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호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사회를 바꾸고 싶다”

‘박원순 캠프’의 핵 ‘여명그룹’<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운동조직>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4-11-17 15: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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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주의 변혁운동을 한 ‘여명’ 출신 인사들의 주류는 그간 정치권이나 진보정당에 참여하지 않고 시민운동을 해왔다.
    • 이 그룹이 상징하는 흐름이 ‘박원순 캠프’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사회를 바꾸고 싶다”
    ① “나의 꿈은 과로사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신동아’2011년 4월호 별책부록 ‘명사의 버킷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 수첩은 늘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조찬 약속에서부터 저녁 늦게까지 거의 30분이나 한 시간 단위로 약속이 잡혀 있다. (…) 밤늦게 집에 가거나 아니면 그냥 사무실에서 잠깐 새우잠을 자고 그다음 조찬에 나간다”고 하루를 묘사했다.

    재미있자고 쓴 것 같지만, ‘인간 박원순’을 다룬 글에서 ‘일하다 죽겠다’는 취지의 이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일할 때 아랫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평가도 없지 않다. 부지런한 데다 아이디어마저 번쩍이다보니 일에 혼을 담지 않거나 대충하면 불벼락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일처리가 독선적이라고 비판한다.

    이렇듯 일중독자로 소문난 박 시장이 신뢰하는 인물은 대체로 일솜씨가 탁월하다는 평가를 훌쩍 넘어선다고 한다. 박 시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서울시 정책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피부에 와 닿는다고 말한다. 시민과의 소통이 뛰어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박 시장은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라고 불리기 원한다. 한 시민단체 인사는 “더 나은 사회를 디자인하겠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라면서 “나라를 개조하고 싶다는 뜻 아닌가”라고 말했다. 박 시장은 2011년 9월 15일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고자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서 퇴임하면서 “5~10년이면 세상을 싹 바꿀 수 있다”고 설파했다.

    ② 여명은 1980년대 마르크스레닌주의 비합법 조직의 명칭이다. 이 조직이 발간한 기관지 이름과 같다. 이들에 대한 명칭으로는 ‘여명그룹’ ‘YM’ ‘Y그룹’ ‘여명’ 등이 혼재한다. 한 여명 출신 인사는 기관지 ‘여명’에 대해 “볼셰비키 기관지 ‘자랴’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은 1900년 망명지 독일에서 마르크스주의 정치신문 ‘이스크라’(불꽃)와 사회주의 이론을 다룬 기관지 ‘자랴’(여명)를 발행했다.



    ‘여명’을 정기적으로 읽으면서 변혁을 도모한 이들이 ‘여명그룹’이다. 16주 안팎의 ‘예티’(예비 팀이라는 뜻) 과정을 거쳐야 정식 멤버가 됐다고 한다. 예비 과정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치열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여명은 소련식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봤다. 북한을 대안 삼은 NL(민족해방)을 비판했다. 한 인사는 “여명은 비(非)주사가 아닌 노골적인 반(反)주사였다”고 말했다. 여명 출신 인사들은 자신들을 PD(민중민주)로 분류하는 것도 마뜩잖게 여긴다고 한다. PD가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여명은 PD계열에서 상대적으로 소수파에 속했으며 성향도 남달랐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지지했다. 1989년 중국 공산당의 톈안먼(天安門) 시위 진압을 비판했다. 또 다른 여명 출신 인사는 “우리는 역사 앞에서 정직했고, 역사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명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소련 응원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③ 10월 14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서울시 국정감사 때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이 박 시장을 몰아세웠다.

    “차기 대통령 1순위라는 얘기가 나도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인사하면 낙하산이라는 비판을 제기한다. 그런데 박 시장도 ‘보은인사’로 측근을 채용했다. (…) 오성규 서울시설공단 이사장은 2011년 당시 박원순 선거대책본부 사무처장을 지냈다. 이런 것을 낙하산 인사라고 한다.”

    박 시장은 이렇게 답했다.

    “완벽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임명하는 게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어떤 경우에도 직책을 잘 수행할 사람을 임명한다는 원칙이 있다. 오성규 이사장은 시민운동가이고, 선거를 도와준 사람인 것도 맞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업무 성과를 냈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평가가 되는 거 아닌가.”

    오 이사장은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박원순 캠프에서 사무처장을 맡았다. 박 시장의 신뢰가 두텁다고 한다. 다음은 한 정치권 인사의 주장이다.

    “2012년 총선 때 박 시장이 민주당 비례대표로 하승창 씽크카페 대표를 1순위로 지원했다고 아는 사람이 있던데, 박 시장은 오성규 이사장을 1순위로 밀었다. 그만큼 박 시장의 신뢰가 두텁다는 얘기다.”

    오 이사장은 비례대표 압축 후보 75명 명단에는 들었으나 공천을 받지는 못했다. 갓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에 입당한 박 시장의 영향력이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총선 직후인 2012년 6월 시설관리공단 사업운영본부장을 맡았고, 이듬해 6월부터 CEO인 이사장으로 일해왔다. 오 이사장이 서울시장 선거 때 사무처를 총괄했다면 서왕진 현 서울시장정책수석비서관은 정책을 총괄했다. 서 정책수석은 1기 박원순 시장 때 정책특보와 비서실장, 2기(7월 1일~ ) 때는 정책수석을 맡았다. ‘박원순 서울시’ 정책의 밑그림을 캠프 시절부터 그리며 견인해왔다. 서 정책수석도 시민운동가 출신이다. 두 사람은 시민운동가 시절 제주 해군기지 건설 중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① ② ③은 역설이겠으나 서로 무관하면서도 관련이 있다. 한 여명 출신 인사는 “넓은 의미의 여명그룹에서 박원순 진영으로 간 사람이 50명은 될 것이다. 여명 출신들이 박 시장의 ‘문고리 책사(策士)’가 됐다. ‘박원순 대통령 만들기’에서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YM도 동력을 잃었다. 거칠게 분류하면 노동 현장에 남은 부류, 생활인이 된 부류, 정치그룹으로 나뉠 수 있다. 정치그룹은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에서 시민운동을 했는데, 박원순 진영으로 간 쪽이 현재로서는 주류라고 하겠다. 노동 현장에 남은 사람 중엔 사민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 민주노총을 분석할 때 여명 출신이 온건파로 분류되더라. 서울대를 졸업한 후 위장취업해 지금껏 자동차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이도 있다. 노동조합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생활인으로서의 블루칼라가 된 것이다.”

    ‘변치 않는 꿈’

    또 다른 인사는 “박 시장 쪽에 사람들이 가 있어 YM에 대해 말하기 조심스럽다”면서 “YM운동을 한 사람들이 하나의 특정한 정치 지향을 가진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민운동, 노동운동을 계속하는 사람도 있고, 우파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박 시장 쪽에 간 이들이 잘하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A씨를 비롯해 ‘신동아’가 접촉한 여명 출신 인사들은 하나같이 기사에 이름을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변혁운동을 다룬 기사에서 여명을 찾기란 쉽지 않다. 1980년대 언론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합(인민노련), 안산민주노동자연맹(안산노련),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삼민동맹), 경기남부지역노동조합연맹(경기노련), 경수지역노동자연합(경수노련) 등과 함께 여명은 PD계열 노동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서왕진 정책수석은 여명에 몸을 담고 1992년까지 인천 남동 주물공장에서 노동자로 생활했다. 그 뒤엔 경실련 조직국, 경실련 환경개발센터에서 시민운동을 했다. 환경개발센터는 1998년 환경정의시민연대로 이름을 바꾸고 1999년 경실련으로부터 독립했다. 서울대 신문학과를 졸업한 서 정책수석은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99년 8월 4일자 ‘한겨레’ 기사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의 이력에는 변치 않는 ‘꿈’이 배어 있다. ‘사람이 살 만하게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에 인생을 바치고 싶다.’”

    서 정책수석과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A씨는 군사독재 시절 보안사 서울대생 불법 사찰 387명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이 명단엔 주사파 팸플릿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김영환 씨, 내란선동죄 등으로 징역 9년을 선고받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에서 지도한 하영옥 씨, 김기식 새정연 의원 등 NL계 인사들이 있다. 여명 관계자는 “우리 그룹은 서울대 출신이 주축이었으며 성균관대 수원캠퍼스, 한양대 등 공대 출신도 많았다”고 했다.

    오성규 이사장은 성균관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에 성균관대는 PD계열이 강했다. 오 이사장은 서왕진 정책수석의 여명 ‘직속 후배’다. 학교 조직과 경기 한 지역의 책임자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 졸업 후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해외기술영업부에서 일하다 서 정책수석의 권유로 경실련에 참여했다. 그가 참여하기 이전 여명 출신 인사 상당수가 경실련에 둥지를 틀었다. 오 이사장은 서 정책수석과 함께 환경정의가 경실련에서 독립하는 일에 앞장섰다. 환경개발센터에서 환경정의로 이름을 바꾸면서 좌(左)클릭했다는 평가도 있다.

    “꿈을 실현하자” 건배사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사회를 바꾸고 싶다”

    서왕진 서울시장정책수석비서관



    여명이 1980년대는 물론이고 최근에도 언론에 등장하지 않은 이유는 비합법조직 사건으로 검거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어서다. 한 인사는 “좋게 표현하면 주도면밀했기 때문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준비론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면서 “졸업하면 노동 현장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감옥에 갔다 온 경우는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등 개인적 차원이었다. 학생운동을 우습게 여기면서 무시한 것도 검거되지 않은 이유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학생운동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 무렵 학생운동에서는 NL이 압도적 우위를 점했다.

    1992년 1월 경찰청 보안국은 한국사회주의노동당창당준비위원회(창준위) 사건을 발표했다. 주대환 현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장), 전성 변호사(사회주의노동당 조직부장) 등이 구속됐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인민노련, 삼민동맹, 안산노련 등 3개 단체를 합쳐 창준위를 결성했다고 밝혔다. 여명도 한국사회주의노동당에 참여했으나 조직이 드러나지 않았다. 여명은 중앙위원회와 편집국(기관지 ‘여명’ 발행)을 골간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한 인사는 “중앙위원회 아래 지역 위원회, 지구, 소모임의 점조직으로 이뤄졌다. 경인라인, 수원라인은 물론이고 부산 창원 구미에도 조직이 있었다. 가명을 사용한 데다 횡적인 교류는 없고 수직적으로만 이뤄졌다”고 말했다.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사회를 바꾸고 싶다”

    오성규 서울시설공단 이사장

    비합법조직이 으레 그렇듯 라인이 다르면 서로를 알 수 없었다. 각계로 흩어진 여명 출신 인사들은 동문회 비슷한 형식의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몰랐던 실명을 알게 되고, 안면을 트기도 했다. 한 인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모임에서, 누가 들어도 ‘박원순 대통령 만들기’로 해석될 만한 건배사를 한 적도 있다. 뭐라 말은 안 했지만 시큰둥해 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우리의 꿈을 실현할 때가 왔다는 취지였다.”

    이 인사가 건배사를 했다고 밝힌 B씨는 서왕진 정책수석, 오성규 이사장과 아주 가까운 정책 전문가다. 또 다른 인사는 “친목 도모 모임으로 특별한 정치 지향은 없다. 정치적인 얘기는 별로 안 한다”고 다르게 말했다.

    “주사파 한심하게 봤다”

    여명은 PD계열 중 가장 먼저 이념적 성향을 우(右)클릭 했다. 경실련에 많이 들어가 시민운동가로 변신한 것이다. 주대환 대표, 노회찬·조승수(정의당) 전 의원이 활동한 인민노련은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에 실패한 후 1993년 결성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거쳐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다. PD가 창당한 민노당은 2004년 이후 NL이 많이 입당하면서 당권 다툼이 벌어졌다.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NL이 당권을 쥐면서 통합진보당으로 이어졌다. 노회찬·조승수 전 의원은 통진당을 나와 정의당을 창당했다.

    NL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한국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상징되듯 학생운동을 장악했다. NL은 각개 약진해 국회의원이 되거나 민노당에 입당해 PD가 만든 정당의 당권을 쥐었다. 노무현 정권에 참여한 이도 많다. 한 여명 출신 인사는 “전대협이라고 하면 지금도 학을 떼는 이가 많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모르겠지만 여명은 세련되고 모던했다. 주사파를 한심하게 봤다. 추측이지만,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옛 동지들은 선거를 하면 정의당을 많이 찍을 것 같다. 새정연도 별로 안 좋아한다. 새누리당보다 통진당을 더 싫어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 같다. 어쨌거나 박원순 시장의 성향이 여명과 잘 맞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다른 여명 출신 인사는 “1990년 민중당을 발의한 것도 우리”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살다가 생각을 바꾸기란 어렵다. 내부에 갈등이 상당히 많았다. 우리는 독일어 문헌을 바탕으로 소련 공산당이 왜 개혁, 해방에 나섰는지 서술했다. 사회주의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노회찬, 조승수 등의) 인민노련은 완강했다. 우리 쪽 여자 하나가 인민노련 쪽 남자와 사귀었는데, 그 루트로 문건이 넘어갔다. 인민노련에서도 사회주의의 문제점이 담긴 그 문건을 보고 논란이 일었다. 독일 문헌을 위조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브라질 룰라의 노동자당이 모델이라고 봤다.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여겨 경실련에 들어간 것이다.”

    1979년 12월 창당한 브라질 노동자당은 2002년 대선에서 룰라가 승리하면서 집권했다. 룰라의 정치적 후계자인 호세프 대통령이 올해 10월 26일 재선에 성공하면서 16년간 집권하게 됐다.

    주대환, 노회찬의 인민노련은 진정추를 거쳐 진보정당 운동을 한다. 이 그룹이 민주노동당 설계에 참여했으나, 이석기 의원으로 상징되는 주사파와의 당권 다툼에서 패배했다. NL과는 결은 물론이고 켜도 다르면서 진보정당 운동과도 거리를 둔, 여명이 참여한 제3의 흐름이 ‘박원순 대통령 만들기’의 후원 세력으로 이어진다.

    ‘PD→시민운동’ 그룹이 朴 주축

    여명과 안산노련은 우(右)클릭해 시민운동 대열에 합류한다. 안산노련은 ‘전성그룹’으로도 불린다. 전성그룹은 안산노련 리더인 전성 변호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전 변호사는 경실련 통일협회 연구실장으로 일하다 2007년부터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산하 조직에서 탈북인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는 경실련의 산파인 서경석 목사가 꾸린 조직이다.

    룰라의 브라질 노동자당을 대안으로 여긴 여명과 안산노련은 민중당 창당에 앞장섰다. 민중당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김문수 새누리당 혁신위원장, 이재오 의원, 이우재 전 의원이 핵심으로 참여했다. 민중당은 199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와해됐다. 민중당이 선거에 참패하면서 ‘여명+안산노련’의 상당수가 경실련을 비롯한 시민운동 단체에 투신했다. 한 인사는 “현재 김문수 지사를 돕는 이도 있다”고 말했다.

    박 시장의 측근이면서 삼민동맹 출신인 하승창 씽크카페 대표는 경실련 정책실 간사로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2000년 ‘함께하는시민행동’ 창립에 참여하면서 정부예산 및 기업 감시 활동을 했다. 서왕진 정책수석, 오성규 이사장, 하승창 대표는 기성 정치권에 참여하지 않고 풀뿌리 시민운동에 나선 PD 운동권의 한 흐름을 대표한다.

    1990년대 이석연(이명박 정부 때 법제처장을 지냈다) 사무총장이 이끈 경실련과 박원순 시장이 꾸린 참여연대는 경쟁 관계였다. “참여연대에서 박 시장과 함께 일하다 기성 정치권으로 이동한 인사(김기식 의원 등)들과 박 시장의 관계는 과거보다는 소원하다”고 한 인사는 전했다. 서왕진 정책수석, 오성규 이사장, 하승창 대표로 상징되는 ‘PD→시민운동’ 그룹이 박원순 진영의 주축이라는 것이다. 한 여명 출신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경실련 지역조직의 리더가 됐다. 26개가량의 지역조직에서 경실련 소속으로 노동운동을 했다. 지방 경실련의 책임자를 맡은 것이다.”

    시민운동으로 이동한 여명의 흐름이 경실련 노동자회에 들어가 현장조직을 견인했다. 2000년 총선 때 낙천·낙선 운동에 대한 의견 차이로 경실련은 갈등을 겪는다. 이석연 전 법제처장을 중심으로 한 ‘중앙’은 박원순 시장이 주도한 이 운동에 반대했으나 ‘현장’은 지지했다. 다음은 경실련 한 원로의 증언이다.

    “1989년 경실련이 출범했다. 1992년 민중당이 붕괴하면서 그중 3분의 1이 경실련에 들어왔다. 지역 경실련 책임자를 그 친구들이 맡았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게, 내가 떠나도 경실련이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000년 낙천·낙선 운동 때 민중당 출신들이 예전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경실련 본부는 따라가지 않았으나 지방의 경실련이 지지했다. 그것이 경실련이 무너지는 계기가 됐다. 서왕진 정책수석이 1980년대의 운동권적 사고로 되돌아가버린 대표적 인물이다.”

    기성 정치권에 들어가지 않은 여명 등의 흐름은 생활밀착형 시민운동으로 이어졌다. 문화운동, 환경운동, 협동조합운동, 작게는 공동육아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 흐름은 거버넌스에서 시민의 참여와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한다.

    서왕진 정책수석은 여명과 박 시장을 연결하는 것을 마뜩잖게 여겼다. 이른바 색깔론으로 박 시장을 깎아내리는 기사를 쓰려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언젯적 이야기를 지금 하는 건가. 그것과 이것을 왜 연관시키나. 박 시장과 무슨 상관이 있나.”

    “그게 박 시장과 무슨 상관이…”

    ▼ 변혁운동, 시민운동의 흐름을 말하는 거다.

    “과거의 특수한 것을 왜 연결하나. 박 시장을 돕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나.”

    ▼ 50명 가까운 인사가 돕는다고 한다.

    “그런 게 있으면 대단하겠다. 과거에 몸담은 것과 박 시장은 전혀 상관이 없다.”

    ▼ 모임에서 누가 듣더라도 박 시장과 관련한 건배사를 했다고 들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고 하나?”

    ▼ B씨가 건배사를 했다고 한다.

    “….”

    서 정책수석은 한동안 침묵한 후 말했다.

    “나는 모르겠다. 과거의 인연과 서울시장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팩트에 어긋나는 기사를 쓰면 문제 삼겠다. 팩트를 연결해 사실이 아닌 흐름을 만드는 일도 없으면 좋겠다.”

    “사회를 디자인하겠다”는 박 시장과 “사람이 살 만하게 사회체제를 바꾸고 싶다”는 서 정책수석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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