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환상극장

계집종 순매가 벌인 슬픈 유희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3-06-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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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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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공과 헤어져 만나지 못한 지 어언 한 해가 지났어요. 다시 그 이름을 불러봅니다. 운종가의 풍류선비 이정하. 비천한 계집종 주제에 감히 양반 이름 석 자를 또다시 입에 담아버리고 말았어요. 지난 묵은 인연들이 파도처럼 물밀려들어 저지른 작은 어리석음이라 여겨주세요.

    이번 생에선 더는 만날 수 없는 인연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이 서신을 올리게 된 까닭은 무언가 분한 마음이 있어서도, 달랠 길 없는 여한이나 미련이 남아서도 아니에요. 그저 선비님께 향했던 쇤네의 진정이 다 가닿지 못한 것 같아서, 혹여 이 순매와의 인연을 젊은 시절 혈기가 빚은 지저분한 기억쯤으로 남기실까 저어해서지요.

    순매는 상공 어른을 온 마음을 다해 연모하고 사모하였습니다. 쇤네가 상공께 바친 애절함과 간절함을 말로는 이루 다 전해드릴 길이 없어요. 그건 말로 되지 않는 것인 걸요. 천 번의 은혜로운 입맞춤과 만 번의 감미로운 속삭임으로도 부족해요. 하지만 상공께선 항상 절 의심하시고 진짜 속마음이 달리 있을 거라 불안해하셨어요. 물론 쇤네 탓이겠지요. 늘 만날 약속을 어기거나 미루기만 하는 계집을 어찌 예쁘게만 보실 수 있으셨을까요?

    첫 만남

    종묘 옆 묘동 방진사댁 몸종이었던 저는 갓 열다섯 살에 운종가 근처 모곡동으로 시집왔어요. 상공 어른을 우물가에서 우연히 마주치기 꼭 3년 전이었습니다. 관비였던 남편은 저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았고, 술 마시기를 유난히 좋아해 애초에 살뜰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신혼 초 잠깐 받아본 정 외에는 부부로서 애틋함이라곤 눈 씻고도 찾을 길 없는 그런 사내였지요. 게다가 형조로 근무지를 옮긴 그이는 모시는 분 위세를 믿어선지 더욱 난폭해졌고 집을 비우는 날도 차츰 많아졌어요.

    선비님의 동정을 사려는 마음 털끝만치도 없지만 당시 쇤네는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있었어요. 묘동 주인댁에선 시도 때도 없이 절 불러 집안 대소사 궂은일을 시키셨는데, 차라리 예전으로 돌아가 주인댁 일만 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거든요. 그 와중에 모곡동 신혼집도 돌봐야 했고 언제 귀가할지 알 수 없는 남편 밥상도 매일 차려놓아야만 했어요. 그렇게 힘겹게 살다 지쳐 어느덧 제가 여자라는 사실도 까먹곤 했습니다.



    상공께선 어느 날 갑자기 모곡동 박첨지댁에 나타나셨어요. 특별히 하시는 일도 없이 운종가를 느긋하게 거닐곤 하셔서 마을 계집종들 사이로 대번에 소문이 퍼져나갔죠. 키도 훤칠하고 풍채 늠름한 양반 한 분이 성격도 좋아 하인들과도 천연스레 웃고 떠든다고 말이에요. 먼발치에서나마 저도 몇 번 힐끗 봤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분이 제 숨겨둔 낭군님이 되실 줄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날씨 소슬하던 그해 가을 초저녁, 쇤네는 주인댁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우물가를 찾았어요. 한참을 고개 숙이고 빨랫감을 주무르고 있는데 상공께서 다가와 헛기침을 하셨지요? 뒤돌아보니 당신께선 빙그레 웃으시곤 손을 내밀어 뭔가를 건네셨어요. 그 직전 급전이 필요해 저당 잡혔던 은노리개였어요. 그게 상공 손에 들어가 있었던 거지요. 이상한 예감이 든 쇤네는 설레는 마음을 겨우 진정하고 여쭤봤죠.

    “이게 어찌 상공 어른 손에 있는지요? 본디 제 것이긴 하오나 갚을 돈이 없나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신 당신께선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어떤 하인 녀석이 쥐고 있기에 네놈이 어찌 계집들 노리개를 지니고 있느냐 물었더랬다. 네 것이라 하더구나. 그래서 내가 돈 주고 찾았다. 거저 줄 테니 그냥 가져가거라.”
    그 순간 눈앞이 하얘지며 숨이 멎었고 갑자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어요. 나이 열여덟이 되도록 누군가로부터 뭔가를 거저 받아본 적 없거든요. 모두들 달라고만 했지 제게 뭘 주는 법이란 결코 없었습니다. 펑펑 우는 절 보고 당신께선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왜 우느냐? 난 제법 부유하다. 이 정도 베풀 정도는 된다는 얘기다. 지금 박첨지에게 잠시 기대 사는 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집을 벗어나 휴식을 취하려는 것이야. 맘 편히 받아둬라.”

    눈물을 닦으며 올려다본 당신 모습은 얼마나 근사하셨는지 몰라요. 알고 보니 저보다 세 살 위셨고 한양 남촌의 유명한 반가 자손이시더군요. 이미 혼인을 하셨다기에 그날 밤 내내 이유 없이 잠도 이루지 못했어요. 당신께서 미혼이셨다 한들 저처럼 천하디천한 년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나 있었겠어요?

    주막집에서의 재회

    우물가에서 처음 마주치고 나서 당신과 저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새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전 혹시라도 당신과 마주칠까 하여 가급적 외출을 삼갔고, 우물에 들르더라도 애써 밤까지 기다렸어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절실하게 당신이 그립기도 했어요. 당신께서 먼저 절 발견해 주길 간절히 빌고 또 빌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어느 날, 동네 마당발인 운종가 주막 노파가 당신과 소곤대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몰래 다가가 골목길 모퉁이에 숨어서 엿듣기 시작했어요. 아! 당신은 애타게 저를 원하고 계셨어요. 어쩌다 그런 일이 생긴 걸까요? 어려서부터 곱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저 남자가 많이 꼬일 몸뚱이를 타고났다 여길 뿐이었어요. 계집종이 요염해 봤자 팔자만 사나워지는 거잖아요? 게다가 모진 노역에 손발은 부르트고 얼굴은 까맣게 탔는데 무슨 미모가 남아 있었겠어요? 그런데도 당신께선 절 만나보고 싶다며 주막 노파에게 애걸하고 계셨지요.

    큰일 났다 싶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아누웠습니다. 그날따라 일찍 귀가한 남편이 어디 아프냐며 어깨를 다독였는데 평소 같았으면 그 손길이 살짝 반갑기라도 했으련만 마치 큰 도끼가 내려치는 듯 온몸이 오그라들고 말았어요. 이 남자와 난 아예 남남이구나, 그 순간 깨달았던 거예요! 당신 속마음을 알아채고 만 그 순간 저희 부부관계는 그렇게 부서지고 말았어요.

    예상한 대로 주막 노파가 찾아와 절 이리저리 구슬리기 시작했는데 이미 마음은 정해진 터라 더 고민할 게 없었지요. 노파에게 은노리개를 건네주며 돈이 필요하니 당신께 저당 잡히고 싶다 전하라 했어요. 노파가 능글맞게 웃으며 한참을 쏘아보더군요. 그녀가 이렇게 말했어요.

    “일이 이미 다 성사됐던 게로군? 그렇지? 나 모르게 둘이 만난 적 있어! 앙큼하긴. 그렇지?”

    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시름겹게 웃고만 있었어요. 그 후 노파의 주선으로 운종가 주막에서 재회했던 일을 기억하세요? 당신께선 온몸을 벌벌 떨며 어쩔 줄 몰라 하셨어요. 제 손을 내어드리자 기겁을 하며 당신 뺨에 대고 비벼대셨고요. 그때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들으셨겠지만 은노리개를 저당 잡히고 싶어요. 언제까지일지 모르오나 잘 간직해 주세요.”

    당신께선 그때 그 말의 참 의미를 알고 계셨어요? 아마 모르셨을 거예요. 당신께선 욕정에 사로잡힌 사나운 눈빛으로 자꾸 절 방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만 하셨거든요. 남녀의 은밀한 일에 대해 이미 눈뜬 지 오래여서 그 마음을 어찌 헤아리지 못했겠어요? 한편으로 당신이 불쌍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론 살며시 원망스럽기도 했어요. 그 순간만큼은 제 앞에서 무너졌던 수많은 다른 사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셨거든요.

    자꾸 어긋나는 운명

    그날 밤 주막집에 손님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우리의 첫날밤은 무산되고 말았어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리시던 당신의 쓸쓸한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밟히네요. 저 역시 집에 돌아가 공허한 새벽이 밀려들 때까지 뜬눈으로 보냈지요. 아침밥을 짓지 않는다며 남편이 타박을 놓자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왔는지 스스로도 놀랄 뿐이었어요. 전 기이한 힘에 넘쳐 일을 하고 또 했어요. 그렇게 몸을 혹사해도 전혀 지치질 않았어요.

    주막 노파가 애쓴 결과 우리는 추운 어느 겨울밤 남들 눈을 피해가며 가까스로 주막집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지요? 방 안에서 단둘이 가만히 마주앉아 있자니 마치 수백 년 세월 헤어졌던 연인들이 따로 없었어요. 당신께선 서둘러 제 치마를 벗기셨고 그런 당신을 전 그윽이 내려다보고만 있었어요. 제가 울고 있었다는 걸 혹시 눈치채셨나요?

    제 치마폭 아래에서 당신께서 분주히 서두르시고 계실 때 갑자기 문밖에서 여동생 순덕이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남편이 언제 귀가할지 몰라 순덕이에게만 제가 있을 장소를 귀띔해 두곤 했었거든요.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가는 절 올려다보시던 당신께서 처량하게 물으셨어요.

    “대체 언제 편안히 만날 수 있는 거냐? 너무 답답해 살기 싫어질 지경이로구나!”

    그 표정이 너무 안쓰러워 제가 대답했어요.

    “쇤네 벌써 상공께 마음을 드렸으니 걱정 마세요. 항상 상공만을 생각하며 지낸 지 이미 오래인 걸요. 잠시 말미를 주시면 연통할게요.”

    말씀은 그렇게 드렸으나 우리가 다시 만나기까진 한 달이 넘게 걸리고야 말았지요? 남편이 숙직을 서던 늦겨울 밤, 우리는 마침내 누구의 간섭도 없이 주막집에서 오붓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신께선 그날 하루만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며 노파에게 당부하고 또 하셨어요. 돈도 넉넉히 내놓으셨고요. 그러고 보니 당신께선 저 때문에 꽤나 많은 재물을 탕진하셨네요.

    마침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당신을 마주했을 때 제가 하염없이 울먹였던 걸 기억하시나요? 슬퍼서도, 그렇다고 기뻐서도 아니었어요. 부귀한 당신과 달리 전 가난한 몸종이잖아요? 당신께 드릴 게 너무 없는데, 뭘 더 드릴 게 없는 초라한 몸인데, 이제 단 하나 가진 이 몸을 바치고 나면 당신 앞에서 난 얼마나 더 가난해지는 걸까 두려웠기 때문이에요.

    눈을 질끈 감고 당신 품에 안기려던 찰나, 이번엔 간난이 이모가 주막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노파를 큰소리로 찾았어요. 막내이모는 아기 때부터 절 안아 키워준 은인이었는데, 주막 노파와도 친분이 있는지라 밤에 갑자기 사라진 절 찾으러 우선 들러본 길이라고 했었지요? 이모는 이렇게 떠들어댔었어요.

    “노파! 빨리 나와봐! 우리 순매가 안 보이네. 서방과 또 다퉜다기에 걱정돼 밤마실 가봤더니 없어! 혹 여기 와있지 않아?”

    쉼 없이 떠드는 이모 등살에 우리는 숨을 멈추고 잠시 얼어붙어 있었어요. 뒤채 툇마루에서 곰방대를 물고 있던 노파도 놀라긴 마찬가지였고요. 허겁지겁 옷을 걸친 저는 방문을 박차고 나서며 말을 둘러대느라 혼비백산이었지요? 노파와 어찌어찌 입을 맞춰 간난이 이모를 달래고 얼러 빨리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만 했어요. 그날도 우리는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당신께서 느끼셨을 실망감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아요. 야금을 어겨가며 힘들게 귀가하셨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듣긴 했어요. 아무튼 그 후로도 당신과 난 몇 차례 만날 약속을 연거푸 잡았지만,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일이 터져 끝내 이룰 수는 없었어요. 한번은 저희 집 부엌에서 큰 화재가 났고, 또 다른 한번은 제가 지독한 고뿔에 걸려 몸져누워 있어야 했지요. 제 잘못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전혀 제 탓이 아니라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절호의 기회들

    당신을 유독 애태우고 절망에 빠뜨렸던 너무나 아까운 두 번의 기회가 떠오르네요. 그때는 저 역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애간장이 탔거든요. 그로 인해 당신에 대한 제 마음은 더욱 강하게 타올랐고, 정말이지 이분을 놓쳐서는 안 되겠단 오기도 생겼어요.

    임금님께서 화성 행궁에 행차하시던 날이었지요? 선왕을 모신 융릉에 참배하시고자 거둥하시던 상감께서 기분이 좋으셨던지 갑자기 야금을 해제하셨어요. 남편이 어가 모시는 일에 차출돼 집을 비운 터라 전 쏜살같이 노파네 주막으로 달려갔어요. 야금이 없다면 시간에 쫓길 일 없이 당신께 연통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하지만 당신을 모시러 모곡동 집으로 떠난 노파는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어요.

    노파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새벽녘에야 돌아왔어요. 벗들과 밤나들이 나섰다는 당신을 아무리 기다려도 만날 수 없었다고 말하더군요. 노파는 자기가 찾아왔었다는 말을 첨지댁 몸종에게 남겨뒀으니 더 기다려보자고 했어요. 마음이 초조해진 전 이를 악물고 새벽닭이 울 때까지 버텼지만 당신 소식은 끝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우연히 길에서 당신을 만난 노파가 전날 밤 일을 전했다더군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듣기만 하시던 당신께서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흐느껴 우셨다고 했어요. 저 또한 그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라 다음에는 꼭 당신 소망을 이뤄드리리라 결심하고 또 했지요.

    그리고 봄이 찾아와 한양 사람들이 저자에서 폭죽을 터뜨리던 신춘놀이 날이었지요? 그날 숙직 번을 서는 남편이 집을 비웠고 당신께선 진즉 초저녁부터 주막에서 절 기다리고 계셨어요. 간난 이모와 순덕이년을 따돌린 전 삼경 무렵 주막집에 당도했어요. 분명 방 안에 인기척은 있는데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지 뭐예요! 문을 살짝 두드려봤지만 대답이 없어 겁이 덜컥 났습니다! 다른 사람일까 두려워 냉큼 근처 골목으로 몸을 숨겼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안에 계셨던 분은 당신이 맞았어요! 이제나저제나 제가 오길 기다리던 노파가 마음이 급해 절 찾으러 나서며 혹시 다른 사람들이 올까 염려해 문을 잠근 거였어요. 노파도 참 어리석긴! 그때 운이 얼마나 없었는지 저와 노파는 길이 어긋나버렸지요. 노파는 노파대로 제 집에서 절 기다렸고, 전 저대로 주막 밖 골목에서 오들오들 떨며 노파가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방 안에서 숨죽이며 애태우셨을 당신께선 오죽이나 답답하셨겠어요? 그렇게 시간만 허비하다 밤이 늦어버렸고, 노파는 엉뚱하게도 길에서 만난 단골손님을 옆에 달고 주막집에 나타났어요. 깜짝 놀란 전 집으로 줄행랑을 놓으며 서러워서 펑펑 울었습니다.

    귀한 하룻밤

    마침내 당신을 서방님으로 모실 수 있었던 그날 밤 일을 제 입으로 하자니 새삼 쑥스러워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요. 사월초파일이었습니다. 그날의 풍정을 또렷이 기억하시나요? 전 그날의 분위기, 숨 한번 쉴 때마다 변하던 공기의 일렁임까지 다 기억해요. 비록 정은 없다지만 멀쩡한 남편을 둔 아낙이 어찌 그리 설렜겠느냐 의심하신다면 전 너무 서운해요! 제겐 그 하루가 평생처럼 길었고 비로소 사람이 된 느낌이었거든요.

    초파일 직전 전 노파를 시켜 당신께 만나 뵙고 싶다 연통했어요. 제가 먼저 그리운 마음을 전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당신께선 벌컥 화를 내셨다고 하더군요. 계집종에게 더는 휘둘릴 일 없다 하시며 노파에게 노발대발하셨다지요? 이번엔 순매가 온 마음으로 전하는 말이라고 통사정을 해도 당신께선 영 못 미더워하시는 눈치셨다 들었어요. 그러실 만도 하세요! 그러셨다한들 쇤네 드릴 말씀이 바이 없지요.

    초파일 불사 행사로 모곡동 첨지댁은 텅 비어 있었어요. 당신께선 벗들과의 모임을 물리치고 서재에서 절 기다리고 계셨지요. 아마도 제가 진짜 나타나리라 꼭 믿진 못하셨을 테죠? 서재 문을 막 열고 들어섰을 때 반신반의하시던 당신 표정이 떠올라요. 무슨 귀신이라도 보신 듯하셨거든요.

    이미 마음을 굳게 먹었던 전 서둘러 당신 품 안으로 뛰어들었어요. 마음속으로만 떠올려보던 모든 일을 당신과 해보고 싶었어요. 어엿한 다른 부부들처럼 당신과 입 맞추고 어루만지고 서로 다정한 눈빛으로 속삭여보고 싶었습니다. 번번이 너무 서두르시던 당신의 서툰 손길에 전 연신 키득대며 웃었지요? 떨리는 손으로 제 옷고름조차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셨잖아요?

    귀하디귀한 밤이 지나고 달은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당신께선 안절부절못하셨지만 전 느긋했습니다. 정말로 그 순간에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날 내내 뭔가 굉장한 걸 드릴 수 있다는 기쁨이 절 사로잡고 있었어요. 종년 신분에 양반이신 당신께 뭘 더 드릴 수 있었겠어요?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 바라는 것 없이 귀한 선물을 하는 당당한 기분을 아세요? 참으로 사람이 된, 아니 사람으로 대접받는 쇤네의 기분을 아세요?

    전 그날 바라던 모든 걸 다 이뤘어요. 막상 당신을 품고 나니 이젠 더 드릴 게 없어졌다는 슬픔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당신께선 종년 인생에 비친 한 줄기 빛이었어요. 그 빛 아래에서 저도 잠시 빛났습니다.

    끝이 있는 슬픈 유희

    첨지댁 서재에서 당신과 나눈 하룻밤 인연은 제겐 끝내 족쇄가 됐어요. 그날 이후 당신 생각을 하지 않곤 단 한시도 숨 쉴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거든요. 부엌에서 밥을 짓다가도 이 밥을 당신께 올리고 싶다 생각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일쑤였어요. 묘동 주인댁 사람들은 평소보다 굼뜬 절 야단치다 지쳐 회초리까지 드는 불상사도 벌어졌지요. 살아서 움직였지만 송장과 다를 바 없었더이다!

    그러던 어느 날, 노파가 찾아와 제 등을 떠밀며 어서 주막으로 가보라고 보챘어요. 당신께서 청나라 연경을 다녀오시며 제게 줄 귀한 금장식을 사 오셨다는 거였어요. 초저녁부터 술에 곯아떨어진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전 망설이고 또 망설였어요.

    그날 우리가 회포를 풀었다면 부부로서 맞이하는 두 번째 날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달콤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요? 방 안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깊은 한숨을 내쉬려는 찰라 간난이 이모가 들이닥쳤기 때문이었어요. 이모는 평소 당신과 저의 행동거지를 의심하다 때마침 제 뒤를 밟았다고 했어요. 큰 소란이 벌어졌지요.

    성이 잔뜩 난 이모는 다시는 조카년을 넘보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어요. 조카사위에게 일러바치겠다고 노발대발했고요. 덕분에 주막집 인근 사람들이 몰려들어 수군대기 시작했고 당신께선 서둘러 몸을 피하셔야만 했지요. 그날 이후 우리는 정식 작별 인사 한 마디 나누지 못한 채 허무히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남촌 본가로 돌아가신 당신께선 다시는 운종가 근처론 얼씬도 않으셨지요? 남편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은 저 역시 묘동 주인댁 외엔 밖으로 나다닐 수 없었어요. 노파가 최근 딱 한 번 당신을 수표교 근처에서 마주쳤다고 하더군요. 씁쓸히 웃으신 당신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어요.

    “다 지난 일이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내가 그 계집종에게 속은 것도 같다. 그리 정성을 들였건만 어찌 그리도 만나기가 힘들었단 말이냐? 이는 필시 지독한 여우의 간계에 빠졌던 게 틀림없다.”

    상공이시여! 정녕 여우의 꾐이라 여기셨던 것인가요? 비탄에 빠져 시름시름 앓던 전 마침내 결심하고 이 편지를 쓰게 됐어요. 기왕 이리 된 거 진실을 말씀드려 볼까요?

    당신께 제 은노리개를 슬쩍 보여드렸던 하인 녀석을 기억하시나요? 그게 우연이라 보세요? 그 하인에게 은노리개를 주며 당신께 이리저리 하라 시킨 게 바로 저였어요! 그래요! 훨씬 전부터 전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거든요. 어찌하면 당신을 내 앞에 다가오게 할까 밤낮으로 궁리한 끝에 생각해낸 거였어요. 그래놓고 왜 사라졌냐고요? 우물가에서 당신으로부터 은노리개를 받던 순간 더럭 겁이 났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갖고 싶었던 게 막상 눈앞에 나타나니 그게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던 거예요.

    하지만 당신을 피해 다니면서도 제 속마음은 다른 방향으로 타들어갔어요. 너무나 간절히 당신을 연모했어요. 그래서 남 일 끼어들기 좋아하는 주막집 노파에게 제 마음을 살짝 털어놔봤어요. 예상처럼 노파는 자기가 한번 주선해 보겠다며 큰소리를 치더군요. 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당신을 만날 날만 기다리고 기다렸어요. 어느 날 노파가 당신과 단둘이 소곤대는 모습을 멀리 지켜보며 가슴이 쿵쾅대 제대로 걷지도 못했지요.

    그런데 그 후로 왜 그렇게 만나기 힘들었냐고요? 그것도 제가 꾸민 거였어요! 전 간난이 이모와 순덕이에게 모든 사실을 고하고 제발 도와달라고 간청했어요. 두 사람은 서럽게 우는 절 달래며 뭐든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해줬지요. 당신과의 은밀한 만남을 둘이서 번번이 불발시켰지요? 그래요! 다 제가 시킨 일이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계집종과 반가 선비 사이의 불장난은 뻔히 끝이 있는 놀이니까요! 전 그 놀이를 되도록 길게 늘이고 싶었던 거예요! 당신이 절 빨리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 만남은 빨리 끝날 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에요. 전 오래도록 당신의 애를 닳게 만들어 조금이라도 길게 당신 곁에 머물고 싶었어요. 그러다 저도 자제력을 잃었고 당신을 낭군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지요. 맞아요! 어가 거둥하시던 날과 신춘놀이 날은 진심으로 당신을 만나려던 날이었어요.

    서재에서 첫 인연을 이루던 날, 전 속으로 결심하고 또 결심했어요. 당신과 부부로 이룬 이 꿈같은 인연을 절대 욕되이 만들지 않겠다고! 그래서 금노리개 받으러 가던 날 간난이 이모를 이용해 우리 만남을 스스로 끝냈던 거예요! 사람들 소문은 금방 가라앉게 마련이고, 남편은 그날을 우리가 처음 만난 날로 알 테니 크게 두렵지도 않았어요.

    이게 제 진심이고 더 드러내 밝힐 딴마음이란 없어요. 전 딴마음 가져본 적 없는 연모에 눈멀었던 일개 계집종이었을 뿐이에요. 상공이시여! 아! 내 상공이시여!

    *이 작품은 19세기 한문소설 ‘절화기담’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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