐]
그런 ‘간증’은 지금도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렵잖게 접할 수 있다. 적잖은 팬은 그가 종종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쏟아내고 모금 활동을 한 후 돈 관리가 투명하지 않다는 소문이 일고,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동원해 정치적 말싸움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김어준을 지지한다. ‘쫄지마, 씨바’를 외치며 저항하는 나, 그런 자아상을 투영할 대상인 김어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팟캐스트는 진보의 놀이터가 됐으니 유튜브를 선점해 자극적 콘텐츠를 쏟아내면 보수도 제2의 김어준을 배출할 수 있다’는 발상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보수에는 그런 배경 혹은 스토리를 가진 논객이 현재 전무하니 말이다.
김어준의 팬들은 김어준 혹은 그가 막무가내로 옹호하는 문재인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정치인에게 자아를 투영한다. 사소한 오류가 발생하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 플랜’을 찍겠다며 20억 원을 모금해 놓고 그 액수에 미치지 못하는 품질의 영화를 내놓아도 너그럽게 넘어간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소비자’가 아닌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가 형성돼 있는 인물은 김어준만이 아니다. 유시민은 10~20대 무렵부터 그의 책을 읽고 자란 이들에게 포승줄에 묶여도 환하게 웃는 ‘항소이유서’의 저자다. 군사정권의 폭압에 무릎 꿇지 않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다. 동시에 유시민은 다방면에 (얕지만) 해박한 지식을 뽐내며 윤택한 삶을 살아가는 작가, 즉 자유로운 지식인이기도 하다. 모든 직장인이 한 번쯤 꿈꾸게 마련인 로열티(지적재산권)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공적인 영역뿐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도 롤 모델로서 동경할 만하지 않은가?
보수 진영에서 정치 담론이 유통되는 방식과 진보 진영의 그것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가 여기 있다. 내용의 차이보다 어쩌면 더 본질적이다. 적어도 2000년 이후의 상황만을 놓고 보자면 그렇다. 진보는 담론을 제공하는 논객의 캐릭터까지 독자와 청취자에게 친근하게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시민과 신혜식의 차이
주진우 당시 시사IN 기자(가운데)가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김용민 시사평론가(왼쪽), 정봉주 전 의원과 함께 2013년 5월 1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전영한 동아일보 기자]
반면 보수 쪽에서 정치를 논하는 사람은 두 부류, 전문가 아니면 저격수다. 전문가란 말 그대로 특정 분야에 대해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저격수란 상대편의 결점을 파악하고 퍼뜨리는 활동 등에 특화돼 있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진보 논객들도 각자 상황에 따라 전문가 혹은 저격수로 역할을 나눈다. 가령 경제 논객 우석훈의 경우 다양한 사안에 경제학적 해석을 달며 전문가로서 발언한다. 김어준과 나꼼수가 ‘MB 저격수’로 이름을 날린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문제는 보수 논객들이 전문가 혹은 저격수 외에 다른 캐릭터를 갖지 못한다는 데 있다. 개별 논객마다 나름의 성격이 있고 주로 맡는 분야가 있지만, 진보 논객처럼 하나의 완성된 캐릭터를 형성하지 못한다. 젊은이들에게 진보 논객처럼 ‘똑똑하고 좋은 선배’로 받아들여진 보수 논객은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다.
가령, 유시민의 책을 즐겨 읽고 그의 유튜브 방송도 즐겨 보는 팬이 있다고 하자. 그 팬은 유시민이 기회만 준다면 본인에게 어떤 고민이 있는지, 어떤 여자나 남자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따위 고민도 서슴없이 털어놓고 상담하려 들 것이다. 유시민을 단지 정치 논객이 아닌 일종의 인생 선배로 바라보고 동경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보수 진영에서 그에 준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조갑제TV’를 열심히 보는 애청자가 조갑제 씨와 개인사를 나누고 싶어 할까? ‘신의 한수’의 100만 명 넘는 구독자 중 신혜식 씨에게 자아를 투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로세로연구소’ 강용석 변호사에게 연애 상담을 받고 싶은 팬이 없으리라 장담할 수야 없겠지만, 쉽사리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가?
진보 논객 특유의 교양주의
즉 보수 논객의 소비자는 보수 논객을 인생의 선배로, 친구로, 모범으로 여기지 않는다. 반면 진보 논객의 소비자는 바로 그런 시각으로 논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어째서일까?앞서 우리는 김어준의 인생을 다소 길게 다루면서 이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흔히 정치 논객으로 불리는 그들은 사실 정치 논객에만 머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어준의 팬들은 여전히 그를 ‘쿨’하게 사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 역사, 서평, 여행기 등 세상 모든 일에 대해 다 책을 쓴 ‘걸어 다니는 잡학사전’이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의 투사 홍세화는 그 이름도 우아한 ‘파리의 택시운전사’였고, 진중권은 예나 지금이나 명료한 이성적 개인주의의 화신과도 같다.
중요한 건 개별 진보 논객에게 부여된 캐릭터가 무어냐가 아니다. 그런 캐릭터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속성이 무어냐 하는 점이다. 그들 사이에는 구체적인 사안에서 입장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공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서구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각자의 삶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예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인생 모델은 범(汎)진보 진영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와 부합한다. 가령 유시민은 자신이 아내와 다소 머쓱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침대에 누워서 독일어로 대화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바로 이런 것이다. 보수 진영과 싸울 때에는 종종 앞뒤가 안 맞는 막무가내 토론도 불사하지만,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인 부인과는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는 남자. 그런데 서로 한국어로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주제는 독일어로 이야기하는 지식인 커플. 청년층으로서는 즉각적인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보수 논객들에게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 건 쉽지 않다. 보수 논객들에게 말하자면 ‘예능감’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원인은 더 근본적인 데서 찾을 수 있다. 진보 진영 특유의 교양주의가 보수에 결여돼 있을 뿐 아니라 보수가 전제하는 사회적 규범이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서다.
386세대가 주축인 진보 논객들은 어쨌건 나름대로 시대 변화에 발맞춰 현대적인 연애, 가족, 인생관을 체화했거나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반면 보수 논객들은 그렇지 않다. 고령층은 미시적 규범 변화를 불편해하며 아예 언급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젊은 층은 여성주의 등을 껄끄러워하거나 심지어 적개심을 품고 있다. 청년층, 특히 젊은 여성들로서는 설령 본인의 정치적 지향이 보수에 더 가깝다 해도 보수 논객들에게 호감을 느끼기가 매우 어렵다.
온갖 파편적 ‘팩트’에 매몰된 보수 논객
보수는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를 넘어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넓은 정치에서의 의제 싸움에 실패하고 있다. 진보 논객들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를 찍어야 할지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답을 얻을 수 있다. 비록 위선적 가식에 불과할지라도 ‘페미니즘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것’ ‘새로운 문화와 트렌드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열린 마음으로 접근할 것’ ‘난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게 호의를 베풀 것’ 등을 말이다.그러나 보수 논객들로부터는 이와 같은 긍정적(positive)인 행동의 규범을 얻기가 어렵다. ‘꼴페미’를 욕하는 보수 논객은 많다. 그렇지만 상당수 여성이 페미니즘적인 각성을 해버린 이 시점에 대체 여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할지 실마리 비슷한 거라도 제공해 주는 보수 논객은 사실상 없다. 조선족이 국민의 일자리를 다 빼앗아가고 범죄를 저지른다고 혐오 선동을 하는 보수 논객은 많다. 정작 이미 국민이 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보수 논객에게서 찾기는 어렵다.
비유하자면 진보 논객들은 종합 라이프스타일 잡지처럼 인생 전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또는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보수 논객 특히 유튜버들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박근혜’라든지, ‘문재인이 감춰놓은 금괴와 공산화의 음모’라든지 ‘우한의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코로나바이러스가 미·중전쟁의 도화선이 될 거’라는 따위의 정치적 사안에 파편적으로 매몰돼 있을 뿐이다. 논객들이 제공하는 ‘이 정도 지식’을 갖고 대화를 나누면 세상사에 나름대로 일관된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지엽말단적인 요소로 치부되기 딱 좋은 온갖 ‘팩트’를 들이대며 진보 논객들을 비웃는 행위 정도가 보수의 한계다.
보수는 여전히 더 수준 높은 다수의 전문가를 우군으로 보유하고 있다. 여차하면 팔 걷어붙이고 나설 저격수를 찾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보수가 정치 담론에서 열세를 극복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진보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꼭 채식주의를 택할 필요는 없지만 동물 학대에 신경을 쓴다), 남성의 경우 이성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야 할지(대단한 페미니스트가 되지는 못해도 여성의 말에 귀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한다), 날로 다양해지는 국내 인종 구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최대한 관용한다)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일종의 ‘레디 메이드’ 답변을 내놓는다. 패키지 상품을 제공하는 쪽에 소비자의 손이 더 가는 건 당연하다. 심지어 그 묶음 할인 속에는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을 지지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반대로 보수는 인생 전반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정치적 갈등에 대해 그럴듯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내로남불’처럼 상대의 흠집을 잡는 볼멘소리를 하는 데 그치고 만다. 2020년에 걸맞은 총체적인 세계관과 철학을 구성하지 못한 채 매번 떠오르는 사안마다 최대한 자극적인 반응을 내놓으며 ‘사이다’에 탐닉하고 있다. 중심 철학이 없고 그에 입각한 판단과 행위 지침도 없으니 선거를 앞두고 사분오열해 자기들끼리 ‘저격’이나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승리하는 정치세력의 윤리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 속에서 윤리학은 정치학과 하나의 세트를 이룬다. 좋은 삶을 탐구하는 것이 윤리학이라면 그 좋은 삶을 국가적인 단위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정치학이기 때문이다.유튜브에 중독된 보수는 ‘팩트’를 들이대며 ‘내로남불’을 조롱하면 선거에서 거저 이길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국민의 판단은 냉혹했다. 새로운 윤리적 지평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패륜적 발언과 행위를 저지르는 집단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던 거다.
도덕과 명분을 앞세운 정치는 현대사회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정치는 함께하는 윤리고 윤리는 좁은 관계 속의 정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승리하는 정치세력이 되고자 한다면 오늘날의 눈높이에 맞는 윤리관으로 무장하고 이를 스스로 체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