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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부산, 인천, 원산 담보로 미국 병사 20만 빌려 천하를 얻으리라”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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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서 봉정식은 이렇듯 코미디처럼 진행됐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위안스카이는 조선 정부에 박정양의 영약삼단 위반을 강력히 항의했고 관련자 전원의 처벌을 요구했다. 청나라 정부의 위협과 압력에 시달리던 조선 정부는 공사 일행을 차례로 소환했다. 급기야 1888년 11월에는 전권공사 박정양마저 소환했다. 박정양이 이완용, 이채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자 주미 조선공사관에는 서기관 이하영만 남게 됐다. 조선 정부는 관직에 오른 지 불과 2년밖에 안 된 이하영을 주미 서리공사로 임명했다. 외교부 말단직원으로 들어간 지 단 2년 만에 주미대사로 수직상승한 셈이었다.

이하영은 서기관으로 미국에 부임하기 전 고종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바 있었다. 부산, 인천, 원산 세 부두를 담보로 200만달러를 차관해 그 돈으로 미국 병사 20만명을 빌려오라는 것이었다. 고종은 20만 미국 병사로 조선 땅에서 청국 세력을 몰아냄은 물론 중원까지 밀고 올라가 천하를 손에 쥐려는 황당하고도 원대한 꿈을 품었다.

고종께서는 아직 사절 일행이 여장도 꾸리기 전 내게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교첩까지 내리셨다. 내가 20만 미국 병사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환국하면, 고종께서는 쉰양강(캶陽江) 건너편까지 통치하기 편하도록 평양으로 황도를 옮길 엄청난 계획을 품으셨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단독 국서 봉정에 성공한 이후 이하영은 고종의 밀명을 완수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워싱턴 공사관에 혼자 남아 서리공사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그 첫 결실을 보았다. 뉴욕은행은 200만달러의 차관을 통보했다. 차관의 절반인 100만달러를 인출해 책상 위에 쌓아놓고 보니 외교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20만 미국 병사를 끌고 인천부두에 상륙할 날도 머지 않은 듯했다.

황금은 귀신도 지배한다는데 200만달러의 거금을 흉중에 품고 나니 호장한 용기가 아니 날 수 없었다. 나는 돈을 물 쓰듯 뿌리며 발랄한 외교를 시작했다. 낮에 여는 연회에는 문무백관을 초청하고, 밤에 여는 연회에는 상하원 의원과 기자를 초대하여 동방예의지국을 선전하기에 분주했다. 결국 20만 병사를 원병으로 조선에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하원 표결에 부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든 탑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가 왔다.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고 만 것이다.



성공을 굳게 믿은 나는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간 비탄과 함께 커다란 걱정이 일어났다. 원병을 빌릴 것을 구실로 얻은 차관 중 이미 소비한 16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어떻게 갚을까 하는 것이다. 백 가지 계책을 세워보아도 도무지 대책이 없어 파리 쫓으면서 낮잠만 자고 있노라니 하루는 외무대신(국무장관)이 관저로 나를 초청했다.

나는 안색이 붉어졌다. 이를 어찌하리오. 가나마나 차관반환을 독촉하러 부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니 갈 수도 없는지라 떨리는 다리로 초청한 장소로 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관저에는 채권자인 뉴욕은행 두취(대표이사)를 비롯하여 관련된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황공히 앉아 외상의 입만 쳐다보며 최후의 처분을 기다렸다.

외상은 이것이 꿈이 아닌가 하리만치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위로 같기도 하고 사과 같기도 하고 회유 같기도 한 어조로 자국의 정책인 먼로주의를 자세히 설명한 끝에, 귀국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유감천만이라면서 결론으로는 차관 중 이미 소비된 금액은 미국 정부에서 대신 갚을 터이니 남은 금액은 즉시 상환하여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전액을 잃을까 우려하여 남은 돈이나마 돌려 받으려는 약은꾀를 미워할 짬도 없이,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고 즉석에서 승낙했다. 나는 미국의 관대한 태도에 감복하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경할지언정 믿고 따를 나라는 못 되는 줄 깨닫게 되었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이하영은 끝내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서라도 나라로부터 받은 수모를 갚고자 했던 고종의 꿈을 이뤄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밤낮으로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어 미국 사교계에서 향락과 사치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2년 남짓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영어도 유창해지고 춤 솜씨도 늘었다. 초대받은 연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했고 귀부인과 어울려 춤추기를 즐겼다. 상투를 튼 채 조선 버선에 구두를 신은 이하영이 댄스홀에 나타날 때면 금발 미녀들이 그를 에워싸고 갈채를 보냈다. 밤을 새워 술 마시고 금발 미녀들과 껴안고 춤추고 나면 근심과 우울은 모두 사라졌다.

조정의 급전

이하영은 부산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시절 한 차례 결혼한 적이 있다. 1880년에는 큰아들 이규삼까지 얻었다. 이규삼은 1921년 아편을 흡입하다 체포되어 자작이자 중추원 고문인 아버지 망신을 톡톡히 시켰다. 당시는 이혼이 공식적으로 성립되던 시대는 아니었지만, 미국 공사관에 부임할 때 이하영은 첫 부인과 사실상 이혼한 상태였다. 서리공사 이하영이 워싱턴 사교계에서 인기를 한몸에 끌다보니 그에게 구애하고 청혼하는 금발미녀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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