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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한 나’에서 ‘맞서 싸울 수 있는 나’로

성폭력·스토킹·‘바바리맨’

  • 최지나 한국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

‘무력한 나’에서 ‘맞서 싸울 수 있는 나’로

‘무력한 나’에서 ‘맞서 싸울 수 있는 나’로

지난해 11월 22일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원회가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1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20대 대학생 최안전 양은 취업 준비로 한밤중에 귀가하는 날이 많다. 그녀는 한 달 전 귀갓길 여성을 납치해 강간한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후 귀가 시간이 가까워올수록 걱정이 많다.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골목길은 그 시간이면 오가는 사람이 없어 한적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버스정류장으로 마중 나오도록 부탁드려봤지만 매일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양은 고민 끝에 호신용품을 구매했지만 밤길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성폭력을 두려워하지만 정작 내가 성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안전불감증’이라는 말을 성폭력에도 붙일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필자가 성폭력 예방을 주제로 한 강의에서 만나는 시민 대부분이 ‘성폭력 가해자는 평소에 알고 지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통계치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피해자가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상의 어떤 일과 마찬가지로 나도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성폭력은 그 특성상 범죄가 아닌 ‘사적인 스캔들’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기에 어쩌면 내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다른 범죄보다 더 높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 주변 사람을 모두 의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성폭력 가해자 대부분이 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어떤 ‘위험 신호’가 느껴질 때 그 직감을 믿는 것이 좋다.

대학생 A양(여·21)은 얼마 전 동아리 선배 B군에게 겪은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 중이다. 동아리 회장이던 B군은 총회 뒤풀이 자리에서 A양을 호프집 밖으로 불러내어 강제로 키스하고 추행했다. 다음 날 A양은 B군에게 사과를 받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여자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여자선배는 A양에게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 피해 여학생이 동아리를 그만둔 적이 있다. 그러니 앞으로 조심해라’고 말했다. A양은 B군의 여자친구인 학과 동기를 생각해서 조용히 사과 받고 넘어가려 했지만 B군의 행동이 상습적이라는 생각에 두려워졌고 그를 처벌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 사례에서 B군의 행동은 단순한 술버릇이 아니라 성추행에 해당된다. 다른 여자 친구들도 자신과 같은 성폭력 피해를 겪을지 모른다는 A양의 두려움은 B군의 행동에 비춰 사실일 가능성이 큰 직감이다.

이 사례처럼 대학 내 술자리에서 학생 간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술버릇이니까’ 혹은 ‘평소에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앞으로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까’ 이런 생각으로 가해자의 ‘허물’을 덮어주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만약 이와 같은 부적절한 성적인 행동에 대해 ‘술버릇쯤은 봐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면 그 동아리 안에서 성폭력 해결은 어려울 것이다. ‘이런 행동쯤은 괜찮다’는 생각이 공동체 안에서 성폭력을 방기하는 문화를 만든다. 만약 이 사례에서 A양이 용기 있게 동아리 구성원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을 때 동아리 구성원들이 묵인하려 한다면 학교의 성폭력상담실이나 학교 밖 성폭력상담소 또는 공공기관에 도움을 요청해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대학생들이 겪는 대표적인 성폭력으로 스토킹이 있다. 주로 연애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토킹 피해를 예방하는 첩경은 가해자가 변화하리라는 기대를 접고 처음부터 냉정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스토킹 가해자들은 연애 과정에서 알게 된 피해자의 사적인 정보를 인터넷에 유포하겠다며 협박하기도 한다. 연애를 가장한 스토킹 피해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스스로가 위험한 연애, 해를 끼칠 수 있는 연애관계를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인지 돌아봐야 한다. 사랑이나 연애관계를 이유로 상대방의 폭력적인 행동이나 사생활에 대한 통제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스토커의 행동은 폭력일 뿐이다. 당신의 성장을 바라지 않는 사람과의 연애관계는 중단해야 한다.

‘바바리맨’과 같이 공연음란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에 예방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여중이나 여고를 졸업한 여성 상당수가 등·하굣길에서 만난 바바리맨을 기억할 것이다. 가해자가 젊은 여성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의도적으로 성기를 노출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예방만큼 사후처리가 중요하다. 목격한 시간과 얼굴 등 주요 사실을 기록해두는 게 좋다. 또한 목격하는 즉시 신고함으로써 인근 파출소의 순찰을 강화시켜 범죄 반복을 예방하는 것도 필요하다.

최안전 양처럼 늦은 시간에 밤거리를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가까운 파출소의 전화번호를 기록해두거나 자신이 다니는 거리에서 늦게까지 문을 여는 가게를 기억해두었다가 위험상황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방법은 한계가 있다. 성폭력을 예방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성폭력을 대하는 나의 마음을 ‘무력한 나’에서 ‘맞서 싸울 수 있는 나’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관계의 가해자로 인한 성폭력에도 대응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어떤 위험상황에서도 싸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소 자기방어 훈련을 하며 비상 상황 시 나의 몸이 타인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법적·의료적인 제도가 있음을 기억하고 조력을 받는다면 예기치 못한 피해 이후 벌어질 수 있는 반복적인 피해 예방에 도움이 된다.

지금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성폭력이 벌어진다. 우리에겐 성폭력을 대하는 담대한 마음이 필요하다. 성폭력이 상당히 많이 발생하는 한국 사회 현실을 고려해봤을 때 이러한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다.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린다면 성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보자. 그리고 성폭력에 단호하게 대응하는 문화를 내 주변부터 만들어나가자.

신동아 2014년 12월 호

최지나 한국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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