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가 만들어낸 허구, 선악의 족보
죄악을 선함으로 전도하는 일그러진 거울
좌파에게 도덕은 개인의 가치가 아닌 집단의 가치
‘성(聖)조국’과 핍박받는 ‘착한 며느리’
[뉴스1, 노무현대통령사료관 제공]
그러나 좌파의 도덕적 파탄은 비단 한두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좌파세력의 다수가 자기 진영의 위선을 방어하는 데 여념이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에게 도덕은 일상에서 지켜야 할 삶의 준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좌파에게 도덕은 목적이 아닌 정치투쟁의 도구다.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덕의 도구화는 좌파 특유의 서사와 상징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서사와 도덕의 결착, 선악의 족보
[동아DB]
현재 좌파 세력의 핵심인 86세대 운동권은 1980년대부터 신군부 집권 시기 권력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가해-피해’ 관계를 역사 전체로 확장했다. 이들은 역사 속에서 악의 축이 족보처럼 계승돼 왔다고 믿는다. 조선 말 노론, 식민지 친일 세력, 광복 이후 독재 세력, 민주화 이후 보수정당이 하나의 계보라고 믿는다.
예컨대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출간된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조선시대 세도정치로 나라를 망친 노론 세력이 일본 강점기에 친일 세력이 되고, 해방 이후 반공이라는 탈을 쓰고 독재 세력이 되고, 그렇게 한 번도 제대로 된 청산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여전히 기득권”이라고 주장했다.
2015년 유시민은 “인조반정 이후로 노론이 권력을 잡은 후에 권력교체가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행정부만 조금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 노론 권력이 400년 가까이 권력을 지켜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좌파는 정치적 상대 세력을 악의 족보로 치부하면서 자신들을 선의 족보 적장자(嫡長子)로 인식한다. 멀리 동학농민운동, 항일독립운동, 광복 이후 민주화운동, 현재 민주당까지를 선함의 족보로 계열화하고 그 마지막에 자기들이 있다는 식이다.
역사를 선악의 대결로 이해하는 좌파의 유치함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의 족보 타령은 본질적으로 허구다. 악의 기원으로 지목한 노론은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 앞에서 힘을 잃어갔다. 식민지 시기 과거 조선왕조 권력의 핵심은 몰락했다. 광복 이후 제헌국회의원 상당수는 독립운동가 출신이며, 이승만의 자유당과 박정희의 공화당 사이에도 강한 단절이 존재한다. 현재 보수정당의 원형인 민자당은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했고, 이후 첫 번째 대통령은 민주화운동 지도자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은 군부 사조직 하나회를 척결했다. 그래서 악의 족보 따위는 없다. 지난 150년 동안 집권 엘리트 계층은 지속적인 교체를 겪어왔다.
‘혁명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포장
마찬가지로 선의 족보도 허상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주요 인사 이용구는 친일단체 일진회를 이끌었고 흑룡회의 리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와 막역한 사이였다.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는 식민지 시기 친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천도교 도령 최린이 대표적이다.1960~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끈 재야 세력은 ‘친일’을 강요받기에는 일제강점기에 너무 어린 청년들이었다. 즉 앞 세대와 달리 ‘친일’의 압박 정도가 달랐다.
1980년대 학생운동 그룹, 즉 지금 86세대 운동권 정치인들은 민주화를 제도적 민주주의의 회복이 아닌 혁명으로 가는 중간 단계로 이해했다. 최종 목적지는 평양 아니면 모스크바였다. 이들은 과거의 ‘혁명운동’을 오늘날 ‘민주화운동’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한국 좌파는 역사를 날조해 자기 서사의 재료로 삼았고, 다시 서사라고 하기도 민망한 조악한 족보로 가공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 주류가 돼서도 이러한 역사 인식을 고수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서사가 대중적 파급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을 증오하면서도 망국의 책임자인 고종과 민비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영화 ‘덕혜옹주’에서 이(李)왕가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날조에 몰입하고,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면서 눈물을 찍어댄다. 그러면서 전봉준을 다룬 드라마 ‘녹두꽃’에 감동한다. 민비와 전봉준을 동시에 추모하는 모순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의 좌파가 이처럼 역사를 엉터리 족보로 날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좌파는 자신을 선한 세력으로, 정치적 반대파를 악한 세력으로 매도하기 위함이다. 정치적 좌우 노선의 차이를 도덕적 선악의 대결로 왜곡한다. ‘민식이법’이 대표적이다. 이 법안이 적용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숙고하지 않았다. 반대하는 정당은 부모의 마음을 상실한 부도덕한 집단으로 취급받았다.
둘째, 통치 세력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무능을 선함으로 포장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무능하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선의 족보에서 적장자임을 자부한다. 이러한 레토릭은 대중에게 상당한 소구력이 있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미래통합당을 찍나”라는 태도가 이와 같은 수사에 포획돼 있다는 방증이다. 차마 악의 족보에 속한 보수정당을 지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셋째, 자신의 구체적 삶에서 저지르는 죄악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함이다.
넷째, 선악의 이분법으로 지지층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기 위함이다.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는 대중의 지지를 결집하는 데 악의 중요성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대중운동이 시작되고 전파되려면 신에 대한 믿음은 없어도 가능하지만 악마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상적인 신과 마찬가지로 이상적 악마는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한 존재다.(…) 이 운동에서 발생하는 난관과 실패는 전부가 악마의 소행이요, 성공은 전부가 그 사악한 계략을 꺾고 승리하는 것이다.”(에릭 호퍼, ‘맹신자들’)
거대한 악에 대항하는 숭고한 존재
한국 좌파 역시 마찬가지다. 악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반대편을 악으로 규정해야만 이에 대항하는 자신이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악은 100년 이상 면면히 흘러오는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여야 한다. 그럴수록 악에 대항하는 자신은 숭고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친일·독재·재벌의 죄악이며, 이를 제거하는 것이 좌파의 역사적 과업이다. 토착왜구, 친일 세력과 같은 낙인은 상대를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할 ‘이물질’, 즉 ‘악’으로 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표현이다.도덕과 결착된 좌파 서사의 원형은 함석헌의 ‘고난사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30년대 함석헌은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운동의 하강과 성장하는 일본 제국을 목도했다. 독립이 요원해짐에 따라 그는 영성(靈性)과 도덕의 세계로 도피했고, 그 결과가 고난사관이다. 1934년 함석헌은 ‘성서조선’에 이렇게 썼다.
“성경은 그 가운데서 진리를 보여주었다. 이 고난이야말로 조선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는 요컨대 고난의 역사라고 깨달았을 때 이때껏 학대받는 비녀(婢女)로만 알았던 것이 피녀(彼女)야말로 가시면류관의 여주인공임을 알았다.”
조선민족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선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명을 짊어진 존재가 된다. ‘가시면류관’은 핍박받을수록 거룩해지는 서사를 함축하고 있는 상징이다. 문제는 비극적 상황이 어떻게 조성됐느냐는 사실판단과 이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가치판단을 뒤섞어 버린다는 점이다. 대개 한국 좌파의 사고방식은 당위가 사실을 압도한다. 예컨대 왜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당시 국제질서의 역학, 조선 사회의 모순과 조건, 집권층의 무능보다 일본의 침략 야욕을 부각한다.
물론 함석헌의 고난사관과 86세대 좌파의 서사 사이에는 나름의 차이도 있다. 적어도 함석헌은 씨알의 각성과 정신적 개조를 촉구했다. 즉 핍박받는 자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반면 좌파는 선악의 대결을 극단화한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까지 선함을 만들어가는 재료로 활용한다.
죄악을 선함으로 전도하는 일그러진 거울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인근의 위안부 소녀상. [동아DB]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좌파 입장에서 노무현은 잘못한 의혹이 있어서 수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악마 같은 검찰에 수사를 받았기 때문에 선하고 성(聖)스럽다. 뇌물수수 같은 의혹 문제를 공론화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것은 부도덕한 행위다. 또한 그의 죽음은 좌파에게 복수의 사명을 전달한다.
세월호의 본질은 해난 사고다. 2018년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은 세월호 침몰 원인을 두고 제기된 외인(外因)설을 기각했다. 그러나 이것을 승인해서는 안 된다. 세월호 침몰에는 악마와 같은 박근혜 정권이 어떤 형태로 ‘개입’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유가족이 어떤 요구를 해도 선한 것이자 비판 불가능한 것이다. 나아가 상징으로서 세월호는 정권 타도라는 사명을 부여받는다. 탄핵 정국에서 세월호를 형상화한 고래 모형은 촛불집회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대선 직선 문재인 후보는 팽목항 방명록에 “고맙다”라고 썼다.
한국 좌파에게 서사란 무엇인가. 자신의 죄악을 선함으로 전도하는 일그러진 거울이다. 정치적 반대파를 악의 세력으로 묶어놓기 위한 덫이다. 그래서 서사와 결착된 좌파식 도덕은 정치투쟁의 도구일 뿐이다.
좌파의 서사는 친일-반일, 독재-반독재 도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서사는 상징을 먹고 자란다. 독립운동과 5·18민주항쟁은 좌파 서사의 전통적 상징이다. 노무현, 세월호, 위안부소녀상, 조국 등은 지난 10년 동안 좌파가 만들어놓은 강력한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은 모두 별개의 사건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앞서 말한 선악의 족보를 통해 하나의 서사 속으로 포획된다.
화가 홍성담의 ‘세월오월’은 좌파 특유의 서사구조에 세월호 사건을 욱여넣었다. 여기서 침몰하는 세월호는 반일과 민주화를 매개하는, 그리고 박근혜를 비판하는 상징으로 활용된다. 명확한 선악의 이분법 위에 상징을 배치한다. 친일·독재·아베·박정희·이건희·박근혜·이명박이 악의 상징이라면, 5·18·위안부 피해자·세월호 유가족 등은 선의 상징이 된다. 이처럼 좌파의 서사는 새로운 상징을 먹어치우며, 현재 보수세력을 악의 세력으로 끊임없이 소환한다. 5·18의 가해자가 군부 세력이라면, 세월호의 가해자는 그 후예인 박근혜라는 식이다. 논리적 판단은 생략된다. 그 빈자리를 ‘선악의 연좌제’, 즉 족보가 차지한다.
상징을 삼키는 서사와 몰입하는 대중
이처럼 좌파의 서사는 수많은 상징을 소환해 보수세력을 악의 무리로 규정한다. 여러 사건에 선악의 가치판단을 덧씌우고 상징화한다. 이렇게 동원된 상징은 좌우 어느 쪽을 지지하는 정치적 행위와 도덕적 행위를 교묘하게 교란시킨다.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행위는 악에 동조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좌파는 선함으로 치장했지만 본 목적은 상대를 악으로 낙인찍어 정치적 실리를 챙기기 위함이다.자기 서사와 상징에 도취한 좌파에게 도덕이란 개인의 가치가 아닌 집단의 가치가 된다. 도덕적 개인으로서 ‘나’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도덕적 집단’에 속해 있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개인으로서 부도덕하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집단이 도덕적이고 집단의 사명이 옳은 것이라면 개인의 죄악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덕이 집단의 가치가 됐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당파적이다. 이용수는 위안부 운동의 영웅이었다가 기자회견 이후 토착왜구로 취급받았고, 윤석열 검찰총장은 검사의 사표(師表)였다가 하루아침에 악마가 됐으며, 미투운동에 열성적이던 여성단체는 오거돈과 박원순 앞에서는 눈을 감았다. 이 같은 ‘내로남불’은 도덕을 집단의 가치로 치환하는 좌파 특유의 세계관이 공론장에서 외화된 것이다.
한국은 ‘도덕지향성’ 사회
1980년 5·18 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도덕이 갖는 독특한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 것보다 도덕적인 존재로서 행세하기를 즐긴다. 철학자 오구라 기조(小倉紀藏)가 갈파했듯이 한국은 ‘도덕지향성’ 사회다. 내 삶이 실제 얼마나 도덕적인지는 부차 문제다. 중요한 것은 타인으로부터 도덕적 존재라고 인정받는 것이다.
스스로 도덕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좌파의 서사와 상징에 편승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동차와 휴대전화에 노란리본을 달고, SNS 프로필과 해시태그에 좌파의 상징을 적절하게 바꿔주며, 영화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 ‘암살’ ‘봉오동’ 등을 보러 가는 인증샷을 올리고, 매년 4월 16일(세월호), 5월 18일(광주민주화운동), 5월 23일(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일)에 SNS에 짤막한 포스팅을 쓰면 된다. 여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대중은 이러한 수행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도덕적 존재라는 평가를 얻어내고자 한다.
이처럼 대중은 좌파가 스펙터클하게 전시해 놓은 도덕 할인매장에서 상징을 쇼핑하며 도덕의 소비자가 된다. 도덕적 존재로 인정받기 위한 부단한 수양은 필요 없다. 대부분은 자신이 진짜로 도덕적 존재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도덕적이라는 평가만을 원한다. 단 몇 만 원으로 세월호와 노무현재단, 위안부 관련 굿즈를 구매하고, 잠깐 시간을 투자해 SNS 속 자신의 페르소나를 치장하는 것만으로 도덕적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 즉 도덕적 존재로 꾸미기 위한 싸고 효율적인 상품이 즐비하다. 이와 같은 ‘도덕의 가격혁명’ 때문에 대중은 좌파, 즉 소위 ‘진보’의 서사와 상징 속으로 함몰된다.
‘성(聖)조국’과 핍박받는 ‘착한 며느리’
세월호 참사 5주기인 2019년 4월 16일 울산시 남구 롯데호텔 정문 앞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있다. [뉴시스]
상징에 대한 표변(豹變)은 그 상징이 담고 있는 도덕이 집단적·당파적이고 싸구려인 탓도 있지만, 상품으로서 유행을 타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집권 초에는 미투운동, 작년 여름은 반일 선동, 작년 가을과 겨울은 검찰개혁, 코로나 정국 때는 ‘힘내라, 우한’ ‘BLM(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은 최근 상품으로서 유행한 도덕이다.
도덕적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유행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 어차피 도덕은 상징을 구매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유행을 따르는 것만이 도덕을 보증해 준다. 좌파는 매스컴과 다양한 콘텐츠를 이용해 유행이 흐르는 수로(水路)를 만들고 대중은 이를 함께 좇으며 서로를 도덕적 존재로서 접대한다.
도덕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여권 지지자들이 SNS에서 과잉 대표되는 것은 당연하다. SNS야말로 싸구려 도덕을 획득하고 전시하기에 가장 유용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과잉 대표된 이들의 목소리는 ‘국민의 뜻’이라는 레토릭으로 치환돼 여권의 정치 동력이 된다.
이들은 이미 당파적으로 문재인 정부를 지지할 각오가 돼 있는 집단이다. 문제는 조국이나 윤미향처럼 불리한 이슈를 맞이하는 국면이다. 이때 김어준류의 음모론이 등장한다. 대개 음모론은 앞서 말한 가시면류관의 도식이 통속화된 것이다. 예컨대 조국은 검찰이라는 악마를 소환해 ‘성(聖)조국’이 됐고, 윤미향은 이용수라는 탐욕스러운 노인 탓에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착한 며느리 대접을 받는다. 이처럼 음모론을 통해 파렴치한 범죄혐의자는 핍박받는 성자가 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좌파에게 도덕은 정치투쟁의 도구이며, 이러한 도덕은 상징을 매개로 대중에게 강한 소구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앞으로 지속될 것인가, 아니면 한계에 직면하고 있는가.
좌파의 서사와 상징은 기본적으로 ‘언더도그마(Underdogma)’를 기반으로 한다. 즉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는 유용하지만 통치에서는 뭔가 부족하다. 사회의 주류가 된 좌파는 이러한 언더도그마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서사, 상징, 도덕의 불협화음
문제는 좌파가 아직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년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야당 독재’라는 형용모순의 표현을 쓰거나 180석을 확보한 거대 여당이 된 이후에도 미래통합당을 향해 ‘전두환의 후예’ 운운하는 모습은, 결국 자기 서사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지금 좌파는 거대한 힘을 갖고도 자기 서사에 갇혀 여전히 저항 세력인 양 행동하고 있다. 어른의 몸과 아이의 정신이 결합된 좌파는 어떤 식으로든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우리는 몇 가지 징후를 살필 수 있다.
첫째, 상징과 실존, 서사와 실존의 불일치다. 이미 조국, 윤미향 사태로 드러났듯이 좌파 주류는 자기의 상징과 배치되는 실존을 살아가고 있다. 연봉 1억 원이 넘는 민주노총 소속 정규직 노동자가 전태일을 상징으로 삼고, 고학력 여성 엘리트가 위안부 소녀상을 자기 상징으로 내세운다. 이들이 주류로 올라서기 전까지 은폐돼 왔던 간극이 주류가 되자마자 노출되고 있다. 극단적 지지자를 제외하면 많은 유권자는 의심과 피로를 느끼고 있다.
둘째, 반민주성이다. 좌파는 민주화를 주된 서사로 활용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반민주적 작태를 반복하고 있다. 집권 초기부터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이라는 미명하에 마치 점령군처럼 행동해 왔다. 집권 이후 입법, 사법, 행정과 같은 3권은 물론 언론과 전문가 집단마저 반민주적 흐름에 종속되고 있다. 특히 이해찬의 국가원수모독죄 발언, 지난해 선거법과 공수처 법안 날치기 통과, 위성정당 창당, 국회 18개 상임위 독식 등이 대표적이다. 비록 날조된 것이기는 하지만 ‘민주화 세력’이라는 자신의 서사를 스스로 내다버리고 있다.
셋째, 정치적 반대파를 모욕하고 비판을 강제적으로 봉쇄하려는 태도다. 총선 직후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은 친일파를 파묘(破墓)한다고 떠들었고, 양향자 의원은 역사왜곡금지법을 예고했으며, 최강욱 의원은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면 국민소환을 하겠다고 소리를 높였다. 김남국 의원은 사법기관이 법을 ‘왜곡’하면 처벌하는 법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것은 좌파가 자신의 서사와 상징을 하나의 금기와 성역으로 만들겠다는 강제 조치다. 이것은 과거 대중을 설득했던 무기의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앞서 열거한 좌파의 무리수로 인해 대중의 피로감이 점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5·18은 40년째 ‘진상규명’을 외치고 있으며, 세월호는 집권 3년이 넘어가도록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과거 좌파는 이 사건들에 마치 숨은 무엇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상징을 남용했다. 그러나 권력을 틀어쥔 이상 그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면, 상징자산의 파급력은 반감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앞서 제기한 악법들의 적용과 해석을 둘러싼 잡음도 당연히 제기될 것이기에, 서사와 상징은 과거만큼 영향력을 유지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보수에는 어떤 서사와 상징이 있는가
보수 입장에서 이러한 전망은 낙관적인 것이다. 좌파가 스스로 무너져가는 징후로 독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스스로 무너질 수 있어도, 그 자리를 저절로 쟁취한 권력은 없다.보수는 좌파에 대항하는 서사와 상징이 있는가. 정치가 말의 투쟁이라면 서사와 상징은 말의 병참이다. 상징이 있어야 조직을 만들 수 있고, 서사가 있어야 대중을 설득할 수 있다. 현재 보수는 어떤 병참이 있는가.
한국의 보수는 건국과 산업화를 성공시켰다. 세계사적 유례가 없는 성취를 했음에도 보수는 정치세력으로서 자기 서사를 만들어내고 전파하는 데 실패했다. 적에게 아무리 위기가 찾아왔다고 하더라도, 병참이 부실한 군대의 승리는 난망한 법이다. 지금 보수가 그렇다.
*필자는 전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중앙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제3의길’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