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앞에 설치한 널찍한 돌 기단
광화문·대한문·돈화문 월대 사라져
광화문 월대 올해 10월 복원
세종로로 덮여버린 광화문 앞 철로
상처 기억해야 미학 제대로 수웅
경복궁 광화문 전면부 월대 복원 공사 현장. [문화재청]
근정전 월대, 화려한 장식
월대는 조선시대 궁궐 전각과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설치한 널찍한 돌 기단이다. 한자로는 ‘月臺’라고 쓰는데, ‘월견대(月見臺)’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월견대는 달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 사뭇 낭만적이다. 이 낭만적 표현에는 건물의 권위를 높이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월대 위에는 다른 구조물이나 지붕을 설치하지 않는다. 월대에선 달을 보아야 하고, 각종 의식을 거행하기 때문이다.조선시대 각 궁궐의 정전(正殿)과 정문 앞,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의 앞, 성균관 명륜당 앞 등에 월대가 있다. 길쭉한 장방형 화강암으로 측면을 쌓고 윗부분은 얇고 넓은 박석(薄石)이나 벽돌(塼)을 깔았다. 높이는 대략 1m 내외이며 1단인 경우도 있고 2단인 경우도 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월대는 경복궁 근정전의 월대다. 근정전 월대는 건물의 동·서·남쪽 3개면에 걸쳐 상하 2단으로 조성됐다. 전체적으로 치장이 많아 그 모양이 화려하다. 치장은 남쪽 계단과 난간에서 두드러진다.
남쪽의 중앙 계단은 임금이 다니는 답도(踏道)다. 답도 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넓적한 돌판을 장식했다. 그 좌우로 서수(瑞獸·상서로운 동물)를 새긴 소맷돌을 설치했다. 중앙 계단은 이렇게 근엄하고 장중하다.
경복궁 근정전 월대의 해태상. [이광표]
조선시대 월대의 난간에 이렇게 많은 동물을 조각한 곳은 근정전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근정전 월대 난간에는 왜 이렇게 많은 동물을 조각해 화려하게 치장한 것일까. 근정전과 경복궁을 지켜달라는 염원을 표현한 것이리라. 이는 조선 왕조의 안녕과 번영에 대한 기원이기도 했다. 좀 더 확장해 해석하면, 음양오행 주역의 원리를 적용해 이상적인 공간으로 꾸미고자 한 것이다. 이를 두고 “우주 공간을 지향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근정전의 월대에는 방위 수호와 척사(斥邪)의 의미, 주역의 원리, 익살과 낭만의 멋 등이 담겨 있다. 특히 난간에서 두드러진다. 근정전의 월대는 그 상징적 의미와 별개로, 시각적으로는 멋지게 장식한 구조물이다. 다소 쓸쓸하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던 시기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때. “한 왕조가 쇠락할 때는 절제보다는 치장이 우세한 경향이 있다”는 어느 학자의 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절제의 미학, 종묘 정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의 정전. 가로로 쫙 펼쳐진 건물과 널찍한 월대(앞마당에 설치한 섬돌)가 정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동아DB]
종묘는 제의 공간이라 엄숙하다. 종묘에는 정전과 영녕전이 있는데 모두 그 앞에 월대가 붙어 있다. 두 월대 모두 매력적이지만 정전의 월대가 단연 압도적이다. 종묘 정전 월대의 매력은 정전의 매력과 그대로 이어진다.
정전의 정문은 남문이다. 조상의 혼백이 드나든다고 해서 신문(神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남문에 들어서면 월대가 나타난다. 그 너머로 길고 거대한 목조건물이 쫙 펼쳐진다. 건물은 길고 거대하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정면 25칸에 지붕의 좌우는 100m가 넘는다. 종묘 정전은 1395년 처음 지을 때 정면 7칸(7실)이었지만 이후 계속 늘어났다. 정전은 몸을 쫙 깔고 대지와 한몸을 이룬 듯한 모습이다. 군더더기나 지루함은 발견할 수 없다. 힘찬 간결함으로 종묘 정전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월대를 지나 정전 건물의 한쪽 끝으로 다가가면, 맞은편으로 반복 배치한 기둥이 눈에 들어온다. 이 기둥들을 열주(列柱)라 한다. 열주의 한쪽 끝에서 맞은편을 바라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다. 무한히 반복되는 기둥은 왕조의 영속을, 하늘 끝까지 수평으로 날아갈 듯한 지붕은 영원과 무한을 상징한다. 열주의 아득함을 헤치고 경외감과 신비감이 몰려온다.
열주를 등지면 월대가 눈에 들어온다. 정전 앞에서 남문 가까이까지 드넓게 펼쳐진 월대. 동서 109m, 남북 69m. 눈앞에는 월대와 정전 건물과 담장만 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전의 묘정(廟庭)은 그 자체로 완벽한 공간이다. 묘정 밖은 울창한 숲이지만 내부에는 나무 한 그루 없다. 묘정에서만 하늘이 보인다. 조상 즉 신과 만나는 곳이기에 하늘의 영적인 힘이 충만토록 고려한 것이다. 엄숙과 정밀(靜謐), 현재와 과거,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혼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전 건물도 그렇지만, 월대 또한 일체의 과장이나 허식을 배제하고 있다. 정전의 월대엔 난간도 없다. 측면을 장대석으로 마무리하고 윗부분에 자연스러운 모양의 박석을 깔았을 뿐이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수많은 박석은 은근한 율동감을 만들어낸다. 지나치거나 경박하지 않은 묘한 출렁거림이 느껴진다.
종묘 정전의 월대에는 이처럼 있어야 할 것만 있을 뿐 더하고 뺄 것이 없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전과 월대는 그저 간결하고 단순하다. 단순함과 절제가 종묘 정전의 공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필자는 조선시대 최고의 월대로 종묘 정전의 월대를 꼽는다. 근정전 월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종묘에서는 지금도 매년 종묘제례(宗廟祭禮)가 열린다. 종묘제례는 조선시대 임금이 친히 제를 올릴 만큼 가장 중요하고 격식이 높은 제의였다. 일제강점기에 겨우 명맥만 유지했고 광복 후 한때 중단됐지만 1975년부터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주관으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종묘제례를 올릴 때에는 그 제의를 장엄하게 하려고 종묘제례악을 연주한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시대의 기악 연주와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궁중음악의 정수다. 이러한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모두 월대 위에서 거행된다.
종묘는 이렇게 하드웨어(건축물)와 소프트웨어(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가 공존하는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 종묘는 사적이고 정전은 국보이며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다. 또한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이와 유사한 예로는 팔만대장경이 있다. 팔만대장경(해인사 대장경판)은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藏經板殿)에 보관돼 있다. 팔만대장경은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고, 팔만대장경은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모두 국보와 세계유산의 반열에 오른 경우다.
종묘 정전 하면, 목조건축물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월대가 없다면 종묘 정전은 존재 의미가 없다. 월대 없는 종묘 정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궁궐 정문 월대의 수난
경복궁 근정전의 월대와 종묘 정전의 월대는 그 분위기가 전혀 다르지만 모두 온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궁궐 정문의 월대는 좀 사정이 다르다. 경복궁 광화문, 창덕궁 돈화문, 덕수궁 대한문 같은 궁궐 정문의 월대는 궁궐 바깥의 도로와 맞닿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조선의 궁궐을 의도적으로 파괴했고, 도로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정문과 월대를 훼손했다.덕수궁의 대한문은 월대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월대가 사라진 시기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로 추정된다. 이후 1927년 일제는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대한문을 뒤로 옮겼다. 이어 1968년엔 도로 확장을 위해 대한문 옆 동편 담장을 뒤로 밀어냈다. 1970년 대한문도 뒤따라 뒤쪽으로 이동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지금 대한문을 보면 월대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대한문 기둥 앞에 옛 월대의 부재(용머리가 조각된 길죽한 석재, 龍頭石)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대한문 월대는 이렇게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문화재청은 현대 대한문 월대를 옛 모습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엔 복원이 아니라 재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지금의 대한문이 원래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월대를 되살린다고 해도 그건 복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창덕궁 돈화문 월대도 수난을 당했다. 돈화문 월대는 1900년대 초 궁궐 안으로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진입로를 만들면서 아스팔트 도로 아래로 묻히고 말았다. 이후 1996년 월대를 덮은 아스팔트를 걷어내 월대를 드러냈다. 그러나 시민들이 월대를 오르내리는 데 어려움이 있어 2020년 다시 한번 월대 복원 및 개선 공사를 진행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광화문 월대도 수난을 피해가지 못했다. 경복궁을 처음 지었을 때 광화문 앞에 월대가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지금 거론하는 광화문 월대는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건축된 것이다. 광화문 월대는 1923년 일제가 전차선로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파괴됐다. 일제는 광화문 월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전차선로를 깔았다. 1923년 9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경복궁 영추문~광화문 사이에 전차를 부설할 예정이어서 광화문 앞 돌난간을 헐어버릴 것”이라고 나온다. 그 철길 위로 1966년까지 전차가 다녔다.
1990년부터 경복궁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문화재청은 광화문 월대 복원을 전제로 이 일대를 추가 발굴해왔다. 그 결과, 월대의 흔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광화문 월대의 규모는 남북 길이 48.7m, 동서 길이 29.7m, 높이 70㎝. 가운데에 임금이 다니던 7m 폭의 어도(御道)가 있었다.
광화문 월대의 대체적인 형태는 발굴 이전에도 사진 자료를 통해 확인이 가능했다. 옛 사진을 보면, 월대 좌우로 난간이 설치됐고 좌우 각각 난간기둥(석주·石柱)이 20개씩 서 있다. 난간기둥 등 난간의 부재들은 철거 후 경복궁 경내의 영제교 근처에 방치됐다. 부재들은 대부분 1940~1970년대 사이 경기 구리시의 동구릉으로 옮겨진 것으로 확인됐다(전나나, ‘경복궁 광화문 월대의 난간석 복원에 관한 고찰’). 난간기둥 가운데 하나는 경복궁 경내 건청궁 뒤편 녹산(鹿山)에서 발견된 바 있다.
녹산은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그 시신을 불태웠던 곳이다. 광화문 월대의 상처가 참으로 깊이 배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제 수난의 광화문 월대가 올 10월 복원된다. 시각적인 형태 복원 못지않게 그 상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전차선로의 아이러니
광화문 월대를 이야기하면서 전차선로를 빼놓을 수 없다. 발굴 현장을 공개한 올해 3월, 월대 못지않게 사람들을 관심을 끈 것은 Y자 모양의 전차선로였다. 지금이라도 전차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레일과 침목이 모두 생생해 보였다.전차선로가 어떻게 저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 것일까. 1966년 당시 세종로 지하도 공사를 하면서 전차선로를 들어내지 않고 그대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자꾸만 궁금증이 생긴다. 선로를 철거하고 공사하는 것이 정석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시급한 공사였다고 해도 철길을 그대로 둔 채 그걸 덮어버리고 도로 공사를 했다니,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는 일제가 건설한 전차선로의 흔적을 생생하게 확인했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이번에 발굴이 진행되지 않았더라면, 1920년대 광화문 앞 전차 철길의 흔적을 육안으로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6년 당시에 철길을 걷어내고 기록한 뒤 철로 일부와 침목 일부 등을 박물관 같은 곳에 보관했어야 옳다. 광화문 월대 유구의 구체적 확인, 전차선로 확인이라는 성과도 중요하지만, 1966년 전차선로 상황은 자꾸만 씁쓸하게 다가온다.
철로와 침목은 경기 의왕시 철도박물관으로 옮겨진다고 한다. 광화문 월대를 파괴하고 들어선 전차선로이지만 우리는 이제 월대와 전차선로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둘 다 광화문 주변 우리 근현대사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광화문 월대를 기억하는 만큼 우리는 전차선로도 잘 기억해야 한다. 광화문의 상처를 기억할 때 월대의 미학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