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

이몽룡은 삼각지에서 동작나루까지 어느 길로 갔을까

용산 옛길 사라진 역사를 찾아서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3-05-27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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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잃어버린 120년, 되살리는 600년

    • 용산어린이정원 ‘가로수길’과 13번 게이트에 숨은 사연

    •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과 삼남대로

    • ‘연산군일기’에도 나온 ‘이태원로’, 지금은 어디?

    • 20번 게이트 앞에서 끊긴 조선 통신사 길

    • 진짜 이태원은 용산기지 안에 있었다

    5월 4일 개방된 용산어린이정원 중 가로수길 구간. 120년 동안 끊겼던 해남로(삼남로)의 주요 구간 중 하나다. [동아DB]

    5월 4일 개방된 용산어린이정원 중 가로수길 구간. 120년 동안 끊겼던 해남로(삼남로)의 주요 구간 중 하나다. [동아DB]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38길 21(용산동5가 2-1).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1주년을 앞두고 5월 4일 개방한 ‘용산어린이정원’의 공식 주소다. 이번에 임시 개방된 구역은 대통령실 인근 약 30만㎡(약 9만 평)로 용산기지 약 243만㎡(약 74만 평) 중 지난해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을 계기로 조기 반환된 58.4만㎡(약 18만 평)의 일부분이다.

    용산기지 터는 대통령실, 전쟁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구역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위가 좁고 아래가 둥근 복주머니 형태다. 북쪽 메인포스트와 남쪽 사우스포스트를 동서로 가르는 도로가 이태원로인데 지도상에서 보면 마치 복주머니 입구를 묶은 끈처럼 보인다. 삼각지역과 녹사평역을 잇는 지하철 6호선이 그 길 아래를 통과한다. 대통령실은 복주머니 둥근 부분의 상단 왼쪽에 있고, 이번에 조성된 용산어린이정원은 그 아래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지하철 신용산역 1번 출구에서 한강대로38길을 따라 걸으면 용산어린이정원의 주 출입구가 나온다. 용산기지의 총 21개 출입구 중 14번 게이트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 종합안내센터를 통과하면 차례로 용산홍보관, 용산서가, 전시관, 이음마당, 이벤트하우스를 지나 카페어울림에 이른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남쪽 방향으로 쭉 뻗은 길이 나온다. 길 양옆으로 플라타너스가 심어져 있어 ‘가로수길’로 불린다. 이 길 끝에 13번 게이트가 있다.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식 다음 날 출근길에 이용한 바로 그 문이다. 13번 게이트를 나오면 이촌역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방문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지하철역이다.

    5월 4일 용산어린이정원이 개방되자 언론은 일제히 ‘120년 금단의 땅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표제를 뽑았다. 그렇다. 너무나 오랜 세월 이곳은 대한민국 국민이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는 ‘남의 나라’였다. 반환 전 용산 미군기지의 공식 주소는 캘리포니아주. 대통령의 출근길을 따라 들어가보자. 13번 게이트를 통과하면 넓은 잔디광장을 놓고 양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이 보그 애비뉴, 오른쪽이 윌리엄스 애비뉴다. 이 가운데 보그 애비뉴가 이번에 용산어린이정원의 가로수길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보그 애비뉴 이전에 이 길은 무엇이었을까.

    이몽룡 노정기 “청파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아일보 1925년 12월 4일자 이광수 연재소설 ‘대춘향’. 거지꼴로 변복한 이몽룡을 그린 삽화가 실려 있다. [동아일보 캡처]

    동아일보 1925년 12월 4일자 이광수 연재소설 ‘대춘향’. 거지꼴로 변복한 이몽룡을 그린 삽화가 실려 있다. [동아일보 캡처]

    춘원 이광수는 1925년 9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3일까지 동아일보에 소설 ‘대춘향(大春香)’을 연재했다(1929년 ‘일설춘향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 “여봐라 방자야!”로 시작해 총 96회에 걸쳐 연재된 소설은 제66회(1925년 12월 4일자)에서 드디어 이몽룡이 장원급제를 한다. 어명을 받아 전라어사로 행차하기 전 이몽룡이 거지꼴로 변복하는 장면이 꽤나 흥미롭다.



    “어전에 하직하고 수의(繡衣수를 놓은 옷, 암행어사의 별칭) 유척(鍮尺·놋쇠 자), 삼마패(三馬牌)를 고두리뼈에 단단히 차고(…)철대 없는 파립(찢어진 갓)에 무명실로 끈을 달고 당만 남은 헌 망건에 갓풀관자 종이당줄 걸어 매고 다 떨어진 베도포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칠푼짜리 목통대에 다 해어진 맛부치를 웃대님 질끈 매고 변죽 없는 부채를 들고 암행어사란 부모처자에게도 알리지 못하는 법이라 고사당 하직만 하고 청파역졸 분부하고 남대문 썩 나서서 전라도로 내려간다.”

    한양 도성을 빠져나온 이묭룡이 전라도로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했다. 강변까지 오늘날 숭례문~서울역~삼각지로 이어지는 길을 이용했다.

    “칠패, 팔패, 이문골, 도저골, 쪽다리를 지나 청파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작이(동재기나루, 동작진) 바삐 건너 승방뜰 건너 남태령 넘어 인덕원 지나 과천에서 중화하고(中火·길을 가다 점심을 먹음)….”

    이는 판소리 ‘열녀춘향 수절가’ 중 ‘이몽룡 노정기’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낯선 지명들이지만 실제 있는 곳이다. 칠패와 팔패는 조선시대 순라군들이 8패로 나뉘어 도성을 순찰한 데서 나온 이름으로 현재 중구 봉래동에 칠패시장터라는 표석이 있다. 팔패는 칠패 바로 아래쪽 동네로 봉래동2가 부근이다. 이문골은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마을로 남관왕묘(南關王廟)의 이문(里門·도둑을 단속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운 문)에서 유래했다. 남관왕묘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도저골로 넘어가자. 도저골 또는 도제골은 이 일대에 복숭아나무와 닥나무가 많은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오늘날 중구 남대문로 5가와 용산구 동자동 일대에 해당한다.

    쪽다리와 청파배다리(청파주교)는 만초천(蔓草川)을 건너는 다리였다. 이곳에 처음 돌다리가 놓인 것은 연산군 때. 만초천은 북쪽 인왕산과 무악산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흘러온 물줄기(본류)와 남산 골짜기에서 시작해 용산기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흐른 물줄기(지류)가 남영역 부근에서 만나 한강으로 합류하는 천이다. 1900년대 초 만초천 본류 일대가 철도부지로 편입되면서 물길이 바뀌고, 1967년 복개공사로 청파로가 생기면서 땅밑으로 사라졌다. 현재 청파동1가 161번지에 청파배다리 표석이 있으나,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실제 배다리는 현 위치에서 300m남짓 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이라고 한다.

    석우(石隅)라고도 하는 돌모루는 남영동 굴다리 부근으로 추정하는데,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은 인왕산과 남산에서 흐르는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에서 물줄기가 휘어돌아 돌모루가 됐다고 풀이한다. 밥전거리는 한자로 반전거리(飯廛巨里)다. 글자 그대로 밥을 파는 집들이 모여 있다 해서 생긴 지명으로 삼각지 부근으로 추정한다. 인근 한강대로62길에 먹자골목이 형성돼 있는 것도 이와는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암행어사 이몽룡은 모래톱을 지나 동작진에 다다랐다. 숭례문에서 12리, 약 4.7km를 걸은 셈이다. 이묭룡은 여기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승방뜰(관악구 남현동에 있는 관음사 앞쪽 지역), 남태령, 인덕원을 차례로 지나 과천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삼각지에서 동작나루까지는 어떤 길로 갔을까.

    삼각지역에서 이촌역 잇는 지름길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 권27 ‘정리고(程里考·한양에서 전국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를 정리한 책)’에는 도성을 나와 전국으로 갈라지는 10개 대로가 나온다. 김정호는 이를 ‘성문분로(城門分路)라고 했다. 이 가운데 한양에서 남쪽(충청, 전라, 경상)으로 가는 세 갈림길은 동작나루를 건너는 해남로(8대로), 서빙고(또는 한강나루)에서 넘어가는 동래로(4대로), 노량나루와 연결되는 수원로(7대로)다.

    일단 숭례문을 나서면 청파배다리~청파역을 지나 석우참에서 세 갈래로 갈라졌다. 교통의 요지인 석우에 역참이 생긴 이유이기도 하다. 이순우 씨는 “이러한 행로를 살펴보면 오늘날의 용산 지역 전체가 그 옛날 삼남 지방을 향해 나아가는 길목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19세기 중반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 중 도성을 중심으로 한강 유역까지 그린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하단에 과천로로 표기된 길이 해남로 또는 삼남로의 한 구간이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세기 중반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 중 도성을 중심으로 한강 유역까지 그린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하단에 과천로로 표기된 길이 해남로 또는 삼남로의 한 구간이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21년에 제작된 조선지형도. 굵은 선 부분이 삼각지에서 동작나루까지 연결되는 지름길이다. 강변으로 둥글게 모래톱이 형성돼 있는 것도 보인다. [김천수]

    1921년에 제작된 조선지형도. 굵은 선 부분이 삼각지에서 동작나루까지 연결되는 지름길이다. 강변으로 둥글게 모래톱이 형성돼 있는 것도 보인다. [김천수]

    네이버 지도에서 이몽룡의 암행어사 길(과천로, 삼남로)을 따라가 보면, 오늘날 지하철 삼각지역(밥전거리)에서 이촌역(모래톱, 동작나루)을 잇는 지름길이 나온다. 5월 4일 개방된 용산어린이정원의 가로수길이 바로 그 구간의 일부다.

    네이버 지도에서 이몽룡의 암행어사 길(과천로, 삼남로)을 따라가 보면, 오늘날 지하철 삼각지역(밥전거리)에서 이촌역(모래톱, 동작나루)을 잇는 지름길이 나온다. 5월 4일 개방된 용산어린이정원의 가로수길이 바로 그 구간의 일부다.

    전라어사 이몽룡이 간 길은 해남로다. 민간에서는 삼남대로나 삼남길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 중 도성을 중심으로 한강 유역까지 그린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서는 과천로라고 표기했다.

    다시 이몽룡이 동작나루에서 배를 타기 직전 행로를 살펴보자. 밥전거리에서 모래톱으로 가는 지름길은 오늘날 삼각지역에서 이촌역을 직선으로 이으면 나온다. 김천수 지음건축도시연구소 부설 용산학연구센터장은 “이몽룡의 암행어사길을 따라가 보면 삼각지역 부근에서 용산어린이정원을 통과해 이촌역 방향으로 이어진다. 현재도 옛길이 남아 있다”고 했다. 오늘날 용산어린이정원에서 13번 게이트와 연결되는 ‘가로수길’이 바로 그 구간이다. 1921년 제작된 ‘조선지형도’를 보면 이미 일제에 의해 병영화가 진행됐음에도 이 옛길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 길은 소설 속 이묭룡만 다닌 게 아니다. 김천수 씨는 “삼남대로(해남로) 옛길은 한양 숭례문에서 전남 해남까지 군사는 물론 주요 물자가 이동하는 경로로서 한반도의 동맥과 같다. 오늘날 국도 1호선이 바로 이 삼남대로를 근간으로 형성됐다. 아쉽게도 한 세기 전 일제의 용산 병영이 들어서면서 주요 구간이 막혀버렸다”고 설명했다. 2019년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경기학광장’은 삼남대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삼남대로는 목적지가 해남과 제주도이며 호남으로 향하는 가장 큰 길이다. 해남과 제주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배지이기도 하여서 유배를 떠나거나 유배에서 풀려 돌아온 많은 이들이 밟은 길이기도 하다. 전남 강진과 신안으로 유배를 갔던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가 밟은 길이며 억울한 옥살이가 끝나고 백의종군을 위해 이순신 장군이 밟았던 경로이기도 하다.”

    5월 4일 용산어린이정원 개장과 함께 삼남대로 주요 구간이 120년 만에 연결됐다. 어쩌면 이순신도, 정약용도 지나갔을 이 구간에 ‘가로수길’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옛길의 품격에 걸맞은 새 이름이 필요한 이유다.

    “남묘, 이태원 지나 곧장 서빙고로 가는 게 첩길”

    3월 15일 ‘조선시대 통신사 행로 한양(용산) 구간 답사’ 행사가 열렸다. 조선시대통신사현창회, 조선사행로연구회, 용산학연구센터가 주최한 이 행사에서 답사한 구간은 숭례문~도저동 삼거리~남묘터~우수현~후암동~전생서터~남단 고개.

    조선 통신사(通信使)란 조선 후기 일본과 교류하기 위해 파견한 외교사절로, 300~500명 규모의 사절단이 평균 9개월에 걸쳐 왕복 4000㎞가 넘는 대장정을 했다. 2017년 조선 통신사가 남긴 기록물 333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통신사들은 동래로(4대로, 영남대로)를 이용해 부산까지 가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서빙고나루 또는 한강나루에서 강을 건너 용인~충주~조령~대구~동래까지 960리(약 377㎞)다. 그렇다면 숭례문을 나선 통신사들이 서빙고나루까지 어떤 길로 갔을까. 김정호의 ‘대동지지’ 정리고에는 부산으로 가는 행로가 이렇게 정리돼 있다.

    “숭례문 남쪽으로 이문동을 지나 주교, 청파역, 석우참까지 4리이다. 석우참 동남쪽으로 둔지산을 지나 서빙고나루에 이르기를 6리(한강진 아래 즉 한강나루 아래에 있고 숭례문에서 10리 거리다. 4대로를 보라. 이문동에서 도저동을 경유하여 남묘, 이태원을 지나 곧장 서빙고에 이르는 것이 첩로다.”

    부산으로 가려면 보통 청파배다리, 돌모루, 둔지산을 거쳐 서빙고나루로 가는데 남묘와 이태원에서 곧장 가는 샛길이 지름길이라는 설명이다.

    1951년 3월 16일 미군 항공촬영 사진 속 폐허가 된 남묘와 그 주변.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김천수]

    1951년 3월 16일 미군 항공촬영 사진 속 폐허가 된 남묘와 그 주변.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김천수]

    이태원 옛길의 흔적, 도저동 관우신

    인조 2년(1624) 통신사가 된 강홍중(1577~1642)은 도저동~남묘~이태원을 지나는 지름길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강홍중이 쓴 ‘동사록’에 사행길 첫날 가족 친지들과 전별식을 하고 도저동 삼거리에서 잤다고 기록했다. 도저동 삼거리는 현 서울역 맞은편 남대문경찰서 부근이다. 도저동, 도동으로 불리다가 이제는 지명조차 사라지고 후암삼거리 모퉁이에 있는 ‘도동집’이라는 식당 이름으로 기억될 뿐이다.

    도저동 인근에 남묘가 있었다. 남묘의 정식 명칭은 ‘남관왕묘(南關王廟)’. 임진왜란 때 관우(촉나라 장수)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남대문 밖에 세운 사당이다. 당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 진인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관우가 자신을 보호했다며 관왕묘 건립을 시작했고, 서울에는 동묘(신설동)와 남묘가 세워졌다. 특히 선조의 명으로 세워진 남묘는 임란 극복의 상징처럼 여겨져 대한제국 시기까지도 국가 사당의 기능을 했다. 관우신을 모시는 민간신앙이 널리 퍼지게 된 것도 남묘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1922년 동아일보 기록을 보면 단옷날 남묘 앞에서 그네타기를 비롯해 각종 행사가 열렸고, 소원을 비는 아낙네들로 남묘 앞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광복 후 복구했으나 1979년 대우빌딩과 힐튼호텔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사당은 사당동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폐허만 남았다. 오늘날 남묘 터는 중구 남대문로5가 GS주차빌딩 앞이다.

    우수현(牛首峴)은 용산구 동자동에서 후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를 넘어갈 때 모양이 마치 소머리를 닮아서 우수재라 했다거나 우수선생이라는 선비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매년 정월대보름이나 단옷날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돌싸움을 하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놀이라고 하지만 다치거나 죽는 사람까지 나와 의금부에서 금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남묘 터를 보고 우수현 고개를 넘어 서빙고로 가는 길목에 전생서(典牲署)가 있었다. 전생서란 조선시대에 궁중 제향에 쓸 제물을 관장하는 관아로 지금은 그 터에 영락보린원이 있다. 조선시대 통신사들은 전생서를 쉼터로 활용했다. 영조 39년(1763)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고구마 종자를 가져온 문익공 조엄이 전생서에서 쉬는데 영의정 홍봉한이 음식을 차려 전송했다는 기록을 남겼다.(조엄 ‘해사일기’)

    목멱산 남쪽, 이태원은 어디에 있었나

    전생서에서 두텁바위로 쪽으로 내려오면 용산중고등학교 정문 앞에 세워진 ‘이태원(梨泰院)터’ 표지석을 볼 수 있다. 표지석에는 ‘조선시대 일반 길손이 머물 수 있던 서울 근교 네 숙소의 한 곳’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역은 말을 빌려주는 곳, 원은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한양 4대 원이란 남대문 밖 이태원, 동대문 밖 보제원, 서대문 밖 홍제원, 광희문 밖 전관원을 가리킨다.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태원은 목멱산(남산) 남쪽에 있었다”고 했다. 조선시대 이태원은 한양에서 영남으로 가는 주요 길목인 청파역과 사평도(沙平渡·모래펄나루라는 뜻으로 오늘날 강남구 신사동 부근) 사이에 설치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산중고 4거리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은 상당한 경사로다. 이 길을 남단 고개라고 부르는 것은 이곳에 조선시대 왕들이 기우제를 지낸 남단(南壇)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 12년(1788)에 유의양이 왕명을 받아 조선시대 국가 제례를 정리한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남단 가운데 풍우뇌우신, 왼쪽에 성황지신, 오른쪽에 산천지신을 모셨다. 인조, 경종, 영조, 정조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남단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용산 미군기지(캠프 코이너 자리) 안에 돌무지 형태로 방치돼 있다. 김천수 씨는 “현재 남단으로 추정되는 구릉지 바로 옆이 주한 미국대사관 신축 부지여서 조속한 발굴 조사와 남단의 역사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남단 부근을 기억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곳이 임오군란(1882)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대에 납치를 당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데 있다. 청나라 황사림 부대 주둔지였고, 일본군 용산연병장이었으며, 엄복동이 전 조선자전차경주대회에서 우승한 장소이고, 대한민국 최초 포병훈련소가 있었던 장소다. 지금은 주한 미국대사관 이전 예정지다.

    아직 열리지 않은 비밀의 문 20번 게이트

    1956년, 현재 20번 게이트와 거의 동일한 위치에서 바라본 풍경. 북쪽의 서울 산들이 훨씬 더 잘 보인다. [김천수]

    1956년, 현재 20번 게이트와 거의 동일한 위치에서 바라본 풍경. 북쪽의 서울 산들이 훨씬 더 잘 보인다. [김천수]

    20번 게이트 앞에서 북쪽을 바라본 전경. 2022년 1월 1일 촬영한 것이다. 왼쪽이 용산 미군기지 캠프 코이너 담벼락이고 오른쪽은 옛 방위사업청(현재 국방홍보원과 국방부가 일부 사용)이다. 길 끝에 백악산(북악산)이 보인다. [김천수]

    20번 게이트 앞에서 북쪽을 바라본 전경. 2022년 1월 1일 촬영한 것이다. 왼쪽이 용산 미군기지 캠프 코이너 담벼락이고 오른쪽은 옛 방위사업청(현재 국방홍보원과 국방부가 일부 사용)이다. 길 끝에 백악산(북악산)이 보인다. [김천수]

    조선 통신사길 답사는 용산 미군기지 20번 게이트 앞에서 끝난다. 여기서 몸을 돌려 북쪽을 바라보면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쭉 이어진 길 끝에 정확히 삼각산(북한산)과 백악산(북악산)이 있다. 오른쪽으로 남산 정상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왼쪽은 고층 건물들에 가렸지만 조선시대였다면 인왕산과 무악산까지도 보였을 것이다.

    20번 게이트 안쪽은 비개방 구간이라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지만 길은 이어진다. 그 길이 평지가 아니라 완만한 구릉인 것은 둔지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산 미군기지 일대가 원래 ‘둔지방(屯之坊)’이라는 조선시대 행정구역이었다는 사실도 앞으로 고증돼야 할 부분이다. 현재 대통령실이 자리한 언덕도 둔지산 자락이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과거 우주목 또는 신목이라 불린 수백 년 된 노거수(엄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자연스럽게 길손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이어 옛 일본군 장교 숙소로 쓰였던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물이 나온다.

    이태원의 위치가 용산중고 앞이 아니라 용산 미군기지 안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 가장 유력한 장소가 위수병원 자리다. 1906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은 이태원을 없애고 그 자리에 위수병원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김천수 씨는 1906년 일본군이 제작한 ‘한국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에 표시된 이태원의 위치로 추정해 위수병원 자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일본인들이 남긴 ‘경성부사’ 제3권(1941)에도 이태원의 위치를 알려주는 대목이 있다.

    “사격장 서쪽으로 흐르는 작은 내에서 바로 서쪽에 물길이 꺾어지는 곳에 속칭 ‘자개우물’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우물이 바로 원에 소속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서 ‘원’은 이태원을 가리킨다. 이태원 터는 향후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필요한 지역 중 하나다. 옛 위수병원 옆 냇가가 남산 서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만든 만초천 지류다. 지금은 풀만 무성한 건천이지만 비가 오면 여전히 맑은 물이 흐른다.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만초천 본류가 청파로 아래로 사라진 것과 비교된다.

    위수병원 건물을 지나 21번 게이트에 도착하면 담장 너머로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이 문을 나가면 경리단길, 녹사평역으로 이어진다. 조선 통신사들은 20번 게이트와 21번 게이트를 잇는 길을 지나 곧장 서빙고나루로 갔을 것이다. 20번 게이트~우주목 쉼터(엄나무와 느티나무 쉼터)~용산기지 메인포스트(장교관사, 위수병원, 만초천 지류)~21번 게이트~이태원~녹사평~서빙고를 잇는 ‘이태원 옛길’이 하루빨리 개방돼야 한다.

    600년 길의 역사 미래 용산공원에 담아야

    용산어린이정원 조감도. [국토교통부]

    용산어린이정원 조감도. [국토교통부]

    이태원 옛길이 언제부터 이용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청파역과 사평원(현 신사역 부근) 사이를 잇는 구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태원로’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연산군일기’ 1504년 10월 10일자다.

    “녹양역부터 광릉산, 황산, 묘적산, 광진, 한강, 왕십리 근처까지 모두 금표 안에 넣고, 다만 남대문 밖 이태원길만 통하도록 하라.”(연산군일기 56권 1504년 10월 10일)

    연산군은 사냥과 유흥을 위해 의정부에서 한강에 이르는 주요 길을 모두 막아버렸지만 이태원길만큼은 열어두게 했다. 왕조차 동래로 가는 중요한 길을 막을 수는 없었던 듯하다.

    ‘옛길 위의 조선 통신사’의 저자이자 사학자인 양효성 씨는 “길은 단순히 용산의 한 구간을 잇는 것이 아니라 동래, 통영까지 그리고 조선 통신사 행로의 경우 일본 동경까지 길게 이어지고, 북으로는 한양 도성에서 의주와 북경까지 연결되는 것”이라며 끊어진 길을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길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행로의 경우 용산 청파역에서 출발해 한강진을 건너 문경 조령관문을 넘고 부산포에 이르기까지 32역을 거친다. 부산에서 대마(大馬)~일기(壹岐)~남도(藍島)까지 8참(站), 65역(驛)을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2015년 이 길을 직접 걸었는데 일본 구간에는 옛날 역참의 유적 표시와 안내판, 기념관 조성, 시장 개설, 여관까지 마련해놓아 이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라는 표시까지 해두었다. 우리는 용산공원화 과정에서 이태원 옛길 복원과 함께 길의 활용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2022년까지 서울시 도시전략사업팀에서 용산공원화 사업의 실무를 진행한 김홍렬 도시공학박사는 ‘이태원 옛길’에 대한 기억부터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이 만들고 미군이 사용해온 용산기지에 왜 20번 게이트와 21번 게이트가 생겼을까하는 의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일본이 병영을 만들기 훨씬 전부터 사람이 다니던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목적에서 최단거리로 이동하기 위해 길을 만들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다 보니 일본군이 차지하기 전 그곳에 길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했다. 그렇게 사라진 대표적인 지명이 둔지산과 둔지방이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에 대해 왜 하필 ‘오욕과 치욕의 역사’ 현장으로 가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옛 기록을 보면 분명히 그 길로 수많은 사람이 다녔고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앞으로 만들어지는 용산공원에는 그 이야기를 담아내야 한다.”

    이 기사를 작성하는 데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의 ‘잃어버린 이태원 옛길을 찾아서-600년 역사의 길을 함께 걷다’와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을 찾아서’,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학술 모임 용산 집(yongsan_zip) 주최 ‘잃어버린 이태원 옛길의 역사를 찾아서’ 세미나, 김홍렬 도시공학박사의 도움말과 서울시 용산공원 관련 자료집의 도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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