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준리 태권도가 미국에서 유명해진 데는 국회의원들의 태권도 배우기 열풍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발단은 강도사건에서 비롯됐다. 1965년 5월 ‘워싱턴포스트’에 뉴햄프셔 출신 국회의원 제임스 클리블랜드가 강도를 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를 본 이씨가 그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태권도를 배우면 그런 봉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 후 클리블랜드 의원이 자신의 사무실로 이씨를 초대했다. 가보니 상원의원 1명과 하원의원 2명이 함께 있었다. 세 의원 앞에서 시범을 했다. 그것이 주간지 ‘라이프’와 ‘워싱턴포스트’에 기사화됐다.
이 일을 계기로 이씨는 미 국회의사당 안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게 됐다. 일주일에 3회, 아침 7시부터 한 시간씩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난 40년간 국회에서 준리 태권도를 배운 국회의원이 300명에 이른다.
LA 해변의 추억
그가 전설적인 무술인 브루스 리, 즉 이소룡을 처음 만난 것은 1964년 LA 롱비치에서 열린 세계가라테선수권대회에서였다. 이 대회에서 절권도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소룡은 이후 영화에 출연하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각자 시범만 하고 겨루기 같은 건 없었어요. 나는 송판 격파를 했고, 그는 눈감고 하는 기술을 선보였어요. 대회 이후 친분을 쌓았습니다. 같은 동양인이라 그런지 서로 인상 깊었던 거죠. 그러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어요. 어느 날 그가 TV 쇼 프로그램에 주연으로 나오더라고요. 수소문 끝에 방송 홍보차 워싱턴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다시 만나게 됐어요. 그게 1966년이에요.”
이듬해 그가 주관한 준리 가라테대회에 이소룡이 스페셜 게스트로 참가해 시범을 했다. 이소룡의 유명세 덕분에 관중이 9000명이나 몰렸다. 대회 이름에 태권도가 아닌 가라테를 붙인 것은 당시만 해도 태권도라는 명칭이 미국인들에게 생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리안 가라테’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태권도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렸다는 것.
준 리와 브루스 리, 두 이(李)씨의 우정어린 교류는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으로도 증명된다. 대표적인 게 1968년 LA 해변을 배경으로 한 흑백사진. 준 리가 브루스 리의 얼굴을 향해 옆차기를 하자 브루스 리가 몸을 비틀어 피하는 광경이다.
이소룡이 아홉 살 아래였지만, 두 사람은 무술 동료로서 서로 존중하고 아꼈다. 이씨는 이소룡에게 발차기를 전수했고, 이소룡은 그에게 손기술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이소룡 영화를 보면 옆차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원래 쿵푸에는 옆차기가 없어요. 내가 이소룡에게 옆차기를 비롯해 돌려차기, 뒤돌려차기 기술을 가르쳐줬어요. 모든 게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술인 브루스 리에게 발차기를 전수했고, 가장 위대한 복서인 알리에게 주먹기술을 가르쳤어요. 또 세계에서 가장 힘 센 미국 국회의원 300명을 가르쳤습니다. 그게 다 장차 ‘동방의 등불’을 켜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던 거죠. ‘아버지 부시 대통령’ 자문위원을 지낸 것도, 소련에 준리 태권도가 진출한 것도.”
▶이소룡의 파워는 어느 정도였나요.
“걔는 백인들과 팔씨름해 진 적이 없어요. 나도 상대가 안 돼요. 손가락 2개만으로 푸시업을 하는 애니. 타고난 강골이에요. 원래 깡패야. 홍콩 길거리에서 만날 싸움만 하다가 골든 글러브 복싱대회에 나가 우승했지. 몇 가지 기본만 배워 참가했다더라고. 그러니 여간 독한 게 아니죠. 독하니 이기는 거요.”
이소룡이 실전무술의 대가로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타고난 싸움꾼이 무술의 체계를 갖췄으니 실전에서 강하지 않으면 이상할 터.
▶이소룡의 인간성은 어땠나요.
“아주 까다로워요. 대신 한번 좋아한 사람은 끝까지 좋아하고 도와주죠. 나를 무척 좋아해 나중엔 영화 출연 섭외까지 해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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