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호

함께 사니 행복한가? ‘행복한 가족’은 환상이다 [고전연구가 고미숙에게 가족을 묻다]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하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1-02-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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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핵가족’이라는 거대한 판타지

    • 집은 욕망 아닌 마음의 거처가 돼야

    • 혼자 공부 힘들어 만든 공부 공동체

    • 중년 남자 내면 ‘외롭다’

    • 인생의 철학을 만들 때가 됐다

    *신동아는 2월호부터 인문학재단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시리즈를 진행한다. 2021년까지 진행한 ‘인문을 과학하다’ 후속 연재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년 11월 설립된 국내 최초 인문학 지원 재단으로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 물음을 새롭게 전한다는 취지로 연구 지원, 대중 강연, 온라인 포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새로 선보이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는 코로나19 이후 많은 것이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듯 공허감을 겪는 우리에게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진행한다.<편집자 주>

    [허문명 기자]

    [허문명 기자]

    서울 남산 근처에서 공부 공동체 ‘감이당’(서울 중구 필동)을 운영하는 고전연구가 고미숙 씨를 만나고 싶었던 건 그가 최근 펴낸 ‘기생충과 가족, 핵가족 붕괴에 대한 유쾌한 묵시록’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을 재료로 삼아 지금의 핵가족은 정서적 집착과 경제적 이익의 포로가 됐다며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40대 때부터 피 한 방울 안 섞인 타인들과 고전 공부를 매개로 한 공부 공동체를 운영하는 그에게 가족은 무엇이고 공동체는 어떤 것인지 물었다. 우선 ‘기생충’ 영화 이야기로 시작했다.

    ‘핵가족’이라는 거대한 판타지

    - ‘기생충’에 대해 핵가족 붕괴의 끝장을 보여준다고 평했는데. 

    “봉준호 감독이 애초 영화 제목을 ‘데칼코마니’로 하려 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영화에는 쌍둥이처럼 닮은 가족이 등장한다. 한쪽은 대저택에 사는 부자, 다른 한쪽은 반지하 하층민이다. 이걸 빈부격차라는 시각으로 보는데 나는 빈부를 넘어선 핵가족이라는 앵글로 보았다. 대저택에 살든 반지하에 살든 두 가족 다 엄마·아빠, 아들·딸로 이뤄진 전형적 근대 핵가족이다. 대저택 가정부와 지하실에 숨어 살던 남편도 변형된 핵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들 세 가족 모두가 완전히 봉쇄된 관계 안에서 외부가 하나도 없는 것에 주목했다. 영화의 작품성은 훌륭하단 걸 알겠는데 왜 보고 나면 찜찜하지? 핵가족의 종말이란 점에서 보면 뭐가 다르지? 반지하 살면서 돈 생기면 치킨 뜯어 먹거나 뷔페 가고, 대저택에 살면 정원에서 생일파티 하는 건데 이 차이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이런 의문이 들었다.” 

    - 엄청난 차이 아닌가. 

    “외부로부터 소외된 핵가족 관계라는 점에선 똑같다는 말이다. 오로지 욕망을 발산하는 거 외에는 없는 거. 가족이란 게 만나면 서로 먹이는 거밖에 못하지 않나. 다른 종류의 교감이 불가능하다는 걸 영화가 보여준다. 그거를 작은 규모로 하느냐, 화려하게 하느냐 그 차이다. 



    부모가 자식한테 해주는 것도 화려한 생일파티 아니면 뷔페나 치킨 이런 거지 다른 걸로 뭘 주고받을 게 없다. 핵가족이라는 게 우리나라는 20세기고 서양은 산업혁명 때 나온 건데 이제 100년 된 거다. 이제 갈 때까지 간 제도라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그나마도 이런 핵가족에 대한 유지가 코로나 시대와 함께 정말 해체되고 막을 내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농담으로도 많이 얘기하는데 핵가족을 유지해 온 건 판타지 때문이다. 옛날엔 언덕 위 하얀 집이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거기에 엄마 아빠가 있고 애들이 있는데 아버지는 사무직이어야 하고 일일 노동자여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공부를 잘해야 하고.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는 쳐줘야 하고. 이런 설정이 핵가족의 표상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 가족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르는 무서운 세상이다. 대표적 예로 언제부터인지 근친상간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입에 담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포털 뉴스에 수시로 올라온다. 사람들은 점점 부자가 되고 집은 좋아지고 있는데 왜 이럴까. 

    그나마 코로나 전에는 다들 바빠서 가족관계가 그런대로 유지가 됐다. 아버지도 바쁘고 엄마도 애도 바빠서 서로 만나기 어려우니까 그나마 시간을 내서라도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이제 몇 달을 같이 있어봤지, 그래서 어땠나, 행복한가. 다들 ‘집콕’을 하면서 우리가 깨달은 건 한마디로 가족끼리 같이 할 게 없다는 거다. 그렇게 평소에 서로 바빠 대화가 부족했다면서 다들 하루 온종일 같이 있게 됐는데 대화가 되던가. 하지만 가족은 원래 대화가 필요 없는 관계다.”

    집은 욕망 아닌 마음의 거처가 돼야

    - 대화가 필요 없다고? 

    “가족은 구성원들 각자가 자기 인생을 살도록 ‘서포트’ 해주면 된다. 부모, 자식 간에 무슨 깊은 대화를 주고받을 소재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원초적으로 그냥 연결돼 있기 때문에 묵묵히 그냥 자기 길을 가게 해주면 된다.” 

    - 원초적으로? 

    “그렇게 돼 있다. 다 큰 자식이 부모하고 알콩달콩 사는 걸 원할까? 그리고 또 부모는 뭐 때문에 다 큰 애랑 그렇게 자기 중년을 보내야 해? 생명 논리하고도 맞지 않는다. 동물들도 새끼가 사냥법을 터득하는 순간 부모, 어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래야 새끼가 정을 떼고 자기 길을 간다. 행복한 가족관계가 인생의 전부라고 설정해 놓는 건 자본의 프레임이다. 그래야 소유에 올인할 수 있다. 내 집, 내 아파트. 

    지금 부동산이 거의 맹목이 돼 있는데 한번 따져보자. 집을 갖는 쾌락, 소유하는 쾌락의 실체를 말이다. 집이란 게 따뜻하고 기본 의식주 해결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사는 게 거의 똑같다고 본다. 나머지는 머리로 망상하는 거다. 내가 남보다 큰 집에 산다. 이런 거밖에 인생의 의미를 둘 만한 데가 없으니까 지금의 아파트는 마음의 거처가 아닌 욕망의 거처다. 이렇게 된 게 가족관계, 핵가족이 토대다. 드라마도 그렇지만 공익 광고나 이런 것들을 보면 가족의 사랑을 엄청 막 낭만적으로 띄워주고 너무 소중한 것처럼 하는데 그런 게 사실 가족을 제일 힘들게 하는 거다. 

    어떻든 이렇게 우리가 100년을 지속해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핵가족조차 해체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핵가족 제도조차 더 견디기 어렵게 된 걸까. 이걸 고민해야 하는데 항상 답은 어디로 가냐면 경제학 즉 일자리 문제로 간다. 

    가족에 대한 판타지가 인생의 기본이고 종국의 목표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팅을 새로, 즉 리셋해야 한다. 일도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된다. 지구가 남아날 수가 없다. 코로나 시대에는 열심히 사는 게 반(反)생태주의다. 밤에 불 켜고 일하고 그러면 또 먹어야 하고, 쓰레기 나오고. 야생동물 잡아먹다 이상한 바이러스를 깨우고, 그런 점에서 조금 게으르게 사는 게 지구를 살린다.”


    혼자 공부가 힘들어 만든 공부 공동체

    공부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 간식 캠페인 문구. [허문명 기자]

    공부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 간식 캠페인 문구. [허문명 기자]

    - 가족에 대한 문제의식을 언제부터 가졌나. 

    “30대만 해도 결혼하고 아이 낳고 논문 쓰고 아파트 하나 생겨서 사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40대에 마음의 흐름이 크게 바뀌었다. 명리학에서는 대운이 바뀌는 때라고 한다. 우리 마음은 사춘기 때 20대 때 다 다르다.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교수가 안 됐다. 그러면서 취직을 포기했다. 그러던 중 남편은 독일로 유학 갔는데 나는 가기 싫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교수도 포기하고 애도 포기하니 가족이라는 것의 행복이 내 삶에서 사라져버리더라.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자유롭게 공부하고 싶은데 가족 안에서 그걸 소통하기가 어려웠다. 

    스님들 말에 따르면 그때 내가 출가를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친정 부모님도 걱정은 되는데 내가 너무 태연하게 잘 사니까 개입을 못 하더라. 어차피 교수는 틀렸고 공부는 계속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 드는 생각이 나는 혼자서는 절대 못 한다, 이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공부 공동체를 생각한 거다.” 

    그러면서 그는 핵가족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살면서 보니 나만 겪는 일도 아니었고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니까 모든 괴로움과 장애가 가족이라는 표상을 절대화하면서 일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가족이란 표상이 절대화됐을까. 우리는 20세기 초 춘원 이광수가 기본적으로 로망을 만들어놓았다. 남녀 간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절대화한 게 핵가족이었다. 그게 딱 한국인을 사로잡은 거다. 여기에 학교, 교회, 병원이 딱 삼위일체로 이런 식의 삶이 제일 좋다는 기준이 생겨버린 거다. 우리가 동남아나 다른 나라에 비해 근대화를 빨리 이룬 것도 핵가족 제도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성질이 급하지 않은가. 진짜 다이내믹하고. 한 번에 올인하는 기질도 있고. 굉장히 낙천적이긴 한데 근본적인 통찰 같은 건 약하다. 어떻든 핵가족은 소유와 자본을 집중하게 하는 데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전부 다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고 뼈 빠지게 일한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이제는 어느 정도 벌었는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얘기한다. 

    이제 벌 만큼 벌었으니 남을 위해 쓰겠다고 생각하는 중산층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런 멘털이나 윤리가 없다. 부모 세대 때는 소유에 집착하는 게 납득이 됐다. 먹고살기 어려워서 병이 들어도 병원에 못 갔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류층은 돈이 남아돌아가는 데도 오로지 소비와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다.”
     
    - 공부 공동체를 해보니 어땠나. 

    “내게는 다음 생이 있어도 다른 선택은 없다. 그 정도로 퍼펙트하다. 처음에는 공부를 같이 할 사람을 모아야 하고 같이 모였으니 밥을 먹어야 하고 같이 밥을 먹다 보면 공부, 산책도 하고 그래서 탁구 대회도 만들고 그랬다. 인간이 같이 생활할 때 오는 진짜 어마어마한 충격이 있다.” 

    - 그게 뭔가. 

    “공동체를 운영한다고 하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하고 어떻게 같이?’라고 묻는데 둘이 사나 100명 하고 사나 똑같다, 둘이 사는 힘으로 100명 하고도 살 수 있다. 사람이 함께 모이면 상호적 순환과 상생도 있고 상극도 있어서 빈곤감 같은 게 생긴다. 누군가랑 같이 살면 마음의 부담이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상대방의 걸음걸이, 표정, 말, 몸짓 같은 게 완전히 크게 다가온다. 거기서 참 많이 배우고 많이 당혹스러웠다. 나도 이렇게 벗겨지고 있겠구나. 다른 사람들 같으면 진즉 그만뒀을 거다. 그런데 나는 공동체가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 겪어낸 거지. 나는 인간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 같은 게 전혀 없다.” 

    -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저 사람은 어떤 존재일 것이라고 하는 전제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환상도 없고 동정심도 없다. 그런 깨달음은 공동체를 안 했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애착을 갖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 

    - 가족은 그런 점에서 애착을 끊기가 어렵다. 

    “가족 안에서는 감정만 주고받는다. 그런데 누구도 감정 조절을 훈련한 적이 없잖은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래서 더 감정만 증폭이 되고 오염이 된다. 대가족 제도하에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같은 윤리나 제사 의식들이 감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는데, 핵가족은 ‘사랑한다’는 거로 다 된다고 생각한다. 

    - 하긴, 여기(가족)서 안 해주면 어디서 해줘, 이런 식이지. 

    “그게 서로에게 어마어마한 상처를 준다. 특히 청년들이 희생양이 된 거다, 엄청난 케어를 받고 애착의 대상이 됐는데 인간이나 생명으로서 자존감을 하나도 못 느낀다.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교감할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가족 안에서 맨날 감정을 배설하는 것만 배우는데 어떻게 밖에 나가 낯선 존재를 사랑하겠나. 사랑에도 윤리가 없으니 성이 범죄가 되는 시대가 된 거다.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거다. 그냥 자기가 받은 대로 한다고 생각한다. 올인해서 하루 종일 나(I)만 생각하는 것, 이것은 비극이다. 소심해서 밖에서는 말도 못 하는 애들이 집에 와서 부모한테 행패를 부린다. 그런데도 핵가족이 어떻게 유지가 되느냐? 바로 아파트, 재산 때문이다. 가족이 해체되는 순간 그걸 분해시켜야 하니까.“ 

    - 인간의 본원적 외로움 같은 것도 있지 않나. 극단적 예를 든다면 매 맞는 아내라도 남편이 있으면 좋다는 심리 같은 거. 

    “그래서 더 외로워지는 거다. 그런 관계를 전부라고 생각하니까 친구가 생길 리가 없다. 청년이고 중년이고 친구가 없다. 그러니 바깥에 나갈 엄두를 못 내고. 그렇다고 해서 가족끼리 많은 시간을 보내면 외롭지 않아야 하는데 외롭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문젠가.” 

    - 같이 있어도 나눌 수 없다고 느낄 때 외로운 것 아닌가. 

    “거듭 말하지만 환상을 깨라. (가족 내) 두세 명하고 아무리 교감해 봐야 기본적으로 안 되는 건데 안 되는 것을 붙잡고 있다. 아무리 잘 통한다고 해도 어떻게 두서너 명하고만 관계를 맺나. 그건 생명이 아니다. 영원한 파트너? 멜로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아니, 그런 사람이 있어도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연애는 기본적으로 그게 불가능하다. 왜냐고? 남녀 간 사랑은 기본적으로 성욕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성욕이 주는 쾌감이라는 베이스 위에서 시작하는 거라 이 균형이 깨지는 순간 권력이 생기고 이게 불편해지면 인연은 끝난다. 너무너무 불안정한 관계인 거다. 이 세상 권력관계 중에 가장 불안정한 게 성으로 맺은 관계다. 영원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10년을 무난히 사는 것만도 정말 대단한 인연이다.

    중년 남자들의 내면이 외롭다

    고미숙 씨는 “이제는 대중이 지성을 연마해 세상을 이끌어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고미숙 씨는 “이제는 대중이 지성을 연마해 세상을 이끌어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 공동체 속에서 에너지의 상극, 상생 관계를 경험한다고 했는데. 

    “공동체라는 건 관계의 일상성이 유지돼야 한다. 여기 ‘감이당’은 누구나 들락날락할 수 있는 외연이 넓은 공동체다. 이 안에서 우리가 혈연 이상의 뭘 느끼려면 강도와 밀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주방을 가리키며) 일상에 매일 두 끼를 여기서 먹는다고 할 때 굉장히 깊은 정신적 유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부하는 거다. 살펴보니 중년 남자들이 특히 내면적으로 외로운 삶을 산다.” 

    - 왜 그런가. 

    “한마디로 왕따 되기 딱 좋은 멘털과 신체 리듬을 갖고 있다. 우리 공부 공동체도 90%가 여성이다. 청년이든 중년이든. 남성은 극히 드문데 요즘 조금 늘었다.” 

    - 중년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하긴 자기네들끼리도 서로 물어보더라(웃음). 어디 갔느냐고? 다 아직도 20세기적으로 산다고 보면 된다. 경마장 아니면 주식 투자, 아니면 PC방. 이분들은 뭔가를 전투적으로 해야만 잘 산다고 생각한다. 너무 낡은 의식이다. 싸워서 이겨야만 의미가 있다고 하는 건 얼마나 이분법적이고 동물적 사고인가. 어떻게 이렇게 공부를 안 할 수가 있을까. 한국 중년 남성들은 새로운 전망, 운명의 전망에서 지금 거의 도태됐다. 그런데 장점도 있다. 느리지만 우직해서 철학적 돌파력이 굉장히 빠르다. 그런데 뭔가 감정 훈련이 하나도 안 돼 있는 거야. 거의 부하 직원들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생각하고 살았잖아. 

    여기는 명함이 안 통한다. 무조건 자기 삶의 구도자가 돼야 한다. 공부하면서 자기 노년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 누구나 증여자가 된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누렸구나. 그래서 이제 언제든 나누어 주어야겠구나.” 

    - 공동체에서 먹고 자는 건 어떻게 하나. 

    “중년들은 각자 집이 있으니 알아서 하고. 청년들은 남녀 기숙사 2개가 있다. 거기 다 수용이 안 되면 두세 명이 집을 셰어한다. 이 동네가 옛날 집들이 많은데 월 20만 원씩 내면 서너 명이 꽤 좋은 집에 살 수 있다. 그리고 이 안에서 매니저나 이런 걸 하면 경제활동도 된다. 우리는 이제 혈연을 넘어선 새로운 관계. 인생을 함께 갈 수 있고 일상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 공동체엔 일상과 인생이 같이 있다. 이제 학벌 시대는 끝났고 대학에서 배우는 공부가 세상을 이끌어갈 수 없다고 확신한다. 대중이 지성을 연마해서 이끌어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지성이라는 모토로 나온 게 감이당이다.” 

    - 그래도 먹고살 거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밥을 같이 먹느냐 안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를 다니면 일상은 다 거기 묶이지만 인생의 비전을 거기 싣지는 않는다. 먹고살기 위한 생활의 도구이다 보니 공동체적 관계를 못 맺는다. 직장이란 게 그런 식으로 교감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공부하고 글을 써서 세상에 지혜를 나누어주고 강의도 하며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중이다. 지난해에도 청년들 책이 4권인가 나왔다. 청년들을 책의 저자로 무대에 등극시키고 있다.” 

    - 인간이 가진 욕망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나. 

    “누가 부정하라고 했나. 어떤 게 잘 사는 건지 성찰하고 더 잘 살기 위한 욕망을 가지라는 거지. 소비를 위해 사는 게 인간답게 사는 건가. 나는 아파트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4000만 원 갖고 공동체를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인생의 철학’ 정립해야

    - 오케이 좋다, 그렇다면 가족에 대한 로망과 환상을 깬 뒤는 뭘 하나. 

    “한마디로 집이 아니라 길을 인생의 비전으로 만들자는 거다. 집에서 길로, 소유에서 자유로 가자는 거다. 소유가 목적이 아니라 소유할 수도 있고 집에 머물 수도 있고 돈을 많이 벌 수도 있다. 그 모든 건 다 나의 존재론적 자유의 확장이다. 태어남 자체가 예속인데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 왜? 

    “시공과 경계가 다 무너지는데 왜 자꾸 집으로 가족 속으로 들어가나, 무한한 길이 열렸는데 왜 내 마음을 아파트 안에 가둬두냐고. 길을 나서려면 가벼워야 한다.” 

    - 감이당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주역에 나오는 감괘에서 따온 거다. 감은 물이다. 물은 지혜를 의미한다. 지혜로 지은 집이란 뜻이다. 여기는 청년하고 중년들이 같이 밥 먹고 공부하는 재미있는 일상이 있다. 그러면 삶을 좀 견딜 힘이 생긴다. 지금 사람들 인생이 헛헛하다. 교감할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건 연애나 가족으로 절대 해결이 안 된다. 가족은 의무 관계이고 연애는 쾌락이지 절대 내 근원적 문제를 해소해 주지 않는다. 각자 다 철학자가 돼야 한다. 다들 자기 인생의 철학을 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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