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

‘인어공주’는 원래 정치적 올바름(PC)의 산물이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나의 에리얼이 아냐’라는 역사왜곡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입력2023-05-27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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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즈니도 불만의 목소리 알지만…

    • 시대 분위기에 맞춰 갱신하다

    • 지적 호기심 가득한 캐릭터

    • 원작을 ‘파괴’해 만든 여성상

    • 안데르센 원작보다 나아간 작품

    동명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영화 ‘인어공주’에서 에리얼(핼리 베일리)이 조난 당한 에릭 왕자(조나 하워킹)를 구출해 모래사장에 눕히고 있는 모습.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동명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영화 ‘인어공주’에서 에리얼(핼리 베일리)이 조난 당한 에릭 왕자(조나 하워킹)를 구출해 모래사장에 눕히고 있는 모습.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나의 에리얼이 아냐(#NotMyAerial).’ 2019년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실사화(實寫化)하겠다고 밝히고 캐스팅을 발표하자 인터넷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쏟아졌던 반응 중 일부다. 빨간 머리에 하얀 피부를 지닌 백인 외모의 기존 인어공주 에리얼이 흑인으로 바뀌자 자신이 아는 에리얼의 모습이 아니라고 반발한 것이다.

    그 후로 4년의 시간이 흘렀고, 한국 시각으로 5월 24일 수요일 실사 영화 ‘인어공주’가 개봉했다. 일단 관객의 반응은 썩 좋지 않은 듯하다. 초기 리뷰는 낮은 별점과 혹평이 다소 더 큰 비중을 이루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인어공주’의 최종 흥행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구체적인 작품 하나를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코너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최근 문화계의 주요 화두였던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알아보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옹호와 비판 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최근에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 혹은 비난론이 더 우세한 듯한 모습이 보인다. 내가 좋아하던 추억 속의 무언가, 가령 ‘인어공주’ 애니메이션 등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름하에 ‘망쳤다’는 비난이 더 크게 들리는 세상이다. 흑인을 캐스팅한다거나, 유색 인종을 캐스팅한다거나, 장애인이나 성소수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식으로 활용 혹은 악용한다는 분노와 불만의 목소리가 인터넷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디즈니를 비롯해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들은 이러한 불만의 목소리를 뻔히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걸까. 그들은 돈을 벌 생각이 없는 걸까.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어떤 대의를 퍼뜨리는 것에 더 치중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보수 성향을 지닌 사람들 중 일부 혹은 상당수는 디즈니가 좌파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일부러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허나 디즈니는 엄연히 상장돼 있는 영리 기업으로,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디즈니뿐만 아니라 마블을 비롯해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는 여러 회사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어떤 사람, 감독, 작가가 이념적 지향을 강하게 품고 자기 신념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문화계를 둘러싼 정치적 올바름 논란은 기본적으로 문화 산업의 맥락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새로운 콘텐츠 개척해야 하는 운명

    첫째, 문화산업은 본질적으로 끝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개척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보고 듣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너무도 풍성하며, 소비자가 시간을 낸다면 어떤 콘텐츠라도 반복해 즐길 수 있는 세상이다.

    불과 100년, 아니 수십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소니에서 워크맨을 발명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걸어 다니며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다. 1980년대 혹은 그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라디오에서 DJ가 틀어준 음악이 스쳐 지나갈 때 녹음 버튼을 눌러 그것을 테이프에 옮겨 담아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음악을 듣는 것은 드물고 소중한 일이었다. 하물며 영상 매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전자 기술이 출현, 발전하기 이전의 상황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똑같은 판소리를 수십 년, 수백 년째 반복해서 들었다. 영화 ‘서편제’ 등에서 잘 묘사돼 있다시피 저장 매체가 없던 시절에는 연주자, 공연자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판소리나 무용 등을 똑같이 따라 하는 행위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공연자가 실제로 현장에서 공연하는 것 외엔 작품을 접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20세기 들어 비디오테이프를 비롯해 다양한 저장 매체가 등장하고 개인과 가정에 보급됐다. 한 번 본 영화나 드라마를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하물며 지금처럼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Over the Top)로 추억의 작품을 보고 또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제는 같은 작품을 되풀이하는 일이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창작은 어떤 식으로건 과거를 넘어서 갱신해야 한다. 설령 이미 아는 줄거리에 아는 등장인물이라고 해도, 이 작품을 다시 볼 가치가 있는 무언가로 새롭게 만드는 일이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됐다.

    1989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1989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이번에 개봉한 실사 영화 ‘인어공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89년의 ‘인어공주’ 애니메이션은 지금 디즈니 플러스에 가입하면 당장 얼마든지 몇 번이고 돌려볼 수 있다. 그러므로 2023년 개봉을 염두에 둔 실사 영화를 1989년의 애니메이션과 똑같이, 그저 그림을 영상으로 바꾼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시대의 분위기에 맞춰 작품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는 이야기다.

    디즈니의 ‘원작 훼손’

    둘째, 모든 이야기는 그 작품 내에서 도전해야 할 과제를 필요로 한다. 주인공이 목적하는 바가 있고, 목적 달성을 막는 어떤 장애가 있어서 그 외부의 방해를 이겨내고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 거의 모든 스토리텔링의 기본 공식이다.

    ‘인어공주’의 경우는 어떨까. 1989년 작 디즈니 ‘인어공주’는 처음 개봉했을 때부터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것과 거의 유사한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원작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원작 ‘인어공주’에서 인어공주는 왕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마녀와 거래를 해서 목소리를 잃고 다리를 얻는다. 그 뒤 왕자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하지만 왕자의 사랑을 받지는 못해 결국 죽어서 물거품이 된 후 공기의 정령이 되고 만다.

    1990년대를 앞두고 있던 디즈니는 비련에 빠진 수동적 여성의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변화시켰다.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여성인 에리얼이 왕자의 사랑만을 갈구하는 것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왕자가 있는 육지, 왕국의 다양한 문물을 궁금해 한다. 에리얼의 주제가 ‘저곳으로(Part of Your World)’의 가사에 담긴 내용을 통해 잘 알 수 있듯, 굉장히 도전적이며 지적인 호기심이 가득한 그런 캐릭터로 만들었다.

    디즈니의 ‘원작 훼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결말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에리얼이 바다의 왕인 아버지의 이해와 인정, 도움에 힘입어 마녀의 저주를 풀고 사랑을 쟁취하는 해피 엔딩으로 만들었다.

    당시 이 결말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다. 1990년대에 최소한 어린이였던 사람들이 아니라면 기억을 하지 못하거나 간과하기 쉽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안데르센의 원작이 새드 엔딩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을 해피 엔딩으로 바꾸는 것 자체가 권위 있는 세계문학을 임의로 편집하고 뜯어고치는 불경한 행위, 일종의 신성 모독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2023년 작 ‘인어공주’가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추억 속의 소중한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망쳤다는 비판을 보고 있노라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추억 속 디즈니 ‘인어공주’ 그 자체가 이미 정치적 올바름의 산물이며, 안데르센 동화의 비극성을 즐기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추억과 동심을 파괴하는 작품이었다.

    1989년 작 ‘인어공주’는 당시의 가장 첨예한 문화적‧정치적 쟁점이던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한 작품이었다. 안데르센의 원작을 ‘파괴’하며 세상을 더 알고 싶은 여성, 자신이 원하는 남성을 얻기 위해 안락하고 평온한 일상을 깨뜨릴 수 있는 주체적인 여성상을 제시했다. 물론 ‘꼭 남자를 선택해야 하느냐’는 비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어공주가 왕자의 선택을 받지 못해 물거품이 돼버리는 안데르센 원작에 비한다면 분명 한 걸음 더 나아간 작품이었다.

    지난 세대의 정치적 올바름

    요컨대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이 나의 추억을, 혹은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를 망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읽어온 모든 것들이 지난 시대, 지난 세대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한 투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지난 시대의 이야기를 그대로 소비하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과거에 머물면 된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에 고전 명작이 숱하게 널려 있다. 하지만 추억을 찾아 옛 작품을 틀어보면 내가 기억했던 그것과 다른, 낯설고 촌스럽고 어색하며 어딘가 묘하게 거슬리는 경험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우리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 자신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밝혔듯 이 글은 ‘인어공주’에 대한 감상평이 아니다. ‘인어공주’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품이므로 그것을 봐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담고 있지도 않다. 설령 그 속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메시지가 담겼다 한들 관객이 극장에 가는 이유는 여가시간을 즐기기 위한 것이므로 작품이 성공해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디즈니가 제시하는 올바른 정치적 방향 그 자체도 비판과 토론의 대상이 돼야 한다.

    다만 몇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인어공주’의 ‘원작’은 굳이 따지자면 안데르센의 동화도 아니라 그가 동화의 모티프로 삼았던 슬라브 신화다. 성소수자 안데르센은 남자를 짝사랑했지만 상대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서로 뜻이 통했다 한들 시대의 한계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실연의 아픔을 창작으로 승화시켰고, 그 결과 소설 ‘인어공주’가 탄생했다. 요컨대 ‘인어공주’는 그 최초의 창작 단계부터 ‘피씨(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묻은’ 작품이었다는 이야기다.

    디즈니는 그 원작의 신파성을 덜어내고 (당시로서는 납득 가능할 만큼) 주체적인 여성상으로 ‘왜곡’하며 1989년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추억의 원작으로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작품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놓고 ‘피씨에 오염’되지 않은 좋은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완전하지 않은 기억을 통한 역사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안데르센이 눈물을 흘리며 펜을 놀리던 그때부터 1989년을 지나 2023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어공주’는 단 한 번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았던 적이 없는 작품인 것이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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