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

유자광이라는 프리즘으로 조선왕조를 저격하다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3-06-0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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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수를 넘어 날뛴 영원한 아웃사이더

    • 서출이 기댈 곳은 오로지 왕의 총애

    • 개혁 정치가 조광조, 사화의 원흉 유자광

    • 제도 개혁 없는 유교 정풍운동은 정치적 퇴보

    • 유교적 명분론으로 포장된 사다리 걷어차기

    • 선비가 꿈꾼 이상한 차별의 나라

    계승범 서강대 교수는 스승인 정두희 교수의 유지를 받들어 간신으로 평가받는 조선시대 유자광의 면면을 재평가해 ‘유자광 조선의 영원한 이방인’을 출간했다. [박해윤 기자]

    계승범 서강대 교수는 스승인 정두희 교수의 유지를 받들어 간신으로 평가받는 조선시대 유자광의 면면을 재평가해 ‘유자광 조선의 영원한 이방인’을 출간했다. [박해윤 기자]

    여기 조선시대 간신(奸臣)의 대명사인 인물이 있다. 고변과 모함으로 정적을 숙청하며 입신 영달을 꾀한 악인. 남이의 옥사(1468),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등 피바람 부는 정국에 예외 없이 등장하는 인물. 2018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간신 편 첫 번째 주인공. 거슬러 올라가 1980년대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설중매’에서 배우 변희봉이 연기하며 “(천하가)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킨 풍운아. 유자광(柳子光·1439∼1512)이다.

    남원 출신의 얼자(양반과 천민 여성 사이에서 낳은 아들) 유자광은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내리 다섯 임금을 모시며 무려 40년(성종 때 2년 반의 유배 기간 포함)간 중앙 정치 무대에서 활동했다. 왕에게 끊임없이 아첨하고, 또 다른 간신들과 붕당(파벌)을 만들고, 최연소 병조판서 남이를 모함하고, 꼿꼿 선비의 대명사인 김종직(조선 전기 사림파의 연원이 된 인물로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함)을 고자질해 부관참시 당하게 했으니 간신 중의 간신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유자광전’을 쓴 남곤(조광조 등 신진 세력을 숙청한 기묘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은 그를 아버지도 포기한 패륜아로 묘사했다.

    조광조의 4년 VS 유자광의 40년

    “어려서 무뢰자가 되어 장기와 바둑을 두고 재물을 다투기도 했으며, 새벽이나 밤에 떠돌아다니며 길가에서 여자를 만나면 끌어다가 음간하였다. 소출이 미천한 데다가 방종하고 패악함이 이러하니, 유규(아버지)는 여러 번 매질하였으며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조선시대 인물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연 고(故) 정두희 서강대 사학과 명예교수. ‘유자광, 조선의 영원한 이방인’은 그의 유작이 됐다.

    조선시대 인물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연 고(故) 정두희 서강대 사학과 명예교수. ‘유자광, 조선의 영원한 이방인’은 그의 유작이 됐다.

    서강대 사학과 정두희(1946~2013) 명예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충신 대 간신, 선과 악의 프레임을 걷어내야 유자광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시대상과 역사상에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다고 봤다. 사실 정 교수가 유자광에 앞서 천착한 인물은 조광조(1482~1519)였다. 조광조는 중종 14년 기묘사화로 죽기까지 4년이라는 짧은 기간 정치 활동을 했음에도 유교적 이상주의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했던 개혁 정치가이자 실천적 지성인으로 평가받았다. 정 교수는 1997년 ‘조선 시대 인물의 재발견’에서 짧게 조광조 편을 썼고, 2000년 ‘조광조-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라는 책을 내고 다시 1년 만에 증보판을 낼 만큼 조광조라는 인물에 매료돼 있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조광조는 세조의 찬탈, 연산군의 학정, 중종반정이라는 또 하나의 쿠데타, 이 세 가지 사건이 유교 이념에 남긴 깊은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 왕조 지배자들의 도덕적 각성을 촉구했다.



    정 교수는 조광조에 이어 다음 연구 대상으로 유자광을 선택했다. 개국공신 집안에서 태어나 죽어서도 진정한 군자요 선비로 추앙받은 조광조와 지방 관리의 얼자로 태어나 죽어서도 원흉이요 간신으로 멸시받은 유자광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나이로 보면 두 사람은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날뿐더러 조광조가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아간 중종 10년(1515)에 유자광은 이미 유배지에서 숨을 거둔 지 3년이 지난 상황이어서 두 사람이 조정에서 맞닥뜨릴 일은 없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성종 13년에 태어나 연산군 치세인 16세에 무오사화를 목격하고, 22세에 갑자사화가 일어났으며, 24세에 중종반정으로 정국이 바뀌는 소용돌이를 겪었다. 무엇보다 그가 스승으로 섬긴 김굉필은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된 김종직의 제자였으며, 그 역시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피의 복수를 할 때(갑자사화) 사약을 받은 사림의 대표적 인물이다.

    무오사화 초기부터 유자광은 이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41년 전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과 조카 단종의 시해를 비판한 글(조의제문)이 사초에 실려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김종직은 조의제문에서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 사건을 통해 노산군(단종)을 의제에, 세조를 항우와 진시황에 견주어 비난했다. 이 내용을 사초에 전재한 사람은 사관 김일손으로 바로 김종직의 제자였다. 유자광은 각종 은유로 쓰인 조의제문을 연산군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보고하고 심문관으로 추국에 참여해 옥사를 확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사건 이후 유자광은 사화의 원흉이자 사림의 공적으로 낙인찍혔다.

    유자광이라는 프리즘으로 본 조선시대

    정두희 교수는 유자광 원고를 마무리 짓지 못한 채 2013년 세상을 떠났다. 타계 일주일 전쯤 제자인 계승범 교수를 불러 절반가량 쓴 원고의 완성과 출간을 당부했고 그것이 유언이 됐다. 스승의 유고는 35장 ‘그러나 유자광을 중심으로 무오사화를’이라는 문장에서 마침표도 찍지 못한 채 끝나 있었다. 이 문장에 이어 “(…) 이해하는 시각이 신진 유학자 관료 사이에서는 일반적이었다”라는 27자를 쓰는 데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계 교수는 고백한다. 스승의 10주기를 맞아 ‘유자광 조선의 영원한 이방인’(푸른역사)을 출간한 계승범 교수를 만났다. 지난해 그는 매일 세조에서 중종 대까지 조정에 ‘등청’하는 마음으로 원고와 씨름했다.

    왜 조광조에 이어 유자광인가.

    “조광조가 살았던 시대가 조선왕조에서 굉장한 전환기였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화 시대’라고 하는 것처럼 조선의 ‘유교화 시대’였다. 사림으로 대표되는 신진 사대부는 유교적 가치를 최우선에 두고 유교와 대척되는 문제들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성종 대에 시작된 유교화의 흐름에서 하이라이트는 조광조의 등장이었다. 한편 조광조라는 프리즘으로 그 시대를 들여다보면 대척점에 있는 유자광이 보인다. 조광조는 불과 4년이라는 짧은 정치 활동을 했음에도 지금까지 유림 중의 유림으로 떠받들여지고 반신반인의 경지에까지 올랐다. 그보다 앞서 무려 40년간 정치 활동을 한 유자광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정반대다. 조광조가 양지의 인물이라면 유자광은 음지의 인물이다. 간신으로 낙인찍혀 음지에 갇힌 유자광을 추적함으로써 역으로 그 시대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1960~70년대를 박정희라는 프리즘으로 볼 것인지 김대중이라는 프리즘으로 볼 것인지의 차이다.”

    아웃사이더의 생존술, 상소와 고발

    계승범 교수는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워싱턴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맥락에서 보는 조선시대 정치·지성사와 한·중관계사를 주로 탐구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계승범 교수는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워싱턴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맥락에서 보는 조선시대 정치·지성사와 한·중관계사를 주로 탐구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갑사라는 하급 군인이던 유자광이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하루아침에 출셋길에 오른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

    “갑사는 오늘날 장기 하사관쯤 되는 군인이라고 보면 된다. 세조 13년 함길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터졌다. 반란군 진압은 요원한데 신숙주, 한명회 등 대신들이 반란군과 내통한다는 소문마저 돌아 세조는 속이 탔을 거다. 그때 유자광이 ‘스스로 싸워 통쾌하게 이시애의 머리를 참하여 바치겠다’는 상소를 올렸으니 세조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록은 유자광이 말타기, 활쏘기에 능할 뿐 아니라 서사(書史)를 알며 문장에도 능하다고 했다. 세조 앞에서 ‘정병 300명을 주시면 이시애의 목을 베어 대궐 아래에 대령하겠다’고 큰소리친 것을 보면 기개가 넘치는 젊은이였다. 유자광이 마음에 쏙 든 세조는 바로 왕을 호위하는 겸사복으로 임명했고, 이시애 난이 진압되자 병조정랑(무관의 인사권 담당)에 임명했다. 실록에 ‘서얼이 육조의 낭관에 임명된 것은 유자광에서 시작됐다’고 할 만큼 전례 없는 일이었다. 대간의 반대가 빗발쳤지만 세조는 ‘입현무방(立賢無方·능력 있는 사람을 세우는 데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을 앞세워 밀어붙였다. 이후 출세를 노린 유사한 상소가 줄을 이었다고 할 만큼 유자광의 발탁은 엄청난 파격이었다. 한명회, 신숙주 같은 훈구 공신들에게 집중된 조정의 권력을 재편성하기 위해 새로운 인재 등용이 필요했던 세조의 정국 구상과도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관직에 올랐다 해서 서출이라는 신분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럴수록 기댈 곳은 왕의 신임과 총애밖에 없었다. 세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유자광에겐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유자광은 남이를 반역죄로 고발했다. 실제 역모가 있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단 사흘 만에 남이를 처형한 이유는 무엇인가.

    “세조는 이시애 난을 계기로 조정을 원로 중신들에서 종친과 무인 등 새로운 세대로 바꾸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주목받은 사람이 남이와 유자광이다. 그런데 왕이 죽었다. 남이는 종친의 외척이자 개국공신의 손자라는 후광이라도 있었지만 유자광에겐 기댈 곳이 왕밖에 없었다. 유자광은 남이가 세조의 은혜를 갚기 위해 거사를 꾸몄다고 고발했다. 취조 과정에서 남이는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하면서 일찍이 한명회가 자신을 찾아와 ‘적(嫡)을 세우는 일’에 대해 말했다며 한명회를 끌어들인다. 세조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예종은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추존왕 덕종의 두 아들 월산대군과 자산군(성종)이 적장손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왕위 계승 문제로 확대될 조짐이 보이자 예종은 고발 사흘 만에 남이를 죽이고 사건을 종결했다. 유자광은 새 왕의 신임을 얻은 동시에 익대공신에 책봉된다.”

    예종이 즉위 14개월 만에 단명함으로써 유자광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예종의 아들은 갓난아기여서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 성종이 장자(월산대군)를 제치고 왕위에 오른 데는 장인이 한명회라는 사실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로써 세조의 집권을 도와 권좌에 올랐지만 세조에 의해 권좌에서 멀어졌던 원로 공신들이 다시 조정을 장악했다. 자신을 보호하고 밀어줄 예종마저 없어지자 유자광은 돌연 한명회를 탄핵하는 정치적 도박을 감행했다. 한명회 등이 섭정을 그만두겠다는 대왕대비를 만류해 성종의 친정체제 출범을 반대했다는 고발이었다. 이로써 젊은 왕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 성공한 유자광은 왕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대신 양반 관료 사회 전체를 적으로 만들었다.”

    간신이라는 이미지도 시대가 만든 것인가.

    “유자광이 쓴 상소문을 보면 문체가 화려하고 직설적이다. 그는 항상 왕의 뜻에 정확하게 맞는 주장을 남보다 먼저 더 강력하게 제기함으로써 왕의 마음을 살 수 있었다.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가차 없이 고발했고, 오로지 나라와 왕만을 위한 직언임을 강조했다. 유배지에서조차 지방 현감의 비리를 고발하거나 공물을 과도하게 징수하는 문제, 조선 수군의 배가 왜군을 막는 데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내용이 담긴 투서(봉사)를 끊임없이 왕에게 올려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복직 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국경의 요충지인 의주 방어책에 대한 상소를 두 차례나 제출했다. 그러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훗날 유자광을 탄핵한 대간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대간들이 유자광에게 밀리는 경우도 많았다. 대간들은 논리로 안 되면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의 말은 공론이라고 억지를 썼고 서출이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빈정거렸다.”

    사림의 과거사 정리법, 모든 잘못은 유자광 탓

    성종은 세조 대 이래 훈구 공신들과 과거의 정치적 유산을 청산하고 성리학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사림들 사이에서 세력 균형을 통해 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훈구와 사림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왕권에 절대 충성하는 유자광 같은 관료는 성종에게 매우 소중했다. 성종은 끝까지 유자광을 신임했고 많은 정적의 공격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었다. 하지만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전제적 왕권을 구축하려 한 연산군이 등장하면서 균형은 급속히 무너졌다. 무오사화 때 유자광은 악역을 맡음으로써 연산군에게 충성했지만 갑자사화 때에는 유자광의 마음이 이미 왕을 떠난 상태였다. 연산군을 끌어내리는 중종반정에 참여함으로써 정국공신에 오른다. 또 한 번 살아남은 것이다.

    중종반정 후 사림이 유자광을 갑자사화의 주동자로 몬 것은 ‘가짜 뉴스’라고 했다.

    “갑자사화는 유자광이 아니라 임사홍이 주도적 역할을 했는데 유자광을 지목한 것은 악의적 날조라기보다 기억의 문제다. 무오사화 때 유자광 같은 소인배 간신에게 당했다는 인식이 당시 신진 유학자와 관료, 유생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인 연산군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유자광이 원흉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심지어 유자광이 유배지에서 죽은 후 일종의 과거사를 정리할 때에도 모든 게 ‘유자광 탓’이라 해도 무방한 분위기가 됐다.”

    유자광은 시대를 잘못 만난 풍운아인가.

    “유자광은 국왕의 특은 외에는 출세가 불가능한 시대를 살았다. 1467년부터 1507년까지 그가 정치 무대에서 활동한 40년은 하필 조선왕조의 서얼 차별이 법제화·구조화되던 시기였다. 유자광에겐 치명적 시대사조였다. 대간들이 ‘공론’이라고 밀어붙이면 왕조차 어쩔 수 없는 분위기였다. 유자광이 중종반정의 1등 공신임에도 실권 후 유배지에서 죽음에 이른 것도 중종이 확실하게 그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종은 무력으로 왕을 내쫓고 즉위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사림의 공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림이 주도한 유교 국가 구현이 진정한 개혁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2014년에 출간한 ‘중종의 시대-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에서 사림의 정치 쇄신 운동은 ‘유교화 정풍운동’이었다고 새롭게 규정했다. 세조의 즉위를 찬탈로 보는 사림이 세조 때의 과거사를 바로잡고 유교적 가치를 현실 정치에 타협 없이 그대로 적용하려 했을 뿐 근본적인 제도 개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교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법치(法治)가 아닌 인치(人治)’다. 폐단이 발생하면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다스리는 사람의 인성 문제라고 본다. 구조는 내버려둔 채 수양만 강조한다. 또 조선의 유학자들은 주자학을 교조적으로 이해해 상하와 귀천의 구분이 하늘의 이치인 양 당연시했다. 정약용조차 공노비를 해방하면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상하가 문란해져 사회가 혼란해진다고 극구 반대했다. 서얼의 과거 응시 자체를 막아버린 건 사다리 걷어차기나 다름없다. 예비 관료 후보군을 없애버려 대대손손 기득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이르는 조선은 유교적 명분론을 앞세웠지만 정작 유교적 가치인 ‘입현무방’은 외면한 ‘이상한’ 유교국가였다. 이것이 유자광이라는 프리즘으로 본 시대상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유자광이 좀 더 일찍 태어났다면 어떻게 평가됐을까.

    “만약 유자광이 태종이나 세종 대에 활동했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특히 태종이라면 문무를 겸비한 그를 곁에 두고 책사로 썼을 것이다. 만약 ‘유교적 정풍운동’이 아니라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졌다면 굳이 유자광을 향해 출신이 미천하다는 말을 되풀이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능력이 있으면 쓰는 거니까. 유자광이 남긴 교훈도 있다. 오로지 국왕의 총애에 기댄 출세의 끝은 유배지에서의 쓸쓸한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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