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차(茶)의 시간들
좋은 보이차는 떫지도 쓰지도 않으면서 개운하고 향긋한 맛을 낸다. [GettyImage]
학교 선배를 졸졸 따라 경남 합천 해인사에 간 적이 있다. 등산과 산사 둘러보기를 좋아한 아빠 덕에 어릴 때부터 절에 자주 ‘놀러’다녔던 터라 사찰 분위기에 익숙해 가볍게 따라나섰다. 선배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해두는 ‘장경각’을 돌보는 스님과 아는 사이였다. 마침 공부하는 학생들이 쓰는 방 한 칸이 비어 하루 묵울 수 있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선배와 스님 거처에 들렀다. 어렵고 어색해 입을 앙다물고 두 분 이야기에 끄덕끄덕, 배실배실 웃기만 했다. 스님은 묵은 나무껍질 같은 차를 작은 다관에 가득 넣고, 넘치게 물을 부어, 진하게 우린 차를 내주셨다. 고동색을 띄면서도 잔 바닥이 보이도록 맑은 차는 혓바닥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입안이 풍선을 문 것처럼 가득 채워지고, 녹진하고도 생생한 나무 향이 났다. 떫지도 쓰지도 않은데 입은 개운해지고, 먼 여행에 노곤했던 몸이 바르게 서는 기분이 들고, 관자놀이부터 눈까지 쨍하게 맑아졌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본 보이차다.
한 모금 겨우 되는 차를 홀짝홀짝 마시니 스님도 쉼 없이 잔을 채워주셨다. 그 밤 해인사 계곡에 흐르는 물과 바람 소리를 들으며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상한 것은 ‘불면’의 고통이 없었다는 점이다. 티끌 하나 없는 맑은 유리 같은 정신으로 즐겁게 밤을 보냈다. 물론 오전 3시에 일어나 새벽 예불에 동참했으니 밤이 길진 않았지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마신 밀크티
우유의 고소함과 차의 쌉싸래함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밀크티. [GettyImage]
부다페스트 역에 내려 역무원에게 항의했지만 ‘나쁜 승무원을 만난 불운의 여행객’이라는 위로만 돌아왔다. 여행 경비의 커다란 부분을 빼앗기고 마음은 불안함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던 그날은 마침 한국의 추석이었다. 여행 절반에 다다랐지만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이유없이 무서운 밤길을 걸어 숙소에 도착했는데 버터처럼 노르스름하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을 곱게 묶은 할머니가 우리를 맞았다. 잔뜩 풀이 죽은 우리를 보며 ‘무슨 일이 있냐’ 물으시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사이 헝가리식 소고기 스튜인 굴라시 두 그릇과 작은 주전자 가득 끓인 밀크티를 차려주셨다. 얼마나 놀랬느냐, 다른 일은 없었느냐, 집에 전화는 했느냐, 돈은 남았느냐, 다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등 서로 아는 만큼의 영어를 써가며 밤이 늦도록 차와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서 먹던 밀크티는 우유도, 차도 아주 진하고 달아서 한 잔이면 물리곤 했다. 헝가리 할머니의 밀크티는 밀도와 농도가 성긴 맛, 그럼에도 은은한 향, 고소함과 쌉싸래함이 부드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연하게 단맛도 돌아 바짝 말라버린 입에 편안한 여운을 남겼다. 한 잔 두 잔 마시니 경직된 몸이 풀리고, 마음의 불안도 점점 지워졌다. 도무지 잠들지 못할 것 같은 날이었는데 눈 감은 기억도 없이 잠에 푹 빠졌다.
언젠가 마실 쑥차 덩어리
연두와 노랑 중간색을 띠는 쑥차에서는 향긋한 봄 쑥 내가 난다. [GettyImage]
다기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 프렌치 프레스(커피 추출 도구)에 잘 마른 쑥차를 듬뿍 넣고 따끈한 물을 부어 잠깐 우린다. 연두와 노랑 중간색을 띤 쑥차는 향긋한 봄 쑥 내가 나고, 맛은 어린 잎 녹차에 고소한 맛, 쌉싸래한 맛을 조금씩 더한 것 같다. 마실수록 향은 묵직해지고 맛은 보드라워진다. 밤을 새우면 으레 배가 부글부글하는데 쑥차를 마시면 속이 편하고, 손발도 덜 붓는 기분이 들어 밤마다 곁에 두며 눈에 진물이 나도록 일했던 기억이 난다.
수 년 간 ‘쑥영감’으로 불리던 아빠 건강이 악화되면서 쑥차 제조는 멈췄다. 집에 한 덩어리가 있는데 감히 풀 생각을 못한다. 지금은 몇몇 차 도구를 갖추고 보이차, 홍차, 대홍포(우롱차의 한 종류) 등을 척척 내려 먹지만 아빠가 남겨 둔 쑥차는 살면서 제일 좋은 날 마시고 싶어 미루고 미루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