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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 창문에 쓰여 있는 “행복한 노후”라는 검은색 글씨가, 볼 때마다 참으로 무심하게 느껴졌다. 자동차 소음과 매연으로 창문조차 열기 어려워 보이는 대로변 건물에서 과연 ‘요양’이 가능한 걸까. 노년의 고통과 슬픔을 요양이란 말 뒤에 꽁꽁 숨겨 놓은 듯 느껴졌다. Y가 다니는 노인요양원은 규모 있는 건물의 몇 개 층을 사용하는 큰 곳인데도 풀 한 포기 만져보거나 하늘 한번 올려다볼 공간이 없고, 그나마 있는 옥상 정원은 추가 요금을 낸 노인들만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할머니의 보따리는 성정을 닮아
“요양원에 치매 걸린 할머니들이 정말 많아. 그런 할머니들이 어떤 말을 제일 많이 하실 거 같아?” 야간 근무를 마치고 나온 Y가 내게 물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Y는 ”집에 갈 거야”라는 말을 할머니들이 가장 자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잠잘 시간에 부스스 일어나 기저귀며, 옷가지 같은 걸 네모 반듯이 개켜서 홑이불을 보자기 삼아 짐을 싼단다. “밤이 늦었는데 어디 가시느냐고 물으면 대개 집으로 간다고 하셔. 아이들과 남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야 한다고.”할머니의 보따리는 당신의 성정을 말하는 것 같다고 Y는 말했다. “어떤 할머니는 정신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네모서리 각을 딱 맞춰서 보따리를 얼마나 예쁘게 싸 놓는지 몰라. 평생 살림살이 하나 흩트려 놓지 않고 사셨을 분 같았어.” 지금은 밤이니 푹 자고 아침에 가셔야 한다고 알려드리면 할머니들 대개가 순하게 다시 침대로 돌아간다고 했다. “할머니들이 왜 그렇게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줄 아니? 집이 그리워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야. 밥, 밥 때문이었어. 아이들도 먹이고, 남편도 먹여야 한다고, 밥을 하러 집에 가야 한다는 거야.” 나는 그 대목에서 공연히 울컥 눈물이 났다. 평생 때맞춰 얼마나 많은 밥을 했으면 치매에 걸려서도 밥걱정을 하는 걸까.
“밥 먹었냐”는 말을 인사말로 쓰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다. 밥은 음식 너머의 다양한 의미를 담기도 한다. 미국에서 2년 동안 안식년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 미국인 친구들을 만나면, 반갑다는 인사 끝에 아침은 먹었니? 점심은 먹었니? 라고 묻곤 했다. 밥 먹었냐고 묻는 것이 순 한국식 인사말인 줄도 몰랐다. 밥 때에 만나 밥 먹었는지 묻는 것은 저녁에 헤어질 때 “잘 자”라고 인사하는 것처럼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밥 먹었는지 묻는 내 말이 낯설지만, 고맙게 느껴졌다는 미국인 친구의 고백에 그 말의 특별함을 깨달았다.
일하는 부모에게 밥은 때론 미안함이기도 하다. 교사로 일하며 아이 둘을 키운 친구 K는 지금도 새벽 6시 전에 일어나 국 하나, 반찬 한두 가지를 만들어 놓고 출근한다. 남편은 아이들 버릇이 나빠진다고 성화를 부리지만, 어느덧 성인이 되어, 손 밖에 난 아이들에게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게 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은 나중에 엄마 밥, 아빠 밥을 어떻게 기억할까 궁금하다. 출퇴근 시간에 쫓겨 제대로 된 집밥을 해준 적이 거의 없었다. 집밥이라고 해도 할머니가 만들었거나, 동네 친구나 반찬가게 아주머니들이 만든 반찬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래도 아침밥은 꼭 먹여 보냈다는 사실을 아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밥하러 가야 한다는 요양원 할머니들의 말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걸까.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 후회로 남아
어느 밤, Y는 집에 가겠다는 할머니를 겨우 달래서 침대에 눕혔다고 했다. 의자를 끌어다 놓고 침대 옆에 앉았는데, 할머니는 말짱한 정신인 듯, 편하게 침대에 올라와 자라며 곁을 내주더란다. Y는 할머니를 재우기 위해 살짝 누웠다가 당신 이불을 끌어다가 어깨에 덮어주는 손길에 자는 척 한참 더 누워있었다고 했다.평생 밥하고 누군가를 위해 노동을 해왔을 할머니들이 인생의 굽이를 돌고 돌아 삶의 끝자락, 대로변 상가 건물 요양원에 누워 있다. 리베카 솔닛은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자신의 엄마를 보면서 ‘드문드문 페이지가 찢겨 나간 책’ 같다고 표현했다.(‘멀고도 가까운’ 반비, 2016) 치매 할머니들의 기억은 드문드문 찢겨 나간 것이 아니라 아예 후반부 이야기 전체가 사라진 책 같은 걸까? 집에 밥하러 간다고 보따리를 싸는 할머니의 기억은 인생이란 골짜기의 어디쯤 가 있는 걸까. 종달새 같은 꼬맹이들이 “엄마” 하고 달려드는 어느 순간이거나, 작은 밥상에 마주 앉아, 다정한 눈빛을 보내는, 수염 깎은 자국이 여전히 푸른, 젊은 남편이나 연인이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문득 치매를 앓는 할아버지들은 어떤 말을 가장 많이 할까 궁금해졌다. 여보 나 밥 줘, 라는 말이 아닐까 해서 우습다가, 어쩌면 일하러 가야 한다며 가방을 챙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숙연해진다. 평생 노동하는 몸으로 살아온 이들의 끝자리가 소음과 매연으로 창문조차 열 수 없는 낯선 요양원이란 현실이 너무 슬프다.
얼마 전, 아버지 생신을 맞아 동생 가족과 함께 조촐한 밥상에 둘러앉았다. 동생이 준비한 케이크가 멋지고 화려했다. 팥앙금 꽃으로 장식된 케이크는 봄날의 정원처럼 화사했고, 1만 원권이 들어있는 원통형 투명 플라스틱 십여 개가 케이크 테두리를 감싸고 있었다. “아버지 다음 생신에는 5만 원 권을 넣어드릴게요.” 말수가 적은 남동생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러더니 윤달 때문에 내년에는 아버지 생신이 없고, 내후년에 두 번을 하게 될 거라고 했다. 아버지가 아직 건강하시지만, 연세를 생각하면 내후년을 당연히 기약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버지와 둘러앉아 함께 먹는 밥은 얼마나 계속될 수 있을까. 돌아가신 엄마는 아버지의 키가 너무 커서 외할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셨다는 말로 당신 남편의 훤칠한 키를 자랑삼아 얘기하곤 했다. 그렇게 키가 컸던 아버지는 이제 남동생보다 한참이나 작아졌다.
“날씨가 꽤 추워요. 외출하실 때 모자를 꼭 쓰고 나가셔야 해요.”
“알겠다. 나는 다 괜찮으니 너희나 조심해서 다녀라. 고맙다.”
모자를 싫어하시니 모자를 쓰고 외출하지 않으실 걸 알면서도 잔소리를 해 본다. 일상을 나누지 못하는 아버지와 딸의 대화는 짧기만 하다. 밥 잘 챙겨 드시라는 얘기, 날씨가 춥다거나 덥다는 얘기, 과수원에 꽃이 만발할 날을 기다린다는 얘기. 짧은 대화는 늘 아버지의 괜찮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엄마가 암 투병 끝에 돌아가신 후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하고, 또 후회했던가. 아버지와 함께 못한 시간도 결국 그런 후회로 남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여기서, 내 일로 시간을 다 보낸다. 요양원 할머니들의 밥처럼 아버지의 괜찮다는 말 뒤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꼭꼭 숨어 있을 것이다.
최은숙
●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 2022년 7월 조사관으로 만난 사건들을 다룬 에세이 ‘어떤 호소의 말들’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