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호

1000년 유물 도굴 ·약탈 서방국 장물로 전락

내전으로 유린되는 시리아 문화유산

  •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 PD

    입력2014-11-20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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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이자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시리아는 나라 전체가 유적이다. 바빌로니아부터 오스만튀르크 시대까지, 온갖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하지만 지난 4년간의 내전으로 많은 유적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정부군, 반군 할 것 없이 굴삭기로 유적을 파내 전쟁비용을 마련했다. 장물로 전락한 유적은 서방세계에서 불티나게 팔린다.
    터키 남부 국경도시 칼리스의 시리아 난민촌에서 만난 바하(가명, 39)씨는 며칠째 난민 텐트 안에서 이름 모를 병으로 신음한다. 아내와 네 아이, 그리고 노모까지 건사해야 하는 그는 돈이 없어 약도 한번 써보지 못했다.

    바하 씨는 3년 전만 해도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세 개의 사무실을 갖춘 제법 큰 여행사 사장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단체 여행객들을 시리아 곳곳의 관광지로 보내고 그들의 교통수단과 호텔 예약, 식사 등을 준비해 외국 여행객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그는 “직원들과 함께 멋진 양복을 입고 공항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의 관광객을 마중했다. 사무실에는 10여 명의 직원이 있었고 전국 각지에 우리 회사와 협력하는 여행업체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살던 단독 2층집은 다마스쿠스에서 꽤 잘사는 지역에 있었다. 그의 가족은 치자꽃 향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정원을 특히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시리아 내전을 피해 국외로 빠져나온 피난민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박물관

    시리아는 우리나라가 국교를 맺지 않은 유일한 중동국가다. 그래서 자주 접할 수 없었지만, 나라 전체가 박물관 같은 곳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인 시리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이며 바빌로니아부터 오스만튀르크 시대의 유적이 나라 전체에 즐비하다.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6점을 비롯해 수백 점의 고대·중세 유적이 있다.



    특히 다마스쿠스에서 북동쪽으로 200여㎞ 떨어진 중부 사막지대 한가운데의 고도(古都) 팔미라 유적지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솔로몬 왕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팔미라는 무역으로 번창한 도시로 사막 한가운데 신비로운 풍경을 그대로 간직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또 로마제국 원형극장 중 보존이 가장 잘됐다는 보스라 지역의 야외 원형극장과 산 정상에 견고하게 축성된 ‘크락 데 슈발리에 십자군 성채’ 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유명 관광지다.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 장소로도 인기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말에서 떨어진 자리에 만든 낙마교회 등 성서 유적지와 예수 시대의 언어인 아람어가 사용되는 도시 마룰라도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보고 싶어 하는 역사적인 성소(聖所)다. 이슬람교도에게도 시리아는 특별한 존재다. 비잔틴 시대 때 교회로 사용됐다가 이슬람제국이 들어선 이후 모스크로 개조된 우마야드 사원은 이슬람 신자들에게도 신성한 장소다.

    종교적인 관광지를 제외해도 수도인 다마스쿠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속(Soq)이라 불리는 고풍스러운 느낌의 재래시장을 보면 필자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도시로 날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가는 곳마다 유적지, 보는 것마다 유물이라 할 만큼 시리아 전역은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유적 향해 포격

    예전의 시리아는 북한처럼 아주 폐쇄적인 국가였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 이란 등과 함께 ‘악의 축’ 국가로 꼽은 나라다. 일단 시리아에 입국하면 ‘외국인=미국의 스파이’라는 취급을 받아 곳곳에서 감시의 눈길을 받아야 한다. 국가기관의 정보원이 관광객들에게 따라붙는다. 필자가 취재비자로 입국할 때도 북한에서처럼 항상 정보원이 따라 다니며 취재 활동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했다.

    하지만 2000년 바샤르 알 아사드가 대통령에 오른 뒤부터 시리아는 달라졌다.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에 오른 그는 비록 독재 정치를 했지만 영국에서 성장한 엘리트에 안과의사 출신이라 서구문화에 익숙한 지도자였다. 그는 미국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며 시리아를 관광 국가로 거듭나게 하려고 정부 차원에서 많은 지원을 했다. 걸프 국가 등과 비교해 석유와 가스 매장량이 적은 시리아는 이 자원들을 대체할 산업으로 관광산업을 눈여겨보게 됐다. 시리아 전역의 주요 유적지와 시가지를 정비하고 호텔을 신축했고 교통편의시설을 늘렸다. 또 폐쇄된 국가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의 공항 입국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관광 국가의 면모를 갖춰갔다.

    2008년 고고학자들이 1200년 전 교회의 잔해를 시리아 중부에서 발굴하면서 이런 분위기는 한층 고조됐다. 이는 지금까지 시리아에서 발견된 교회 유적 중 가장 큰 규모였다. 다마스쿠스에서 동북쪽으로 약 245㎞ 떨어진 시리아 중부 팔미라에서 발견된 이 교회는 8세기경 지어진 것으로 이 지역에서 발굴된 4번째 교회였다. 기초 부분이 가로 47m, 세로 27m이고, 기둥은 약 6m에 달했던 것으로 보이며 지붕까지의 높이도 15m에 달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고대 문화유산을 보러 시리아로 몰려들었다. 시리아 전역의 주요 유적지에서는 이웃 아랍권 국가들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덕분에 시리아는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도 2008년 대비 15% 늘어난 367만 명의 관광객을 2009년에 끌어들여 49억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2009년에는 전년 대비 26% 늘어난 유럽 관광객에 힘입어 유엔 세계무역기구(WTO)가 발표한 전체 관광객 증가 부문 순위에서 세계 4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1년 2월,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혁명이 시작됐다. 시리아 전역이 정부군과 반군의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그러자 외국 관광객 대부분은 여행을 취소했다. 유적지는 관광지에서 전쟁터로 변했다.

    11세기 십자군전쟁 당시 이슬람 술탄 살라딘의 공격도 잘 버텨냈던 크락 데 슈발리에 성(城)은 건립 1000년 만인 지난 2012년 5월 시리아 정부군의 포격으로 성채 안쪽 일부가 파괴됐다. 이 성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실제 주인공인 영국군 장교 토머스 로렌스가 “십자군 유적 중 가장 잘 보존된 곳”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곳이다. 반군이 이 성으로 숨어들자 정부군은 바로 성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당시 이 광경을 목격한 한 주민은 “성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군과 반군 양쪽에 사정했으나 거부당했다. 이곳 주민 상당수는 성 주변에서 기념품도 팔고 안내도 해 먹고살았다. 하지만 전쟁 이후 우리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성 주변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자그마한 식당을 하는데 우리의 생계도 문제지만 1000년을 버틴 유적이 사라지는 것을 우리 시대에 봐야 한다는 게 너무 슬퍼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시리아 유적의 대표 격인 팔미라의 사정은 더 기막히다. 팔미라 유적들 사이사이 정부군 탱크가 배치됐다. 로마 유물이 있는 지하에 참호를 파고 전투 태세를 갖췄다. 팔미라 기둥 뒤에서 총을 쏘고 엄호하며 반군과 전투를 벌였다. 아직 피해 규모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기둥 곳곳에 총탄 자국이 나고 잘못하면 기둥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시가전 잦아 피해 키워

    한 시리아 고고학자는 정부군의 포격으로 텔셰이크하마드의 고대 아시리아 사원이 파괴됐고 십자군 요새였던 알마디크 성의 망루도 무너졌다고 증언했다. 십자군이 쓰던 망루가 시리아 내전에서도 고스란히 망루로 쓰이다 파괴된다는 것이다.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는 알레포에선 우마야드 사원의 첨탑이 무너졌다.

    양측은 이 사고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공방을 전투만큼이나 치열하게 벌였다. 시리아 정부의 국영 SANA통신은 알카에다와 연계한 ‘알누스라 전선’이 이 첨탑을 파손했다고 주장했다. 시리아 정부 관광부의 한 관리는 “반군이 첨탑 안으로 들어가 주요 시설을 부수고 망루를 만들었다. 그들이 먼저 첨탑을 훼손했다”고 말했다.

    반면 반군은 정부군 탱크의 포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전투 중 정부군이 우리를 첨탑 쪽으로 몰았고 수세에 몰린 우리는 첨탑 안으로 피신한 것뿐이다. 이어 첨탑 주변에 정부군의 탱크가 모여들었고 포격을 시작했다. 첨탑이 무너진 것은 우리도 가슴 아프다. 우리 군인들 중에는 전쟁이 나기 전 이 사원에서 안내 일을 하던 사람도 있다. 그러니 어떻게 슬프지 않겠는가….”

    어느 측의 말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1000년을 버텨온 첨탑이 파괴됐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유적 훼손이 심해진 것은 유독 시가전이 잦은 시리아 내전의 특징 때문이다.

    일반 시민군으로 구성된 반군은 정부군에 비해 화력이 떨어진다. 반군은 정부군 탱크와 헬리콥터에 맞서기 위해 골목이 좁은 구시가에서 교전을 벌인다. 그러다보면 시가 한가운데 있는 유적지가 반군의 주요 거점이 된다. 정부군도 반군과 마찬가지로 구시가에서 가장 큰 사원이나 성채를 거점 삼아 반군에 대응한다. 이런 양측의 격전으로 시내 중심에 위치한 유적지가 남아나지 않게 된 것이다.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가 치열한 시리아 북부 도시 알레포는 2세기쯤 형성된 고도(古都)다. 유서 깊은 이 도시에서 연일 벌어진 양측의 전투로 도시 곳곳이 파괴됐다. 시리아 최대 비잔티움 시대 가톨릭 유적인 성 시메온 성당은 군 훈련기지로 이용되면서 반군의 집중 폭격을 받아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마야드 사원의 붕괴 소식도 전 세계 이슬람 신자들에게 충격을 줬다. 우마야드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200여 개 이슬람 사원 중 가장 크고 유명하다. 시리아뿐 아니라 아랍권을 통틀어서도 매우 크고 아름다운 사원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런 사원이 무너진 것은 시리아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시리아 남부 다라 지역에서는 7세기에 세워져 이슬람 역사상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적인 오마리 사원의 첨탑이 포격을 당해 부서졌다. 이 사원은 2011년 2월 시리아에서 민주화 시위가 촉발됐을 때 맨 처음 시위가 일어난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동안 반군의 주요 활동 거점이었다.

    ‘사람 형상’ 유물 골라 파괴

    시리아에서 이슬람국가(IS)가 활개를 치기 시작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현재 IS가 수도로 정한 시리아 북부 라카는 고고학 발굴 지역으로, 여기에도 유서 깊은 유적이 산재한다. 1월 말 IS 대원들은 이곳을 수도로 정하자마자 6세기 비잔티움 시대의 모자이크 그림들을 모아놓고 폭탄을 터뜨려 모두 파괴했다. 이슬람교가 금지하는 사람 얼굴 형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2007년, 신화를 소재로 한 이 모자이크 그림들이 발굴될 당시, 고대 로마의 모자이크 제작 기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다 보존 상태도 매우 좋아 전 세계 고고학계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당연히 라카에 박물관을 지어 모자이크 그림들을 보존하는 방법을 논의했고 지역 주민들은 관광지에서 새로운 일을 찾으려는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터키의 한 부호가 이곳을 방문해 구매 의사를 타진하고 돌아간 뒤, IS가 이 모자이크 그림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IS는 샤슈 함단에서 로마 시대 공동묘역의 인물 조각상들과 알카토라 지역의 조각상도 폭탄으로 파괴했다. 이유는 같았다. 유물이 사람의 얼굴 모양이라는 것.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IS뿐 아니라 알카에다 연계조직인 알누스라 전선 반군들도 인간 형상을 한 유물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한다. 시리아 문화재 총괄책임자인 마문 알둘라림은 영국 ‘인디펜던트’지 인터뷰에서 “극단 이슬람 세력으로 인해 많은 유물이 위험에 처했다. 내전이 지속될 경우 초기 기독교 시대의 십자가 조각과 로마시대 조각상, 신화 속 신들을 소재로 한 비잔티움 시대 모자이크 그림들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투 후 조직적 도굴

    파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약탈이다. 수십 년간 문화재 도굴 및 밀수업자로 활동했던 마이클 반 리진은 10월 독일 공영방송 ARD에 출연해 “서구의 부호, 문화재 수집가들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도굴된 유적들을 사들이는 일이 IS에 막대한 자금을 대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밝혀 충격을 줬다.

    최근엔 이들이 굴삭기 등을 동원해 문화재를 파낸 뒤 암시장에 판다는 소문도 들린다. 크락 데 슈발리에 성이 무너진 뒤 정부군인지 반군인지 모를 무장 군인들이 들이닥쳐 문화재를 마구 약탈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시리아 인근의 터키, 이라크, 레바논 등지에서도 전문 약탈꾼들이 몰려든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문화재 브로커들이 시리아 국경에 진을 쳤다는 소문까지 들릴 정도다. 시리아 북부 홈즈에서 문화재 관리청 직원으로 근무하는 야시프 씨는 “지금 시리아에서는 삽과 굴삭기만 있으면 수천억 달러짜리 유물을 얼마든지 건질 수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라며 한탄했다. 다마스쿠스대 고고학 교수는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가 끝나면 하이에나처럼 나타난 전문 도굴꾼들이 굴삭기를 가동한다. 이 장면은 시리아 내전에서 가장 보편적인 전투 후 광경이 됐다”고 증언했다.

    1~7세기 로마 유적이 많은 서부 아파메아의 피해도 막심하다. 정부군과 반군 아무도 유적 관리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도굴꾼들이 활개를 친다. 굴삭기를 이용해 신전 바닥에 깔린 로마 시대 모자이크화(畵)를 떼어가고 돌기둥 위에 서 있던 조각상까지 훔쳐갔다.

    2003년 이라크전쟁 중 벌어진 바그다드 박물관 약탈사건 조사단에 참여했던 레바논 고고학자 조앤 파르차흐는 시리아의 상황을 이라크전 당시와 비교하며 “절망적이다. 최근 터키와 요르단의 장물시장에 시리아 유물이 쏟아진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군 반군 할 것 없이 유물을 노린다”고 했다. 암시장에 유물을 팔아 군자금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도 자금 조달을 위해 도굴에 뛰어들었다는 소문이 들린다.

    시리아에서 도굴된 문화재들은 밀수업자들에 의해 터키, 레바논 또는 인근 걸프국의 시장으로 넘어가 세탁 과정을 거친 뒤 서구에서도 판매된다. 독일 NDR 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밀수업자들은 IS 등 무장조직이 불법적으로 발굴한 문화재에 ‘가짜 증명서’를 달아 도굴품이라는 사실을 숨긴다. 일부 도굴꾼의 경우 서구 수집가들의 취향을 고려해 고대 기독교 예술 작품이나 그리스·로마 시대 유적을 집중적으로 노린다.

    이렇게 해서 암암리에 흘러나온 시리아의 유물은 미국, 독일 등의 유명 경매장에서 당당히 거래된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ITC) 자료에 따르면 2011~2013년 미국의 시리아 문화재 수입 금액은 145%가량 증가했다. 미국 소비자에게 판매된 각종 문화재의 대다수가 내전 기간에 도굴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다.

    시리아의 한 고고학자는 “시리아 정부를 통해 공식적으로 나간 문화재는 단 한 점도 없다. 지금 뉴욕 경매장에 시리아의 유물이 나온다면 이는 모조품이거나 도굴된 문화재가 확실하다”고 말했다.

    ‘세계의 비극’ 된 내전

    4년이 다 돼가지만, 시리아 내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공습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전쟁이 확대되는 양상이다. 시리아의 관광업은 사실상 끝난 거나 다름없다. 바샤르 자파리 유엔 주재 시리아대사는 2012년 193개 유엔 회원국에 보낸 서한에서 호텔 객실 점유율이 시리아 분쟁 이전의 90%에서 15% 이하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자파리 대사는 “긴장감이 높은 도시나 지역은 관광산업이 완전히 붕괴했다. 호텔은 문을 닫았고 관광객 유치는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레스토랑과 휴게소, 레저 시설에도 관광객이 끊겨 문을 닫았다고 한다.

    자파리 대사의 발언은 그나마 2년 전 데이터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후에는 집계조차 되지 못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시리아에 관광객이 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 여행 관련 웹사이트에 시리아 여행은 불가능하다고 명시됐고, 시리아행 여객기 노선도 많이 중단됐다. 2009년 의욕적으로 출발했던 시리아의 관광산업이 말 그대로 초토화한 것이다.

    관광산업 종사자는 거의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다마스쿠스에서 관광객에게 인기가 있던 호텔은 유령 건물이 됐다. 팔미라나 라카에서 관광객을 낙타에 즐겁게 태워주던 낙타몰이꾼들은 시리아 인근 국가의 난민촌을 전전한다.

    앞서 소개한 바하 씨의 경우도 비극적인 사례다. 직원은 해고됐고, 집도 파괴됐다. 피신을 갔던 북부 알레포도 정부군의 폭격으로 마을 전체가 날아갔다. 그는 결국 가족을 데리고 난민촌으로 들어왔다. 병까지 얻어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바하 씨는 “잘나가던 여행사 사장에서 비참한 난민으로 전락하기까지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다 해도 유적지가 다 파괴된 마당에 무슨 관광업을 하겠는가”라며 초점 없는 눈빛으로 필자에게 겨우 말을 건넸다.

    언젠가 시리아 내전이 끝나고 국민이 다시 시리아로 돌아온다 해도 전쟁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1000년의 세월을 견디다 파괴된 유적을 복구하기도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 내전은 세계적인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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