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 日 반도체 점유율 전망 ‘흐림’
불황에 투자하는 과감함, 日엔 없어
1980년대 TSMC에 “그래봐야 하청회사”
기술에만 집착, 비용 절감에선 뒤져
美日 반도체 협정, 상황판단 못한 日 잘못도 커
비즈니스로 본 日 vs 안보 문제로 본 美
中 때리는 美,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글 싣는 순서
① “美·대만과 뭉쳐야 산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② 원스어게인? ‘일장기 반도체’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③ “삼성에 뒤처졌는데 도요타까지 현대차에 밀린다”
④ 반도체 1등 韓, 소재 장비 1등 日 뭉치면 美 두렵지 않다
“일본은 서서히 끓는 냄비 속 개구리”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10년 후, 20년 후 내가 지금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 비관적이다. 기회가 된다면 외국에서 살고 싶다. 일본 사람들은 무엇보다 변화를 싫어한다. 일을 하는 사람이나 하지 않는 사람이나 월급이 똑같다. 일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겠는가.일본에 살고 있으면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다. 물이 천천히 끓고 있는 냄비에 들어 있는 개구리처럼 말이다. 뒤늦게 반도체를 다시 해보겠다고 하지만 비관적이다. 지금 할 수 있다면 옛날에는 왜 하지 못했나. 반도체도 삼성에 밀렸는데 이제는 유일한 희망인 도요타 자동차까지 밀리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크다. 5년 뒤 세계는 전기차 세상으로 갈 텐데 과연 도요타가 지금처럼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회사가 될 수 있을까.
반도체도 기존 질서와 기득권에 머물다가 혁신하지 못했다. 도요타도 마찬가지다. 엔진 자동차가 워낙 잘나가니까 협력업체 등 굳건한 생태계를 깨기가 힘든 거다. 1등에게 혁신은 손해 보는 게 더 많다. 그래서 어려운 거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가 정치다. 한국은 그래도 5년마다 정권이 바뀌면서 아직도 뭔가 해보려는 변화의 에너지가 사회 전체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일본은 자민당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이 엄살이 아니라는 것은 실제 경제지표에서도 드러난다. 환율 물가를 고려한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일본의 1인당 국민총생산(GDP)은 2018년 한국에 추월당했다. 수년 내 명목 달러 기준으로도 뒤처질 전망이다. 한때 세계 2위였던 일본 경제는 중국, 독일에 역전당해 4위로 밀려날 처지다.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앞서 소개한 기자의 말에서 한때 세계 최고였으나 지금은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이 없는 반도체 산업 추락에 대한 트라우마가 짙게 느껴졌다.
일본 기업들은 한때 ‘세계 최초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개발’ ‘세계 최초 킬로바이트급 D램(DRAM) 양산 공정 개발’ ‘세계 최초의 이미지센서(CMOS) 양산’ ‘세계 최고 슈퍼컴퓨터 개발’ 등등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불과 한 세대 전인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 세계 반도체 매출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쓰, 미쓰비시, 마쓰시다는 ‘6대 공룡’이라 불리며 세계 반도체 시장의 50%(1988년 53%)를 점유했었다. 지금 세계시장 점유율은 한 자릿수(7%)다. 세계 15위에 키옥시아 한 곳만 이름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21년 6월 발표한 ‘반도체 전략 보고서’에서 “이대로 가면 2030년 일본의 반도체 점유율은 ‘제로(0)’가 될 것”이라고까지 경고했다. 일본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삼성맨들의 이구동성 ‘강력한 오너십’
필자는 지난해 책 ‘이건희 반도체 전쟁’을 쓰면서 전직 삼성 CEO들로부터 일본의 반도체 패인(敗因)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들은 이야기가 있다. 한마디로 ‘강력한 오너십’이 없었다는 거였다. 김광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의 말이다.“적자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공장을 짓고 웨이퍼 크기를 늘리는 파격적인 결정은 일본 회사들 처지에선 상상을 못 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본 회사들은 오너십 구조가 아니라 은행, 증권사가 회사 지분을 나눠 갖고 있기 때문에 당해 연도에 벌어들인 이익 범위 안에서 내년 투자를 결정합니다. 투자에 당연히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죠.
삼성은 호암이나 이건희 회장이 ‘공장 짓자’ 하면 적자고 뭐고 와장창 지었습니다. 의사결정과 행동이 빠르고 파격적이었습니다. 조 단위 돈이 들어가는 의사결정을 할 때도 회장께 구두로 보고하면 끝이었으니까요.
일본 반도체 기업 사람들은 이런 삼성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놀라워했습니다. 자기네들은 신규 투자에 합의가 됐더라도 이사회를 설득해야 하고 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도 투자자를 설득해야 하는 등 절차가 많다는 거였습니다. 운신의 폭이 굉장히 제한된 의사결정 구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이윤우 전 부회장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일본이 한국과의 반도체 전쟁에서 왜 졌느냐를 가만히 따져보면 오너 경영과 전문경영인이라는 시스템 차이가 컸다고 봅니다. 사장들은 다음 자리인 회장으로 가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리스크 테이킹’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죠. 한마디로 절대적인 의사결정자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 반도체같이 변화가 빠르고 집중 투자가 필요한 분야에서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세계 1등을 하다가 1985년 중반부터 2000년으로 가면서 1~3 제너레이션 정도 투자가 늦어져 완전히 뒤처지게 됐으니까요.”
실제로 기자가 올 초 일본에서 만난 반도체 전문가들도 “삼성 반도체의 성공은 불황에 투자하는 과감함이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사실 말이 쉽지 불황에 투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권오현 전 부회장의 말이다.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고, 그 진폭이 말도 못 하게 큰 반도체 사업에서 이런 사이클에 흔들리지 않고 한번 정한 원칙을 일관되게 밀고 나갔던 오너의 집념과 의지가 일본을 이긴 결정적 동력이라고 봅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20년 동안 고점(高點)이 왔다가 곧 큰 폭으로 떨어지고, 이어 다시 고점이 왔다가 또 떨어지는 ‘사이클 비즈니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선 고점이 오면 과잉 투자하게 되고, 또 얼마 안 있어 공급과잉이 돼 값이 떨어져 불황이 찾아오고, 불황 때에는 값이 떨어지니까 투자를 못 하고, 몇 년이 지나면 값이 다시 올라가는 반복적인 비즈니스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1980년대,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후반까지 시장 상황이 계속 그랬다고 보면 됩니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확고한 신념 그리고 커미트먼트(commitment·약속)로 불황에도 계속 투자했습니다. 불황 때 투자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지만 장비를 싸게 구매할 수 있는 유리한 점도 있습니다. 불황 때 상대적으로 싼값으로 부지런히 건물을 지어 양산 준비가 얼추 끝났을 때 호황이 찾아오면서 이득을 보게 되는 거죠.
이에 비해 일본 기업들은 투자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불황 때에는 투자 결정을 주저하다가 항상 호황 근처에서 투자를 했으니까요. 호황 때에는 ‘생산’이 중요한데 건물 짓고 장비를 들여오는 등 공장 셋업하고 생산을 시작할 때쯤 되면 불황이 오는 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계속 엇박자를 낸 거죠.
말이 쉽지 강력한 리더십이 없으면 불황에 투자하는 결정은 하지 못합니다. 임기가 있는 전문 경영인 처지에서는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공장 짓자는 결정을 내리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성의 최고경영자를 지낸 반도체맨들의 분석을 과연 당사자인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이 될 것이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문화적으로도 비슷한 조건을 가진 일본의 경험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가장 참고할 수 있는 반면교사이자 타산지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SEAJ 고바야시 아키히데 사무국장. [도쿄=허문명 기자]
“한국이 반도체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일본 엔지니어들이 주말을 틈타 서울에 가서 기술을 많이 전수해주고 은퇴해서도 한국으로 건너가 기술을 가르쳐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저는 이분들을 많이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한국은 투자에 대한 신속하고 과감한 결정으로 반도체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한국은 환경이 어려울 때에도 과감하게 투자했고 이것이 업황의 사이클이 올라갈 때 다른 회사들을 제친 원동력이 됐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투자의 신속성과 방법의 과감성이 비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일본 업체들은 전문경영인이 투자를 하려고 해도 오너나 주주들이 브레이크를 걸어서 제때 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환경이 어려울 때 과감한 투자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업들이 했다는 것은 존경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1970년 서울특파원으로 부임해 생전에 호암과 교류했던 니혼게이자이신문 야마자키 가쓰히코 씨도 기자와의 만남에서 삼성의 오너십 경영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문답으로 정리해본다.
-삼성 경영을 일본식 경영과 비교했을 때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면?
“가장 큰 차이는 오너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결단을 내린다는 거다. 오너의 결단은 ‘하늘의 목소리’라는 게 삼성의 경영 방식이었다. 일본에는 당시 그런 대담한 경영자가 없었다. 모두 합의제 방식으로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중했지만 시간이 결리고 결산이 늦어지거나 했다. 삼성은 뭐든 빨리 다 결정하고 하겠다고 정하면 전력을 다해서 몰두했다. 일본은 그렇지 못했다.”
-이건희 회장이나 선대 이병철 회장 모두 일본 기업으로부터 항상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한다고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다. 일본이 틀림없는 기술 선진국이었기 때문이다. 반도체 이전에 삼성전자가 설립된 것이 1969년이었던가? 내가 부임하기 1~2년 전 일이다. 옛 삼성 빌딩이 반도 호텔 앞에 있었는데 8층짜리 건물로 기억한다. 그 빌딩 내부 작은 방 입구에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라는 간판이 있었는데 그 간판을 본 적이 있다. 삼성이 전자, 전기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오늘날 연구개발거점이 된 수원 부지도 가본 적이 있다. 땅은 굉장히 넓었는데 막사 같은 건물이 덩그러니 한 동 세워졌을 뿐이었다. 거기서 산요전기로부터 기술 공여를 받아서 TV를 조립하기 시작했던 그런 시기였다. 부산에서는 NEC 기술을 배워서 형광등 공장을 세웠는데 가본 적이 있다. 역시 매우 작은 공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시작했던 기업이었으니 당연히 기술 측면에서는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배운 것들이었다. 거리가 가깝고 오가기 편리했으니까. 또 그때만 해도 한국에는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일본도 적극 협력했는데 그건 호암이 일본 기업인들을 비롯해 정재계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 크다. 호암은 발이 대단히 넓었다. 내게 불쑥 전화를 해서 ‘이런 저런 사람들과 밥 먹는데 같이 가자’ 초대를 했던 적도 많았다. 가보면 일본의 대기업, 큰 회사 대표님들이 있곤 했다. 계절마다 일본에 왔는데 시간을 분초 단위로 쪼개서 사람을 만나고 공부를 했다.”
그는 삼성이 전자산업을 시작할 때부터 시장의 수요, 즉 소비자들의 니즈(needs)를 읽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했다.
“비즈니스에서 중요한 건 첫째 기술력이 뛰어나야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 제품을 팔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좋은 제품을 만들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팔릴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NEC였다. 물론 NEC의 기술은 매우 뛰어났고 첨단 분야로 점점 더 발전해 나갔다. 컴퓨터도 NEC로부터 비롯됐다. 하지만 마케팅에 제대로 신경쓰지 않았다. 이에 비해 삼성은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 팔릴 것인가 하는 ‘유저 마인드’가 강했다. 나는 이런 삼성의 분위기를 일본 기업인들에게 전하면서 ‘삼성을 본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삼성은 절대 일본을 따라잡지 못할 것”
필자는 이번 도쿄 현지 취재 과정에서 반도체 기업에서 일하고 은퇴한 엔지니어 몇 명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한국과 일본의 경우 반도체 개발을 향한 목표가 달랐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이즈미야 와타루 산교타임스 대표. [도쿄=허문명 기자]
도쿄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나는 아직도 기사를 쓰는 현역 기자”라며 “얼마 전 백악관을 출입했던 미국의 최장수 여기자가 죽었으니 이제 나야말로 전 세계 언론사에서 나이가 많은 고참 기자일 것”이라고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시종일관 힘이 넘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일본의 반도체 전문가들에게 반도체 역사를 누가 제일 잘 알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이즈미야 대표를 꼽는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오랜 기간 현장을 취재하며 일본 기업들의 흥망을 지켜본 기자도 드물다는 거였다. 이런 경력을 인정받아서인지 일본 반도체협회 부회장도 지냈다.
여기에 ‘일본 반도체 50년사’ ‘이것이 반도체의 전모다!’ ‘일본 반도체 기사회생의 역전’ ‘차세대 디스플레이-승자의 전략’ 등 관련 저서를 30여 권 펴낸 작가이기도 했다.
도쿄에 폭설이 내린 올해 2월 중순, 하루를 분초 단위로 쪼개 쓴다는 그와 어렵게 인터뷰가 성사됐다. 시내에 있는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그는 노트북을 켜놓고 기사를 쓰고 있었다. 전설의 일본인 레슬러 이노키가 링에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경기 사진이 벽에 걸려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와 마주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일본 반도체 패인을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오만함 때문이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말이다.
“일본 반도체는 1989년이 정점이었습니다. 한국은 당시 민주화운동 절정기였지요. 일본은 1980년대만 해도 국가가 반도체 육성 프로젝트를 직접 만들면서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를 했지만 이후 40여 년간 투자는 거의 제로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스고이 간단!(정말 쉬운 답이라는 뜻) 일본 사람들은 거만해 있었습니다. 대만이나 한국은 절대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1980년 초에 삼성전자가 첫 번째 세운 기흥 공장에 직접 가서 64KD램 설계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으로서는 처음일 겁니다. 그때 놀랐던 것은 삼성 사람들의 열정이었습니다. 정말 목숨을 걸고 일한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일본으로 돌아가서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삼성이 곧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 것 같다’고 했더니 코웃음을 치더군요.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일본을 따라가지 못할 거라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삼성이 대규모 공격 투자를 할 때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기억이 있습니다. 1987년 대만의 TSMC가 만들어질 때 역시 일본인으로서는 처음 현지 취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매우 능력 있는 엔지니어들과 미국에서 건너온 우수한 사람들이 고국인 대만에 귀국해서 일하고 있었는데 정말 열심이었습니다. 일본 반도체 엔지니어들에게 이런 TSMC 분위기를 전했더니 ‘하청회사라서 성공할 리가 없다’고들 했던 게 기억납니다.
기업 수명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데 특히 첨단 반도체 기업들의 흥망 사이클의 진폭은 매우 큽니다.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반도체 전문기자가 된 1977년만 해도 반도체 시장 세계 최고 강자는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였습니다. 석유 탐사 기계를 만들어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긴 TI는 반도체 부문에 진출해 순식간에 세계 정상에 올랐습니다. 아마 15년 연속 세계 최고 자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일본의 반도체 업계 출입기자들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한 기자가 술을 들이켜며 이렇게 말한 것이 기억에 납니다. ‘TI가 쓰러지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기술과 양산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부동의 세계 1위다. 당분간 이 기업을 이길 반도체업체의 등장은 상상하기 어렵다.’
결과는 어땠습니까.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일본 기업들이 급속히 두각을 나타내면서 1985년부터 1990년까지 6년간은 NEC가 세계 1위 자리에 올랐지 않았습니까. 이 무렵 일본 모 반도체 기업 임원이 ‘미국에서 배울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도 미국을 누르고 눌러서 계속 이기는 것뿐이다’라고 호언장담하는 말을 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1980년대 후반 일본 반도체 세계시장 점유율은 50%를 넘어 정점에 있었습니다. 일본 경제는 버블경제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종합상사 부장이었던 제 친구는 ‘두고 봐라. 미국 맨해튼 중심가 빌딩은 모조리 일본이 사들일 거다. 돈으로 안 될 게 뭐가 있겠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부터 시작된 일본의 경기침체는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 아니었습니까. 전자산업도 추락 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자만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봅니다. 한때 세계를 석권했던 일본 반도체의 의기양양한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우렁찼던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그와의 대화를 마치고 일어서며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다.
반도체 업황은 왜 그렇게 호황과 불황 사이클 진폭이 큰 건가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이렇게 짧게 말했다.
“글쎄요, 40몇 년간 반도체업계를 지켜봐 왔지만 아직도 분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이폰의 의미를 간과했다”
실제로 업계에서 오랜 기간 일해온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수소문 끝에 기자는 일본의 대표적 소재장비 회사에서 일하는 임원급 엔지니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익명 인터뷰를 원했다.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1998년 입사했는데 그때부터 일본 전자 대기업들은 반도체 사업을 접고 있었다고 했다.
“제가 입사하던 그해 도시바까지 D램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이후 D램 업체는 엘피다(일본 정부가 구조조정 끝에 야심만만게 출범시킨 메모리 반도체 회사였다. 하지만 2012년에 파산한다.) 한 곳만 남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왜 그렇게 된 거죠.
“저는 일본과 한국 반도체 회사들의 목표가 출발부터 달랐다는 점을 짚고 싶습니다. 일본 업체들은 종합전자 업체들로 자신들의 제품인 워크맨이나 비디오, CD플레이어, 텔레비전에 쓸 반도체를 생산했습니다. 그런데 전자제품 수요가 줄면서 반도체 수요도 줄고, 그러다 보니 가격도 떨어지고 하니까 점점 ‘사업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메모리 먼저 관두고, 낸드 관두고 이런 식으로 말이죠. 반도체 말고도 텔레비전이나 오디오, 비디오 같은 확실한 출구가 있으니까 여기에 집중하자는 판단을 한 측면도 있습니다. 여기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규모 투자를 해서 가격경쟁을 벌이니까 일본까지 경쟁하는 건 소모전이라는 판단도 있었습니다.
2000년 대 초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메모리가 아니라 비메모리인 시스템 반도체로 가자고 정했는데 그 역시 자기네 회사들이 만드는 최종 제품에 들어가는 거였습니다. 그때부터 서서히 세계 반도체 시장은 퀄컴이나 엔비디아처럼 설계만 하는 회사(팹리스), TSMC처럼 제조만 하는 파운드리 회사, 후공정 회사, 최종 제품 조립 회사들로 분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마트폰·노트북 가격도 싸지고 디바이스 성능 개선도 빨라졌죠. 일본은 이렇게 다양하게 분화되는 시장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앞서 말했다시피 일본 전자제품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된 것이고, 두 번째가 결정적인데 2008년에 나온 아이폰의 의미를 간과한 것입니다.
아이폰은 최종적으로 소모되는 반도체의 제품이 아예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제조회사 즉 공급자가 만드는 제품이 아니라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어떤 목적에 부합하는 스마트폰, 이를테면 5G에 필요한 반도체라든지, 블루투스에 필요한 반도체라든지 칩 종류가 매우 다양해졌는데 일본 회사들은 오로지 자기 제품에만 넣을 반도체를 만들겠다는 전략을 편 거죠. 시장 흐름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점점 설계만하고 제조는 대만의 TSMC에 맡기자는 식으로 흘러갔습니다.
이와 함께 일본은 점점 인구 1억3000만 명이 소비하는 내수 위주로 산업 자체가 바뀌어왔습니다. 한국처럼 수출에 목을 매는 상황이 아니게 된 거죠. 전자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지 않습니다. 자동차 비중이 더 높습니다. 제가 10년 전 계산해보니 파친코 산업이 일본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반도체 매출의 10배가 넘었습니다. 굳이 반도체산업을 키울 이유가 없었던 거죠.”
그가 지적했던 “구조적으로 한국과 일본 반도체업체들의 목표가 처음부터 달랐다”는 지적은 신선했다. 그렇다면 뭐가 구체적으로 달랐을까.
기자는 수소문 끝에 삼성에서 일했던 일본인 엔지니어를 만날 수 있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시점이어서 그는 줌 인터뷰를 원했다.
삼성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1987년인가 1988년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NEC에서 설계부장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삼성으로부터 기술 교류 제의가 왔습니다. 진대제 사장이 D램 설계 담당총괄이었고, 황창규 사장이 개발담당 총괄이었습니다. 이 두 분야를 모두 총괄한 사람이 이윤우 부회장이었고요.
표현이 좀 거슬릴 수 있겠지만 당시 NEC는 삼성에 배운다기보다 가르치는 입장이었습니다. D램 설계 디자인부터 공정, 제품 테스트까지 삼성을 도와주는 거였습니다. 기술 교류를 먼저 제안했던 삼성의 경영진도 NEC가 진심으로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들었습니다.”
NEC는 왜 삼성을 도와줬나요.
“당시 NEC 경영진은 기술 도입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경영진은 ‘우리가 아무리 기술이 앞선다고 해도 부족한 부분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고 오픈해서 기술 교류를 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로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을 지적해주면 윈윈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 그런 윈윈이 이뤄졌습니다.
우리가 삼성에서 배운 것은 열정과 가능성이었습니다. 전 직원이 일에 대한 집중력과 집념이 대단해 하루가 다르게 기술 발전에서 큰 진전을 이뤄내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선진 기술을 벤치마킹할 때 단지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하려는 노력이 대단했습니다.”
기술 매진했던 日, 비용절감에서 뒤졌다
그는 “당시만 해도 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일본에서도 새로운 산업이어서 엔지니어들의 혁신과 도전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전자 사업 분야보다 높았다”며 “그런 분위기가 개방적 기술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데 한몫한 것 같다”면서 말을 이었다.“알다시피 1980년대 후반만 해도 일본에는 메모리 반도체의 세계적 강자가 많지 않았습니까. D램은 새롭게 떠오르는 신산업이다 보니 시장을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진입 장벽을 높게 쌓아 각자의 기득권을 지키기보다 서로 협업하고 기술을 발전시켜 시장을 넓혀가자는 문화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엔지니어들도 새로운 기술이 있다면 그것이 어느 나라 것이든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테크놀로지에 대해 보수적으로 생각하는 벽이 낮았다는 말이죠. 따라서 반도체 기술 교류는 다른 어떤 산업보다 쉬웠습니다. 혁신과 도전을 원하는 엔지니어들끼리는 기술 교류가 가능했던 환경이었으니까요.
한국은 비록 초기에 일본보다 뒤졌지만 ‘미래 테크놀로지는 반도체에 달려 있으니 여기에 집중하자’는 경영진의 의지가 굉장히 강했습니다. 직원들도 ‘선진 기술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리소스를 모아 집중하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열정과 의지, 집념이 매우 강했습니다. 기술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상상력과 태도입니다. 삼성의 판단이 결과적으로 옳았다는 걸 지금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다 삼성으로 입사까지 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네요.
“삼성전자에 입사한 것은 기술 교류가 한참 이뤄진 뒤인 2004년이었습니다. 황창규 사장이 반도체 총괄사장을 할 때인데 제게 입사를 제안해서 가게 됐습니다. 맡은 일은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쟁사, 더군다나 한일관계가 특수하다는 걸 감안한다면 일본인 기술자가 한국 기업에 간다는 결정에 대해 업계 동료나 주변 반응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일본 업계로 봐서는 배신행위라고 보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술자들은 그런 판단 이전에 기술개발과 혁신에 대한 호기심, 열정이 큽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서 소개했듯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기술 교류 과정에서 삼성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따라잡는 과정을 보면서 놀란 적이 많았습니다. 단순한 모방이 아닌 혁신을 통해 앞서나가는 것을 보면서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바로 저런 기업이야말로 혁신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으니까요. 제가 삼성으로 옮긴 시점은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가 활력을 잃고 추락하는 시기였던 데 반해 삼성은 굉장히 집요하게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삼성의 약진을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느낀 계기가 있었나요.
“1메가에서 4메가 갈 때였습니다. ‘어쩌면 삼성이 일본을 추월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조짐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투자에 대한 과감한 의사결정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삼성이 일본은 감히 하지 못했던 대규모 설비투자를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점에서 세상을 굉장히 놀라게 했습니다. 웨이퍼 인치를 8인치에서 12인치로 가는 과정에서도 국내외 업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과감한 투자를 했습니다. 반면에 일본의 많은 기업은 주저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듯 삼성은 불황 국면에서 다들 겁먹고 두려워할 때 과감하게 투자를 늘렸습니다. 또 제가 대단하다고 본 것은 코스트(비용) 개념이 철저했다는 거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제조업은 기술력이 좌우하지만 그와 함께 비용 관리도 굉장히 중요한데 삼성을 보면 제조업 코스트 관리 면에서 굉장히 강점을 가진 회사였습니다. 비용 절감에 대한 노력이 뛰어났으니까요.”
일본 기업들은 그렇지 않았나요.
“일본 기업들은 기술 자체에 대한 집착이 컸습니다.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위기를 맞으면서 야심만만하게 출발한 엘피다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엘피다 운영 방식을 보면서 저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요?
“엘피다는 당시 범용 메모리, 그래픽 메모리를 만들었는데 주로 중점을 둔 것이 서버에 들어가는 서버용 메모리였습니다. 이미 시대는 개인용 컴퓨터 시대로 넘어갔고, 질 좋고 오래 쓰는 것보다는 대중이 원하는 값싼 제품들을 내놓아야 하는 시대가 됐는데 엘피다는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원가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제품의 질에만 집착했습니다. 기술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코스트를 등한시하고 무조건 좋은 질의 D램만 만들려 하는 엘피다 방식은 제 생각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삼성은 질도 물론 좋았지만 비용 개념이 있었고, D램도 범용이 아닌 다양하게 많은 용도의 칩을 만들었습니다. 제 눈에는 그런 챌린저 의식, 도전자 정신이 좋아 보였습니다.
디램은 대량생산으로 승부를 내야 합니다. 그래서 코스트와 원가 개념이 중요합니다. 비메모리는 지적 물품인 데 비해 메모리는 제품에 탑재만 하면 됩니다. 하품(下品)이라고 생각하지만 PC 위주 반도체 수요가 점차 정보 가전과 모바일 수요로 대체되면서 대중이 원하는 것은 싼값의 다변화 구조에 적합한 범용 칩이었습니다. 일본 기업들은 이런 시장이나 소비자 마인드에 집중하기보다 제품의 질 자체를 강조하다 보니 비트가 올라갈 때(1기가에서 2기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국제사회에서 반도체 후진국이 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 역시 일본 반도체 회사들과 한국이 출발부터 달랐다는 말을 했다.
“NEC,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 같은 종합가전업체에 반도체 사업은 메인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통신이나 가전 사업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았습니다. ‘반도체는 여력이 있으면 하는 사업’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보니 삼성처럼 올인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죠. 일본은 국내 시장을, 삼성은 세계시장을 겨냥했죠. 목표에 따른 스타트가 달랐던 겁니다.”
오너와 전문경영인 체제 차이라는 말도 하던데요.
“그것도 맞습니다. 일본은 의사결정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보텁업 체제입니다. 하지만 삼성을 비롯한 한국 기업들은 톱다운 체제죠. 저는 개인적으로 경영에서는 톱다운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건희 회장을 만난 적이 있나요.
“물론이죠. 여러 번 뵈었습니다.”
어떤 분이었나요.
“무엇보다도 시장의 미래를 읽는 매크로 감각이 뛰어났습니다. 산업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전체적인 그림 속에서 삼성의 포지션이 뭔가를 인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할까요.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자적 혜안이 뛰어난 경영자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으니까요. 그리고 목표를 세우되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밀어붙였던 것도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봅니다.”
일본에 비슷한 경영자가 있다면.
“이나모리 가즈오가 생각납니다.”
삼성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요.
“이미 1등이기 때문에 어려움도 크리라 봅니다. 1등이라는 것이 하기도 어렵지만 유지하기는 더 어렵지 않은가요. 더욱이 요즘 반도체 기술은 미세화 프로세스 공정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상황입니다. 예전에는 2세대, 3세대 용량을 팍팍 늘릴 수 있었지만 이제는 기술적, 물리적, 학문적으로 미세화 공정이 한계가 온 상황에서 2나노 이하 칩 시대로 접어들려면 지금까지의 반도체 재료인 실리콘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칩에 구멍을 더 내고 두께를 더 얇게 만드는 일을 더는 할 수 없기 때문이죠. 삼성이 이 장벽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 궁금합니다.
또 하나 어려운 문제는 과거에 비해 뛰어난 인재가 많이 줄었다는 점입니다. 옛날에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뛰어난 인재도 많았고, 2000년대만 해도 이윤우·임형규·진대제·황창규·조수인·전동수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인재 층이 얇아 보입니다.
삼성은 지금 반도체에 대한 종합적인 테클로놀로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대만의 TSMC가 왜 강하냐면 파운드리를 하면서도 패키징 공정도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패키징은 지금 매우 중요한 공정입니다. TSMC는 토털 솔루션 프로바이드 업체를 지향하고 있는데 삼성도 그쪽으로 경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그리는 큰 판에서 보라
‘2030 반도체 지정학’의 저자 오타 야스히코. [도쿄=허문명 기자]
그는 1986년 체결한 미일 반도체 협정에 있었던 비밀 합의 사항을 먼저 언급했다.
내용이 뭐였나요.
“양국 정부 관계자들만 아는 비공개 부속 문서 형태로 합의 사항이 붙어 있었는데 ‘5년 내에 일본 시장에서 미국 반도체 점유율을 20% 이상으로 끌어올리라’는 거였습니다. 이른바 ‘20% 문구’로 미국이 자기 나라 제품을 일본이 무작정 사도록 강요하는 대표적 불공정 조항이었죠. 그 후 일본 반도체 회사 영업맨들은 일본 반도체가 아니라 미국 반도체를 팔러 다녀야 하는 기괴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조항이 있었다는 게 당시 일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나카소네 총리가 ‘동맹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대국적으로 보자’며 합의를 우선시한 결과였습니다. 나카소네 총리는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론’과 ‘야스’라고 부를 정도로 매우 친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미국의 압력 앞에 선택지가 별로 없었고요.
‘20%’ 문구는 이후 ‘미일 간 약속이었다’는 미국 측 주장과 ‘약속이 아니었다’는 일본 측 입장이 엇갈리면서 싸움이 벌어졌고, 미국 정부는 급기야 일본 정부가 약속을 어겼다며 추가 경제제재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뼈아픈 역사입니다.”
미국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반도체를 보는 미국과 일본의 시각이 달랐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미국 반도체산업이 종주국 지위를 잃고 쇠퇴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완력으로 일본을 누르려 한다고들 했지만 미국은 단지 업계나 일자리를 위해 반도체산업을 지키려고 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잘 몰랐겠지만 미국은 반도체를 이미 그때부터 국가를 지키는 안보 품목으로 봤습니다.”
그는 미일 반도체 전쟁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 경제 외교 최전선을 담당했던 일본 정부 관료로부터 들었던 말을 소개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일본 협상 당사자였던 그 일본인 관료는 워싱턴 펜타곤(국방부)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 국방부 관료들한테 ‘일본 반도체는 일반 소비자들이 쓰는 제품이다. 군사 목적으로는 개발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자 갑자기 미 국방부 관료가 반도체 칩 케이스를 집어 들더니 ‘이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당신들은 알고나 있느냐’며 핏대를 세우고 화를 내더라는 겁니다. 미국이 생각하는 반도체와 일본이 생각하는 반도체가 개념부터 달랐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죠.
미국은 반도체에 대한 주도권을 잃는 것을 경제 이전에 군사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토록 중요한 안보 산업을 동맹국인 일본이 망하게 하려 하고 있으니 미국 국방 당사자들이 보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몰랐던 일본은 ‘품질과 가격 면에서 뛰어난 일본 반도체가 미국에서 잘 팔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미국의 조치를 용서할 수 없다’는 비즈니스 관점에서만 생각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미일 반도체 협정은 출발 시점부터 이렇게 서로 관점이 어긋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타 씨는 이어 “1996년 7월 미일 반도체 협정이 만료됐던 밴쿠버 협상 현장도 그런 대목의 연장선상에서 잊히지 않는 경험이었다”고 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빌 클린턴이었고 일본 총리는 하시모토 류타로였습니다. 미국 측은 협상을 지속할 것을 요구했고 일본은 끝내자고 했습니다. 두 정상이 협상 시간을 7월 말일로 합의했기 때문에 미국 무역대표부(USTR)와 일본 경제산업성은 연일 철야 협상을 계속했습니다. 시한까지 합의하지 못해 양측 모두가 단념할 때 즈음 누군가 ‘시계를 멈추자’고 제안했습니다. 시간제한인 자정을 넘기더라도 시간이 경과하지 않은 걸로 하자는 거였죠. 그 정도로 치열한 협상이었습니다.
그 전날 일본 측 협상 책임자 중 한 명과 나눴던 대화가 기억이 납니다. 협상이 이렇게 교착상태인데 타결이 될 수 있을지 묻자 그는 ‘백악관에서 전화가 왔기 때문에 타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일본 밀어붙이기를 중단하라’는 클린턴의 지침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세심하고 꼼꼼하게 챙기고 있음을 상징한 거죠. 백악관뿐이었겠습니까. 협상이 한창 진행되던 때, 전화 회의로 열린 USTR 기자회견장에서는 오퍼레이터 착오로 미국 측 대표였던 미키 캔터가 집무실에서 하는 말이 참가자 전원에게 들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왜 펜타곤이 지금 이런 말을 하는거야? 펜타곤과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와’라며 호통치는 목소리였습니다.
수십 초에 불과한 아주 짧은 대화였고 당황한 대변인이 급히 회선을 끊어 말을 더는 들을 수 없었지만 USTR과 국방부가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습니다. 교섭 전선에서 겉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USTR이었지만 막후에서는 국방부를 포함한 국가 중추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었던 거죠.
20년 전 국가 중추의 의지로 반도체 지킨 美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뿐 아니라 자동차 협상에서도 격렬하게 불꽃을 튀겼지만 자동차 마찰은 산업과 무역이라는 ‘경제 문제’였습니다. 반도체 협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미국은 안보 관점에서 생각했습니다.미일 반도체 협정은 매우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일본 잘못이 큽니다. 일본은 반도체를 단순히 비즈니스 관점으로만 보았습니다. 물건을 싸고 좋게만 만들면 팔리는 게 당연하다는 마켓 메커니즘 관점으로만 본 거죠. 미국은 그때도 반도체를 국가를 지키는 안보 문제로 보고 있었습니다. 반도체가 국력의 기둥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의 활력을 떨어뜨린 후 그렇게 번 시간을 이용해 자국 내 반도체산업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1996년 교섭에서는 미국에 협장 연장을 단념시키며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시기는 미국의 반도체산업이 활기를 되찾은 부흥기와 겹칩니다.
미일 반도체 협정은 일본 입장에서는 동맹이니까 미국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흘렀고 우리는 지금 불꽃 튀는 미·중 대결을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가치관이 다른 국가의 충돌이기 때문에 미일 마찰과는 차원이 다른 싸움입니다. 미국은 속내를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중국을 무너뜨리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동맹국에도 이익과 기술 공유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태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