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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2-1

하얼빈의 이토 히로부미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2-1

  •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1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기다리던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는 화가 치밀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일본 관료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열차 안으로 진입했다. 오랜 여행으로 피곤하다는 이토 히로부미 전 일본 총리대신은 두 번째 칸에 비스듬히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코코체프는 그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모자를 벗었다.

2
이탈자가 스스로의 이동 속도를 실제보다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간파한 추격자는 기뻤다. 어느 수준까지 향상될지 몰랐지만 분명 자신의 가속 능력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고, 이제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닌 숙주를 고르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이탈자가 남긴 파동흔이 19세기 일본 열도 쪽으로 향했음을 확인한 추격자는 그보다 10년 앞선 시점에 착지한 뒤 여러 숙주를 갈아타며 상대를 향해 조심스레 접근했다. 조슈번 출신 중급 무사 요시노로 육화한 이탈자는 에도 막부에 반기를 든 혁명파에 가담해 메이지유신 전 과정을 관람하고 있었다. 

조슈번 출신 천황파 무사들이 오사카 유곽에서 회합을 하던 어느 날 저녁, 추격자는 막부에서 파견한 자객이던 게이샤 우메코에게 육화해 모임에 잠입했다. 무사들은 칼을 찬 채 술을 마셨고 게이샤들이 자신들에게 밀착해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샤미센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요시노에게 추파를 던지며 끈질기게 기회를 노렸다. 

요시노는 모임이 파한 뒤 우메코를 유곽 내 자신의 침소로 불렀다. 상대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그녀는 기모노 안쪽에 날카로운 비수 세 자루를 품고 상대 침방에 들어섰다. 서안 위에 장검을 내려놓고 촛불을 끈 요시노가 속삭였다. 



“사쿠라 꽃잎 질 때 칼날 위로 날아 앉는 나비여.” 

무릎 꿇고 앉아 상대에게 고개 숙인 우메코가 화답했다. 

“칼날 위의 나비, 사쿠라 꽃잎처럼 둘로 갈라지네.” 

어둠 속에서 우메코를 응시하던 요시노가 다시 흥얼댔다. 

“칼집 떠난 칼은 언제쯤 고향으로 돌아갈까?” 

입가의 웃음기를 손으로 가린 뒤 우메코가 두 손을 합장하며 읊조렸다. 

“칼은 칼집을 떠난 적 없으니 돌아갈 고향도 없으리.” 

소매에서 살며시 비수를 빼낸 우메코가 요시노 목을 향해 던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낮춰 칼을 피한 요시노가 검을 쥐고 튕기듯이 일어섰다. 그 짧은 사이 풀쩍 뛰어오른 우메코가 머리로 상대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결투의 신 미야모토 무사시가 쓰던 비기였다. 쓰러진 요시노의 배 위에 올라탄 우메코가 상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둔한 진동음이 건물 전체를 뒤흔들었다.

3
이맛살을 찌푸리며 게슴츠레 눈을 뜬 이토가 영어로 띄엄띄엄 말했다. 

“실례했소. 두통 때문에 잠시 현기증이 나서 그만.”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코코체프가 러시아어로 말하자 일본인 통역관이 이토에게 전달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여기서 먼 곳이랍니다. 긴 여행이었으니 충분히 이해하겠답니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할지 물어오는군요.” 

잠시 차창 밖 하얼빈 역을 둘러본 이토가 조금 생기를 되찾고 영어로 대답했다. 

“물론이요. 곧 나가겠소.” 

만족한 웃음을 머금은 코코체프가 이번엔 서툰 영어로 직접 말했다. 

“그럼 먼저 나가 기다리겠습니다.” 

4 숙주의 몸에서 튕겨 나온 이탈자는 겨우 균형을 잡고 유곽 담장 위에 앉아 있던 까마귀를 징검다리 삼아 하늘로 솟구쳤다. 그는 마침 열도를 가로질러 베링해협으로 날고 있던 신천옹 안으로 육화했다. 예상 밖의 빠른 공격에 당황한 그는 홋카이도 상공에서 서둘러 지상으로 착지했다. 

신천옹에서 분리돼 나온 이탈자는 바닷가 포구에 정박해 있던 어선 선실로 접근해 마침 단잠에 빠진 젊은 어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놀랍게 발전한 이동 속도로 보아 추격자가 그의 동선을 감지해 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서둘러 더 안전한 숙주로 옮겨가야 했다. 

한편 간발의 차로 이탈자를 놓친 추격자는 빠른 속도로 까마귀에게 접근했다. 이미 빈 숙주였다. 파동흔을 따라 날아오른 그는 밤바다를 비행하는 새를 뒤지고 다녔다. 베링해를 향해 파도 위를 스치듯 날던 신천옹을 발견했을 무렵, 동쪽에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신천옹 역시 빈 숙주였다. 이동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탈자는 분명 근처에 잠복해 있었다. 

추격자는 홋카이도 한 포구에서 파동흔을 감지해 냈다. 선박을 차례차례 조사하던 그는 한 작은 어선 주변에서 이탈자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미 다른 시공간으로 건너간 뒤였다. 남아 있는 파동흔의 중심으로 진입한 추격자는 주변 시간대를 열람하며 최종 좌표값을 얻고자 노력했다. 유곽에서의 공격으로 충격을 받은 이탈자가 도주한 시공 좌표는 가까운 곳이었다. 동일 차원계의 40여 년 뒤 하얼빈이었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0년 9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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