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심 승소, 대법원 판결은 엇갈려
- 대리 베팅, 출입제한 규정 위반이 쟁점
- 3년 만에 360억 날린 ‘샐러리맨 신화’
- 소송 벌이다 자살한 부동산 재벌
- 강원랜드 “판결 존중…환경개선 등 긍정적 효과도”
병정들은 정씨를 따라 기계적으로 돈을 걸었다. 정씨가 뱅커에 걸면 뱅커에, 플레이어에 걸면 플레이어에 1000만 원씩 베팅했다. 물론 모든 판돈은 정씨의 것이었다. 병정들은 대리 베팅 대가로 100만 원 정도의 수고비를 받았다. 그러다 10억 원이 넘는 돈을 잃은 정씨에겐 ‘반까이(만회)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우리 딸이 죽었어요…”
계속 돈을 잃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딸이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순간 정씨는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돌렸다. ‘가야 하나?’ ‘그럼 오늘 잃은 돈은?’ 짧은 고민 끝에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간다고 죽은 딸이 살아나나.’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슬펐지만, 게임에 집중할 용기가 생겼다. 그날 정씨는 카지노에서 밤을 새웠다.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벌써 8년 전 얘기네요. 생각하면 기가 막히죠. 눈물도 안 나옵니다. 딸이 죽고 얼마 안 돼 전 재산을 다 날렸어요. 장례식도 못 본 딸에게 미안해 죽지도 못해요.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 딸을 만나러 갈 용기가 나질 않네요.”
정씨는 한때 연매출 1000억 원이 넘는 피혁회사 S실업을 운영했다. 수출을 많이 해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도 받았다. ‘샐러리맨 성공신화’로 언론에도 여러 번 소개됐다. 2003년 봄, 정씨는 국회의원인 어릴 적 친구를 따라 강원랜드에 놀러 갔다가 처음 카지노 게임을 경험했다. 신기했다. 카드를 만지면 방망이가 가슴을 때렸다. 카지노를 오가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돈을 잃을수록 더 자주 갔다.
그는 2006년 10월까지 3년반 동안 500번 넘게 강원랜드를 찾았다. 최소 2억 원을 가져야 들어갈 수 있는 예약실에 226번 입장했다. 9만8000번 정도 베팅하며 360억 원을 잃었다. 본인과 가족이 여러 번 출입제한을 요청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예약실에든 일반 회원영업장에든 그는 언제나 병정들을 데리고 다녔다. 병정을 통한 대리 베팅이 불법인지 몰랐다. 회원영업장에선 누구나 병정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정씨는 “대리 베팅이 불법이란 사실을 안 직후 소송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정씨가 소송을 낸 건 2006년 11월이다. 2년 뒤인 2008년 11월, 1심 법원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강원랜드가 정씨에게 피해액 중 20%(28억여 원)를 돌려줘야 한다”고 판결했다. 소송을 시작한 직후 정씨는 도박피해자 모임 ‘세잎클로버’를 만들어 지금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 세잎클로버 회원은 4000명에 달한다. 2011년에는 자신의 경험담과 소송 과정을 정리한 책 ‘대한민국에 정의를 묻다’도 펴냈다. 정씨는 “남은 인생을 도박 문제 해결에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8년 만의 패소
정씨의 승소 소식이 전해지자 비슷한 소송이 줄을 이뤘다. 수십억 원, 많게는 1000억 원 가까운 돈을 잃었다는 사람도있었다. 소송은 한때 20건이 넘었다. 그 중 10건을 정해원 변호사가 맡았다(상자기사 참조). 정 변호사가 맡은 사건의 피해금액을 모두 합하면 4000억 원에 육박한다.
소송의 쟁점은 다음 3가지였다. △강원랜드는 도박중독자 보호 책임을 다했나 △강원랜드가 불법인 대리 베팅 사실을 알고도 묵인 방조하거나 조장했나 △강원랜드가 본인 혹은 가족의 출입제한 요청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했나.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을 법인인 강원랜드에 물을 수 있는가 하는 민법 해석의 문제도 중요 쟁점이 됐다. 강원랜드는 고객의 도박중독 사실을 알기 어렵고, 대리 베팅 사실은 몰랐으며, 출입제한 규정은 모두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대체로 도박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물론 ‘자기책임의 원칙’을 적용해 배상 금액을 피해금액의 15~30%로 제한한 판결이 많았다.
강원랜드에서 3년 반 동안 360억 원가량을 잃은 정덕 씨의 게임 기록 중 일부. 이름 바로 옆이 승패. 그 옆은 게임시간이다. 2005년 4월 14일 정씨는 14시간 33분 게임을 해 24억여 원을 잃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한 달 뒤인 9월 25일, 이와 비슷한 2건에 대해 대법원이 판결을 내렸다. 이번엔 1승 1패였다. 비슷한 사건인데 대법원의 판단은 갈렸다. 이들 3건의 판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법원의 견해를 정리하면 이렇다.
“강원랜드에서 벌어진 불법행위에 대한 (주)강원랜드의 책임은 인정할 수 없다. 강원랜드가 도박중독자를 보호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충분치 않다. 대리 베팅은 불법이지만, 고객도 불법임을 알고 했기 때문에 고객의 자기책임이 더 크다. 본인이나 가족이 출입제한을 요청했을 때 일정 기간 상담치료 등을 받도록 해야 하는 규정을 어긴 것에 대해서는 강원랜드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강원랜드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사람 대부분은 재벌 규모의 재산을 가졌던 ‘회장님’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길게는 7~8년, 짧게는 3~4년 사이에 전 재산을 잃었다. 게임 기록에는 이들이 매번 얼마를 잃고 땄는지, 몇 시간 동안 게임을 했는지가 나와 있다. 같이 게임을 한 사람들의 기록도 있어 진짜 고객이 누구이고 병정이 누구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병정들의 게임 승패는 대부분 0으로 처리돼 있다(그림 참조). 수년 전까지만 해도 강원랜드는 회원영업장 고객의 게임 상황을 날짜별로 기록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14시간에 25억 날려
강원랜드를 상대로 첫 소송을 제기했던 정씨의 자료를 보자. 자료에 따르면 정씨는 한 달에 보통 열흘가량 강원랜드에서 게임을 했다. 16~17시간씩 쉬지 않고 게임을 한 날도 허다하다. 14시간 동안 게임을 하며 25억 원을 잃기도 했고(2005년 4월), 2시간 만에 15억 원 넘는 돈을 따기도 했다(2006년 8월). 게임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해 금액이 대체로 커졌다. 하룻밤에 10억 원 넘게 잃은 날만 16일이나 된다.
정씨의 뒤를 이어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충청지역에서 건설·부동산 사업을 하던 이모 씨. 강원랜드에서 200억 원이 넘는 돈을 잃은 이씨는 1심 재판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씨의 지인은 “자살 직전 이씨가 소송에서 질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고 전했다. 한때 빌딩 여러 채를 소유했던 이씨는 목숨을 끊을 당시 재산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세 번째 소송에 나선 사업가 김모 씨는 2003년부터 약 4년간 180여 회 강원랜드를 출입했고 200억 원 넘게 잃었다. 본인과 가족이 4번이나 출입제한을 요청했는데, 강원랜드는 관련 규정을 어기고 다시 출입을 허용해 피해를 키웠다. 김씨 역시 병정을 이용해 대리 베팅을 했다. 2011년 5월 고등법원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2008년 11월 소송을 제기한 사업가 박모 씨는 현재 강원랜드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인 피해자 중 도박 금액이 가장 큰 경우다. 2004년부터 4년간 700억 원이 넘는 돈을 잃었다. 박씨는 1심에서 (강원랜드가) 피해 금액의 15%를 돌려주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2심에서 패소했고 현재 대법원 판단을 기다린다. 2심 재판부는 “대리 베팅은 불법이지만 원고 또한 이를 충분히 인지했기 때문에 강원랜드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병정을 몰랐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박씨는 어린 시절부터 사업을 시작, 한때 연매출 5000억 원 정도의 대기업을 일군 인물이다. 그의 회사는 비(非)서울권 건설업체 중 5~6위 규모에 이른 적도 있다. 계열사도 여러 개였다. 박씨는 2002년 검찰의 공적자금비리 수사 때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공적자금비리 수사팀에 청탁해 횡령 등 혐의를 무마해주는 조건으로 유명 사찰의 비구니에게 무려 9억 원을 건넨 사실이 드러나 눈길을 끌었다. 박씨는 강원랜드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던 2010년경 경남 지역에 2조 원 규모의 대형 산업단지 조성사업을 시작한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씨 소송 당시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전직 강원랜드 직원은 강원랜드의 주장을 뒤집는 증언을 해 논란이 됐다. ‘병정의 존재를 몰랐다’는 강원랜드의 그간 주장이 이 증언으로 깨졌다. 이 증언은 이후 다른 재판에서도 중요한 증거로 쓰였다. 다음은 그의 법정 증언 중 일부.
“강원랜드 카지노에는 자기 돈으로는 게임을 하지 않고 남을 위해 남의 돈으로 대리 베팅만 해주는 병정이 상주한다. 병정을 동원한 대리 베팅이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빈번해 고객은 물론이고 강원랜드 직원들도 병정의 존재나 용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강원랜드에서 360억 원을 잃은 뒤 소송을 시작한 정덕 씨. 그는 현재 도박피해자 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다.
문씨는 한 지방 도시에서 유명한 냉면집을 운영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이후 부동산 사업에도 뛰어들어 수백억 원의 자산가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부터 약 3년간 강원랜드를 211회 출입하며 60억 원이 넘는 돈을 잃었다.
2010년 5월 소송을 시작한 오모 씨는 재계의 풍운아로 불리던 인물이다. 대전 모 백화점 설립자인 고(故) 오OO 회장의 장남으로 40대 초반에 부회장을 맡아 1990년대 중반까지 백화점과 대형마트를 운영하며 대전지역 유통업계를 쥐락펴락했다. 1997년 9월에는 한강 이남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알려진 백화점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해 8월 오씨는 당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된 부유층 해외 원정도박 사건으로 구속됐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한판에 최고 3만 달러짜리 도박을 벌여 30억 원가량을 잃었다. 환치기 수법으로 도박자금을 미국으로 빼돌린 정황도 드러났다. 당시 사건에는 오씨 같은 기업인, 언론사 사주, 폭력조직 두목 여○○, 판사 출신 변호사 홍○○, 개그맨 장○○, 가수 양○○ 씨 등이 연루돼 화제가 됐다.
소송 기록에 따르면, 오씨는 2000년대 초반 스몰카지노 시절부터 강원랜드를 출입하며 200억 원 정도를 잃었다. 그 역시 매번 병정을 대동했다. 2010년 12월 1심에선 일부 승소했지만 이듬해 고등법원에서 패소했다. 본인이 직접 소송에 나서지 않고 채권양도 방법으로 지인을 통해 소송신탁을 한 게 문제가 됐다. 오씨는 2심이 진행 중이던 2011년 6월 췌장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했다. 그의 지인은 “사업 실패, 도박 문제 등으로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고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고 전했다.
소송 중 강원랜드와 조정을 하고 소를 취하한 사람도 있다. 강원랜드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 10명 중 유일한 여성인 최○○ 씨다. 최씨의 피해금액은 20억 원 정도로 그 가운데 가장 적었다.
잠재적 도박중독자 줄어
소송을 진행하면서 고소인들은 강원랜드에 게임 기록 제출을 요구했다. 처음 정씨 사건이 진행될 때만 해도 강원랜드는 게임 기록을 순순히 내놨다. 그러나 소송이 진행되면서 강원랜드가 자료 제출에 소극적이었다고 당사자들은 주장한다. “병정의 존재를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로 쓰인 게 이유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씨 이외의 도박피해자들의 경우 강원랜드가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병정의 존재를 입증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진짜 고객과 병정의 게임 시간 등이 거의 일치하고, 병정의 승패가 대부분 0으로 기록된 정씨 기록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의 경우 진짜 고객과 병정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정씨는 강원랜드가 자료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정씨는 “내가 1심에서 이긴 뒤 강원랜드는 우리나라 최고 로펌인 김앤장을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이때부터 재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자료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8년 동안의 소송으로 도박피해자들과 강원랜드는 피차 지칠 대로 지쳤다. 대법원에서 앞으로 어떤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당장 원고 패소 판결로 끝난 정씨는 파기환송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 변호인을 선임, 재도전에 나섰다.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10건의 소송이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도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원고인 도박피해자들이 도박을 끊은 것, 잠재적 도박중독자 수가 줄어든 것이 가장 큰 효과다. 소송이 줄을 이루자 강원랜드는 회원영업장의 운영 및 게임 방식을 바꾸는 변화를 시도했다. 병정이 생긴 주요 원인인 1인당 베팅 상한을 없애고 대신 ‘디퍼런스 룰’을 적용해 병정의 존재 이유를 없애버렸다.
디퍼런스룰은 1인당 베팅 상한선이 아닌 뱅커와 플레이어간 베팅액 차이만 규제하는 바카라 게임 방식이다. 현재 강원랜드 VIP실의 디퍼런스는 3000만원이다.디퍼런스 룰이 사행성을 더 높인다는 의견도 있지만 어쨌든 병정을 없앤 것은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강원랜드 관계자들에 따르면 회원영업장을 자유롭게 드나들던 사채업자들도 대부분 사라졌다고 한다. 강원랜드 측은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 10건의 소송은 강원랜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좀더 고객 중심적이고 선진화한 카지노로 나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자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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