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봉투 사건으로 시대적 소명 종언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功 3, 過 7
몽니 부리지 말고 기득권 내려놔라
[+영상] 65년생 NL운동권 민경우 "제발 그만하자, 친구들아!"
민경우 대안연대 대표. [홍태식 기자]
그는 울분을 토해냈다. “이런 꼴 보이려 정치를 하느냐”고도 했다. 2019년 시작된 조국 사태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둘로 갈라놓았다. 86세대 맏형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를 둘러싼 최근의 돈 봉투 의혹은 대학 시절 ‘사회 변혁’을 꿈꿨던 일부 86세대에게는 모멸감으로 다가왔다. 총칼을 앞세워 권력을 잡은 군부 세력에 맞서 ‘깨끗함’과 ‘도덕성’으로 맞섰던 자신들의 젊은 날의 초상을 일순간 무너뜨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1965년생으로 1987년 당시 서울대 인문대학생회장으로 6월항쟁에 앞장선 민경우 대안연대 대표도 그렇다.
“지금껏 정치권에서 활동해온 86세대의 시대적 소명은 이번 돈 봉투 사건으로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시대 변화에 맞게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할 때다.”
민 대표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출신으로 1995년 이후 10년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으로 활동한 86세대 운동권 출신 인사다. 1983년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했으나 입학 후 중퇴하고 이듬해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 학생운동에 투신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전대협 시절부터 범민련 사무처장 활동까지 20년간 민족해방(NL) 계열에서 활동한 그는 2009년 ‘진보의 재구성’이란 책을 펴내고는 NL 운동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며 한국 현실에 걸맞은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사회운동과 별개로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인근에서 서울대 의대·국사학과에 잇달아 합격하게 한 ‘수학’ 실력을 입시를 앞둔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민경우 수학연구소’도 운영하고 있다. 민 대표와의 인터뷰는 ‘민경우 수학연구소’ 겸 ‘대안연대’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이 86세대 맏형 송영길 전 대표를 정조준하고 있다.
“1980년대에 (민주화운동에) 함께 활동한 사람이 그런 일에 연루돼 충격을 받았다.”
민 대표는 “2019년 조국 사태가 86세대 출신 공직자 개인의 부정 비리였다면, 이번 돈 봉투 의혹은 조직적 부정 비리일 수 있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그는 “돈 봉투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봐야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파장이 더 커질 수도 있어 보인다”고 우려했다.
돈 봉투 의혹으로 86세대 도덕성이 크게 훼손된 모습이다.
“86세대는 도덕성을 중시하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사건이 다발로 발생한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집단이든 부정 비리에 연루될 수 있다. 하지만 (사건이 불거졌을 때)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하는 대신 (오히려) 정치 탄압으로 몰면서 상황을 호도하는 게 더 큰 문제다.”
민 대표는 “송 전 대표가 솔직하게 진상을 밝히고 역사 앞에 깨끗하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이 같은 고언을 과연 송 전 대표가 수용할까. 현재로서는 회의적이다.
86세대는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2010년대 중반 이후 86세대 한계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하나는 도덕성 측면에서, 다른 하나는 노선, 생각에서 그렇다.”
민 대표는 “민주주의와 복지, 남북관계 등 86세대 이데올로기는 보완재 성격이 강하다”며 “문재인 정부 때 그 같은 이데올로기가 과잉 팽창됐고, (대선 때) 그에 대한 대중의 심판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송 전 대표를 둘러싼 돈 봉투 의혹은 86세대 역할이 마지막 국면에 접어든 한계를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86세대가 한국 사회, 한국 중앙 정치 무대에 대거 등장한 시점은 2000년 총선 때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이른바 ‘젊은 피 수혈’ 경쟁을 벌였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를 맡고 있던 새천년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은 이인영, 오영식, 임종석 등 전대협 1,2,3기 의장 출신 등 총학생회장 출신을 대거 영입했다. 야당이던 한나라당(현 국민의힘)도 오세훈, 원희룡, 나경원, 조윤선 등 86세대 인사를 경쟁적으로 영입했다. 23년 전 30대였던 그들은 대부분 50대가 됐고, 80년대 초반 학번은 환갑을 넘겨 60대가 됐다.
“수치화한다면 공 3, 과 7 정도 되지 않을까.”
민 대표는 △민주화 △복지 △남북 화해 세 분야에서 86세대의 공이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 분야에서 기본 원칙을 바로 세웠다기보다는 보완재로서 제한적 구실을 했다는 게 그의 평가다.
“경제성장과 외교·안보 등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핵심 의제 측면에서 86세대는 실력이 부족했다. 특히 문재인 정권 시절 부족한 점을 성찰하고 협력하는 대신 무리하게 권력을 확장하려다 전체적으로 과가 더 커졌다.”
앞으로 86세대는 한국 사회에서 어떤 구실을 해야 한다고 보나.
“심하게 얘기하면 86세대는 ‘몽니’를 부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몽니를 부리지 말라?
“정권 초반 높은 지지를 받았던 문재인 정권이 중후반 급속하게 민심이 이반돼 심판받은 것은 운동권 이념과 생각에 대한 국민 반발이 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윤석열 정권이 들어섰다. 그런데도 86세대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다시 자기들의 잘못된 생각을 연장하려 고집을 피운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은 문재인 정권이 왜 심판받았는지 냉정하게 돌아보고 성찰해야 할 때다. 86세대가 뭔가를 더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시대 추세에 맞게 내려놓아야 한다.”
조국 사태를 계기로 민 대표는 정치권에 몸담은 86세대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안연대’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최근 20년간 한국 사회에 과잉 공급된 86세대의 이데올로기를 돌려세워 새로운 시대에 맞게 한국 사회의 진로를 개척하는 일을 소박하게 하고 있다. 우선 민주화 세대, 86세대 집권기에 외교·안보에 대한 기본이 흔들렸다. 한미동맹을 기초로 한반도에 어떻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 것인지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도 ‘분배’와 ‘공정’ 이슈뿐 아니라 저성장 체제 속에서 어떻게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성장을 북돋울지 고민 중이다.”
신동아 6월호 표지.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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