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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도 빈자도 가난한, ‘현대화한 빈곤’의 재앙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부자도 빈자도 가난한, ‘현대화한 빈곤’의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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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도 빈자도 가난한, ‘현대화한 빈곤’의 재앙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느린걸음

현대인은 어디서나 감옥에 갇힌 수인이다.

시간을 빼앗는 자동차에 갇히고,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에 잡혀 있고,

병을 만드는 병원에 수용되어 있다.

사람은 기업과 전문가가 만든 상품에 어느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잠재력이 파괴된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아주 가끔 정전이 일어날 때, 전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더울 때는 에어컨에 의존하고 추울 때는 전기담요에 의존할 뿐 아니라, 한밤중에 전기가 끊기면 집에 상비해둔 양초를 찾는 데도 휴대전화 불빛을 동원하곤 한다. 전기를 대신하기 위해 또 다른 전기, 비축해둔 또 다른 전기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 휴대전화 불빛마저 없으면 한밤중에 우리는 어떤 감각에 의지해야 할까.

현대화한 가난

수도가 끊길 때도 마찬가지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으면 삶이 멈춘다. 샤워를 하고 세수를 해야 외출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답이 없다. 인근에서 병원을 찾기 힘든 외딴곳에서 살아보면 ‘혹시나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불안을 늘 껴안고 살아가야 한다. 장 보는 것을 잊어버린 어느 날, 텅 빈 냉장고 앞에서 절망하며 배달 음식점의 전화번호를 더듬더듬 찾는 아침의 비참함이란.

우리는 우리의 건강, 생활, 심지어 생존 자체를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돈’이라는 매개 없이는 어떤 활동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것일까.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바로 이런 인간의 무력함을 ‘현대화한 가난’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가난은 빈민계층뿐 아니라 부자들에게도 만연한 가난이다.

혼자서는 생계 자체를 꾸려갈 수 없다는 것, 몸이 아프거나 심지어 밥 한 끼를 차려 먹을 때도 반드시 돈을 통한 ‘교환’에 의지해야 하는 현대인의 가난은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혼자의 몸으로 살아갈 힘과 의지와 자유’를 상실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좀 더 뿌리 깊은 가난이다. 즉 돈이 있더라도 현대인은 쉽게 무력해진다.

‘돈만 있으면 다 된다’는 식의 논리 자체가 현대인의 무력함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돈이 있어야만’ 무언가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돈에 대한 만인의 의존증을 나타내는 것이니.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나 대재난이 일어나 돈이 있어도 마트에서 음식물을 살 수 없게 된다면, 그 순간엔 시골의 논밭에 쳐들어가 농민의 피땀 어린 곡식을 약탈해 올 것인가. 우리는 ‘돈이 없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것보다는 삶을 내 힘으로 꾸려갈 총체적인 능력을 잃어가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닐까.

세상과 접신하는 법

이반 일리치는 바로 이 현대화한 가난이야말로 ‘재화의 결핍으로 인한 가난’이 아니라 ‘지나친 풍요에 질식된 가난’임을 직시한다. 부자조차 결국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 집단적 무력감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 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소비를 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게 돼버린 우리는 다시 ‘내 몸으로, 내 맘으로 세상과 접신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탈리아나 미국, 프랑스 또는 벨기에에서는 시민 두 명 중 한 명이 십여 명의 의료전문가를 동시에 만나서 치료를 받고, 조언을 듣고,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는다. 전문 치료의 대상은 대개 치아, 자궁, 감정 상태, 혈압, 호르몬 수치 등, 환자 본인은 평소에 느끼지 못하고 사는 문제들이다. 지금은 더 이상 환자가 소수가 아닌 시대가 되었다. 거꾸로 아무런 환자 역할도 맡지 않는 사람이 소수자이며 사회 이탈자가 된다. 이들 소수 집단은 빈곤층이나 농민, 최근에 들어온 이민자 등 온갖 잡다한 인간들로 이뤄져 있다. (…)

20년 전만 해도 병원에 가지 않는 게 건강하다는 증거였고 바람직하게 여겨졌다.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환자가 아닌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거나 이상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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