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상상력 대표 산물
자신의 소속이 ‘지구’라 할 경우
책임 묻기가 까다로운 공화정
과격주의·모험주의엔 동의 안 해
타도·파괴·전복 아닌 설계도 마련
‘전통적 혁명’과 다른 7가지 특징
[Gettyimage]
유기체 또는 초유기체의 일종인 국가도 수명의 제약이 있다. 여러 기관으로 구성된 생체 시스템이건, 법령으로 규정된 기구 및 절차, 불문율의 관행으로 운용하는 국가행정 시스템이건 내재된 수명이 있을 것이다. 평소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양질의 영양분을 섭취하는 사람이 과식·과음하고 운동하지 않는 사람보다 오래 살듯 적은 자원을 투입하고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국가는 지속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젊은 국가의 반전
국가공동체와 사회공동체 중 무엇이 더 본질적인가. 유발 하라리가 상기한 것처럼 인간이 타 동물종과 다른 길을 걸은 결정적 이유는 ‘상상력’이다. ‘국가’는 상상력의 대표적 산물 중 하나다. 실존하는 개인 간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고 이런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규칙, 문화, 제도 등을 일컬어 ‘사회’라고 한다. 국가가 없더라도 사회는 존재할 수 있다. 국가보다 더 본질적인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그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안정된 삶과 행복을 위해 수명을 다해가는 국가를 근본적으로 고쳐 쓰던지, 정 안되면 기존 국가 틀을 폐기하고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지속가능한 사회와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 고쳐 쓰기 어려울 정도가 된 국가는 교체할 수 있다’는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국가주의 영향력 아래에서 주입되고 강화된 애국심의 도그마에 빠진 상태에서는 거부감이 클 수 있다. 그러나 특정 국가 구성원이 아닌 코즈모폴리턴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본인의 소속을 ‘지구’라고 밝히는 이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는 현상을 감안해보자. 그럼 대한민국은 내가 이 시대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우연히 만나게 된 임의의 국가 틀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수명은 얼마나 남았을까. 빠르게 단축되고 있다면 당연히 이를 되돌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근육이 굳어버린 고령자가 젊은 시절처럼 유연성을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쉽지도 않다. 어쩌면 악화하는 속도를 더디게 하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1960~70년대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젊은 국가 중 하나였다. 지금은 고령화와 인구 감소의 속도가 인류 역사에서 역대급으로 빠르다. 인구 감소가 시작된 상황에서 급감 중인 출산율을 적용하면 절대 인구의 수축 속도는 더 가속화된다. 인구절벽과 관련된 문제는 추후 별도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현재의 국가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면 새로운 국가상(國家像)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교육부가 4월 24일 발표한 ‘중장기(2024~2027년) 초·중등 교과 교원 수급계획’에서 학령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점을 반영해 2027년까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교사 신규 채용 규모를 지금보다 20~30% 줄이기로 했다. 사진은 이날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하교하는 모습. [뉴스1]
정교하게 설계된 대안 질서
역사가 쌓일수록 여러 영역에서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기득권이 강화된다. 소위 ‘파워 엘리트 그룹’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정치, 법조, 행정, 금융, 산업, 군사, 언론, 교육 등 다양한 부문에서 활동한다. 그들의 결정과 행동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지위와 영향력으로 인해 일반 대중과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기득권 수호를 위해 변화 및 개혁 노력을 봉쇄한다. 이로써 대중의 이익을 저해하고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성을 증대시킨다.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이전에 합의한 자원 배분 원칙과 절차도 늘 재검토되며 수정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현상 변경을 원치 않는 이해당사자 그룹이 논의와 개혁을 봉쇄하면 그로 인한 피해는 대중이 감수해야 한다. 건강한 사회는 모순을 스스로 해결할 역동성을 발휘하나 병든 사회는 모순과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없다. 구조에 피로가 누적되고 임계점을 넘으면 붕괴는 필연이다. 국가도 예외일 수 없다. 왕정에서는 왕이 책임지면 된다. 시민 스스로가 주인인 공화정에서는 책임을 묻기가 까다롭다.
작금의 나라 상황을 보면 수십 년을 지속하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한 확신이 줄어든다. 수십 년간 압축성장을 지속하다 보니 관성 때문에 감속해야 할 때 하지 못하고 초고속으로 노화가 진행 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대책 없이 무너뜨리자는 과격주의나 모험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럼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되 언젠가 붕괴하는 경우에 대비해 사전에 ‘슬로모션 혁명’을 논의할 필요가 있겠다.
‘전통적 혁명’은 힘으로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슬로모션 혁명’은 자연 붕괴에 대비하는 것이지 인위적 전복을 의도하지 않는다. 지속 불가능한 지경에 내몰린 기존 체제가 외부 충격 또는 내부압력으로 무너지더라도 짧은 시간 내에 혼란을 최소화하고 정교하게 설계된 대안 질서를 안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타도, 파괴, 전복의 목적이 아니라 혼란 상황에 대비한 설계도를 미리 그려놓자는 것이다.
단기간에 압축된 힘의 폭발적 분출로 기존 체제를 엎어버리는 기존의 혁명 방식과는 다르다. 장기간 시민의 집단지성을 기반으로 해 토론과 숙의를 거쳐 업그레이드된 국가의 분야별 상세 설계도를 그리고 이 조각들을 맞춰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물론 단위별 검증 및 체계 검증을 거쳐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혼란을 예방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무지의 장막
러시아혁명 100주년인 2017년 11월 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 레닌 동상 앞에서 공산당원 200여 명이 “레닌은 살아 있다”고 외치며 집회를 벌이고 있다. [동아DB]
첫째, 당장의 ‘반역’이 아니라 미래의 ‘대안’이다. 기존 체제를 힘으로 깨려고 하면 할수록 기득권자의 저항이 거세진다. 이 과정에서 작은 개선을 위해 필요한, 남아 있는 에너지마저 소진할 것이다. 상대의 힘과 무게에 맞서지 않으면서 유연하고 장기적이고 평화적이며 합리적으로 진행하는 변혁 방법론이다.
둘째, 주체의 구성과 규모가 다르다. 전통적 혁명에는 생사(生死)를 함께 하는 결사체 성격의 주체세력이 존재하는 반면, 슬로모션 혁명은 상식적 다수 시민과 그 의사를 충실히 반영하고자 하는 전문가들의 집단지성을 통해 구현된다. 계몽주의와 선민의식을 장착한 소수 혁명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 시민의 상식과 균형감각을 기반으로 해 진행된다. 엘리트주의적 접근에서 대중은 종종 혁명의 도구로 동원된 이후 오래잖아 다시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쉬웠다. 이에 반해 광범위한 시민 대중 지식 및 실천 운동의 성격을 띠면 특정 세력에 이용당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
셋째, 적용되는 시간 개념이 다르다. 전통적 혁명은 장기간 고착된 기존 구조와 질서를 뒤엎기 위해 에너지를 일시에 분출하며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진행된다. 슬로모션 혁명은 적어도 20~30년에 걸쳐 진행되는 초장기 프로젝트다.
넷째, 참여자들의 심리 상태와 소통 방법이 다르다. 전통적 혁명에서는 특정 시점에서 체제 전복의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그쯤 되면 이미 사회 저변에 짙게 깔려 있을 대중의 분노와 정의감을 자극한다. 이를 위해 선전과 선동이 주된 수단으로 활용되고, 심리적으로는 흥분과 격정이 지배할 것이다. 슬로모션 혁명에서는 앞으로 도래할 가능성이 높으나 시점을 특정하기는 어려운 체제 붕괴에 대비해 미리 차분하고 냉정하게 토론하면서 설계도를 만들어간다. 주된 수단으로는 설득과 타협이 활용될 것이다.
다섯째, 역할 분담이 다르다. 전통적 혁명은 주도한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쥐고 집행권을 행사하는 방식을 띠었다. 신분제 계급 타파를 넘어 절대 평등 사회 구현을 목적으로 한 공산혁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혁명 이후 혁명의 주체세력이 새로운 특수 계급이 되는 모순적 현상이 역사 속에서 흔히 관찰된다. 슬로모션 혁명은 매우 장기간에 걸친 논의와 준비를 전제로 삼는다. 이에 새로운 체제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이를 실제로 운영하는 사람들이 연령과 세대에서 자연스럽게 분리될 것이다. 기간이 단축될 경우를 대비해 초기부터 설계자와 운영자 사이의 엄격한 역할 분리를 제도화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합의에 참여하는 사람들 간에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존 롤스의 ‘정의론’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모든 조건이 백지화된 원초적 상황 속에서 생각해보자는 사고 실험) 뒤에서 합의가 이뤄지면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여섯째, 기존 체제와의 공존 가능 여부가 다르다. 슬로모션 혁명은 기존 체제와 대립적, 투쟁적 관계에 서지 않는다. 기존 체제에 대한 개량 노력은 지속하되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한 ‘플랜 B’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대안 없이 혼란이 왔을 경우 공동체 전체가 겪어야 할 고통과 비용은 막대하다. 이를 생각하면 ‘무지의 장막’ 형식의 사고 실험을 통해 앞으로의 혼란상에 대한 예방적 논의를 해두는 것은 효율적이고 건설적인 조치다. ‘혁명’은 기존 체제를 뒤엎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 세력은 새로운 시도를 적대시, 악마화해 혁명 시도를 봉쇄, 무산하려는 본능적 대응을 하게 마련이다. 슬로모션 혁명에서 논의되는 개선안은 기존 체제에서 채택할 수도 있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기존 체제에 문제해결책을 공급하는 협력적, 보완적 관계에 설 수도 있다.
일곱째, 투명성과 개방성이 다르다. 전통적 혁명은 소수의 사람들이 숨어서 논의하고 실행에 옮긴다. 발각되면 엄청난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슬로모션 혁명은 광범위한 시민 참여를 통해 진행되므로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인다.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조건
슬로모션 ‘혁명’이라는 이름에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기존 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는 혁명이 맞지만, 위에서 열거한 여러 이유로 본질과 속성상 혁명이라 부르기 어려운 대목도 많이 있다. 전통적 혁명은 성공하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과정에서 감당할 혼란과 고통이 매우 크다. 역사적으로 성공 확률이 높지도 않다. 그럼 슬로모션 혁명은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나. 이런 방식이 원래 존재하던 것은 아니므로 사례가 전혀 없어 알 수 없다.성공적으로 구현된다는 보장도 없는 이런 일을 수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 노력하며 추진할 필요가 있는가. 마땅한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추진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체제의 모순이 누적되며 발생하는 고통과 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 때문에 적기에 필요한 개혁이 이뤄지기가 어렵다. 좋은 설계도를 만들어놓으면 기존 체제에서 개혁이 필요할 때 전체를 일시에 바꾸는 효과는 내지 못해도 새 설계도의 일부를 개혁에 가져다 쓰거나 참고하는 부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왕이 없는 정치체제로서의 공화국은 역사 속에 예외적이었다. 근대시민혁명 이후 비로소 입헌군주정을 포함하는 공화정이 보편적 정치체제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왕국의 생애주기에 관해서는 역사 속에 다양한 사례가 있다. 이에 반해 공화국의 종말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역사적 경험이다. 인류가 충분히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다.
서두에 논의했듯 어떤 존재도 영원할 수 없고 공화국도 예외가 아니다. 기존 체제의 자연 붕괴가 예상한 기간 안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슬로모션 혁명의 취지는 언제가 됐든 공화국의 종말 단계가 다가왔을 때 잘 준비하고 있다가 국가 운영체계(OS)의 대규모 업그레이드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시민들이 기획자로, 전문가들이 개발자로 참여해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대규모 오픈소스 국가 운영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라고도 할 수 있다.
소수의 사람이 만들어낸 설계도에 의존하기보다 다수의 시민, 전문가가 오랜 기간 대화·토론·합의를 통해 설계도를 만들어보자.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후기 조선왕조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김세연
● 1972년 출생
●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졸업
● 제18·19·20대 국회의원
● 前 여의도연구원 원장
● 前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 저서 : ‘리셋 대한민국’(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