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호

[에세이] 우리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우다영 소설가

    .

    입력2020-09-0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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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치고 한동안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고, 이상하고 집요한 피로에 휩싸인 채 마음속으로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생활을 되찾는 거야’라고 자주 되뇌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떠올려보니 도대체 되찾고 싶은 그 생활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상태는 모호하고 희미하게 존재하며 단지 지금이 아닌 어떤 상태였고, 사실 바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지금과는 다른 날들. 어제의 날들. 혹은 내일들.

    코로나19 시대에…

    나는 정말 이상한 나날을 보냈다. 많은 행사와 수업과 미팅이 한꺼번에 취소되거나 비대면 식으로 대체되면서 집 안에 덩그러니 남게 됐다. 사람들과 한 약속도 모두 취소됐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기 위해 조금만 참자고 격려하며 서로의 최소 동선 속으로 멀어졌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격리 아닌 격리 상태가 된 뒤에야 내가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과 멀어지고서야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나는 이 낯선 고요를 경계하다가 천천히 즐기기 시작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는 나날이 이어졌다. 

    혼자 남아 혼자 생활했다. 처음엔 누워서 지냈다. 나는 내가 왜 누워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 무얼 잃고 무얼 얻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누워 있었다. 침대에 눕고 소파에 눕고 바닥에 누웠다. TV를 틀어둘 때도 있고 그것을 바라볼 때도 있었지만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만질 때도 있었지만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렀다. 

    그건 아주 갑작스러운 돌입이었다. 나는 내가 혼자 남겨지기 전까지 이런 상태를 예상하지 못했다. 몇 주가 흐르자 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설가의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사람의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밥을 계속 볶았다. 얼마나 자주 볶았느냐면 하루에 두 번 매일매일 볶아 먹었다. 밥과 재료를 함께 볶으면 기름에 감칠맛이 돈다. 그런 맛은 밥과 재료를 따로 먹을 때는 느낄 수 없다. 



    감자를 잘게 썰어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한 볶음밥, 돼지고기 기름에 김치를 볶아 부추와 통깨를 뿌린 볶음밥, 버섯과 파프리카와 청양고추를 굴소스에 볶아 맵게 만든 볶음밥, 파기름에 건새우가루를 볶고 노란 달걀물에 밥을 입힌 뒤 상추에 싸먹는 볶음밥, 들기름과 들깨가루를 넣고 볶아 마른 김에 싸서 양조간장을 찍어 먹는 볶음밥. 밥을 볶고 밥을 먹었다. 반복하자 그것은 생활이 됐다. 몰두하는 무상한 시간이 이어졌다.

    알고리즘 따라 나부터 세계까지

    밥을 먹으며 유튜브를 봤는데 신비로운 알고리즘이 나를 건강 콘텐츠 영상으로 이끌었다. 가령 이런 것이었다. 현대인의 많은 병은 장 속 세균과 미생물의 결핍과 불균형 때문에 일어나는데 몸에 유익한 역할을 하는 균이 죽으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병이 생긴다. 천식, 아토피, 알레르기 등의 자가면역질환이 대표적이며 비만, 당뇨, 고지혈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영상에 따르면, 사람 몸 안에 있는 40조 개의 세균과 미생물은 우리가 신체 고유의 일이라고 여기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많은 기능을 대신 수행하고 있었다. 균은 사람의 몸 안에서 양분과 생존에 필요한 환경을 얻고, 사람은 균의 작용으로 장기만으로 처리할 수 없는 생체 효과를 얻는다. 실은 모두가 서로의 일부를 먹고, 서로의 일부가 돼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덧 알고리즘은 숲과 나무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흘러갔다. 산림학자는 숲속의 나무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전나무와 자작나무가 땅속뿌리 균근으로 탄소를 교환하는 일,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하는 조건에 놓이거나 잎이 다 떨어진 시기의 위태로운 나무에게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를 나눠주는 일, 물을 양보하는 일,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일을 들려주었다. 실은 동떨어져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내가 볶은 따뜻하고 고소한 볶음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간간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들여다봤다. 감염이 두려워 화가 난 사람들, 마트에서 한정된 물건을 놓고 다투고 공공장소에서 혐오를 일삼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 충분한 의료장비가 없음을 호소하는 의료인, 폐쇄된 관광지 상인의 눈물, 그리고 60년 만에 맑아진 베네치아 수로에 돌아온 돌고래 같은 것들. 불행과 재난, 자정과 회복이 병렬로 배치된 이상한 모습을 보았다.

    멀리 돌아 마주한 슬픔

    세계인의 삶에 이토록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나. 먼 곳에 있는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일이… 유튜브 알고리즘은 어느새 요즘 유행하는 식물성 식단과 키토제닉 다이어트 영상으로 흘러갔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여자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카메라 앵글에서 독백하는 후기 영상이 반복됐다. 그 여자들은 사실 너무 말라 보였는데, 처음에는 기분 좋게 웃으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성공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가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대체로 그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과 상처, 우울증과 폭식증을 고백했다. 

    그러면서 울었다. 우는 여자들의 영상이 계속 반복됐다. 그러자 그것은 여자들의 일상이 됐다. 나는 내가 왜 우는 여자들을 보고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고민은 나와 아주 동떨어지고 공유해 본 적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그 여자들의 슬픔을 보며 나는 함께 슬퍼졌다. 아니다. 실은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슬픔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의 슬픔에 대해 아는 순간 나는 슬픈 사람이 됐다. 나는 내 슬픔의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내 슬픔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외면해 왔다는 사실이 또 슬펐다. 나는 내가 아주 오랫동안 집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그사이 회사를 관뒀고 퇴직금과 실업급여를 받아 살고 있었다. 연애를 하고 헬스 클럽에 다니고 잠을 충분히 자며 코로나 시대에 점점 더 건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너는 어떠냐고 묻길래 나 역시 잘 쉬고 건강해졌다고, 잠도 잘 잔다고 말했다. 친구와 나는 하하호호 웃으며 별다른 맥락도 없이 “아, 좋다. 정말 좋다. 아, 살기 좋다” 하고 말했다.

    우리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뒤 다른 친구와 통화했는데 그 친구는 큰 곤경에 빠져 있었다. 회사도 가족도 친구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친구는 외롭게 홀로 고립돼 있었고 환멸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나는 울음을 터뜨리는 친구를 전화기 너머에서 달래주다가 만나서 시원한 생맥주를 마셨다. 그러다 소주를 마시고 소곱창과 볶음밥을 먹고 매운 우동을 먹고 설탕에 절인 토마토를 먹었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오래 씻으며 나는 내가 친구에게 말한 슬픔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친구에게 내가 느끼는 슬픔의 이유를 나름대로 말하자 그건 정말 슬픔의 이유가 됐다. 친구와 나는 “이상하지. 세상이 참 이상하지” 말하며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마시다가 친구가 말했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그치?”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 슬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이미 이상한 미로 속에 도착했다고. 그날 나는 푹신한 침대 속에서 영화를 보다 잠들었는데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여자가 누군가를 만나러 갈 듯 계단을 내려간다. 그러다 마음을 바꿔 다시 돌아온다. 곧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올라온다. 계단을 내려가고 계단을 올라온다. 

    여자의 표정은 아리송하고 아마도 슬플 거라고 예상되지만 나는 여자의 마음을 전혀 알 수 없다. 여자는 계단을 내려가고 계단을 올라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자는 내려간 것도 올라온 것도 아닌 상태로 헤맨다. 헤매는 모든 사람이 길을 잃은 건 아니지. 여자는 계단을 내려가고 계단을 올라온다. 계단은 견고하게, 단단하게,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여자는 가볍고 작은 몸으로 계단을 내려가고 계단을 올라온다. 

    어느 순간 그것은 운동처럼 보이고 여자의 표정은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아마도 건강하고 싶은 사람처럼, 살고 싶은 사람처럼 보인다. 운동하는 여자가 계단을 내려가고 계단을 올라온다. 여자가 계단을 내려가고 계단을 올라온다.



    우다영
    ● 1990년 서울 출생
    ● 2014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 소설집 ‘밤의 징조와 연인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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