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호

新東亞-미래硏 공동기획 | 미래한국 청년열전·마지막회

“남북통일 최대 수혜자는 대한민국 청년”

탈북민 ‘청년교수’ 주승현

  • 구해우 |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6-12-14 14:3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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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물한 살 때 AK 자동소총을 들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12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됐다. 적대와 증오를 배태한 71년 분단사(史)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을 통일을 떠올리면 절박하고 간절하다.
    찬바람이 철조망에 부딪혀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냈다. 월남(越南)과 국군 침투를 막고자 북한군이 비무장지대(DMZ)에 설치한 1만 볼트 고압 전기철조망을 넘었다.  2002년 2월 19일의 일이다.

    북한군 GP(Guard Post)에서 한국군 GP는 뛰어서 5분, 걸어서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그 길은 북한에서의 스무 해 넘는 인생을 뒤로하고 내디딘 목숨 건 노정(路程)이었다. 손에 쥔 것은 직전의 전우(북한군)로부터 몸을 지킬 AK 자동소총뿐.

    주승현(35) 전주기전대 교수는 스물한 살 때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탈북한 ‘대한민국 청년’이다. 북한이탈주민의 한국 입국이 본격화한 후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박사학위를 취득한 첫 사례이자 최연소 탈북민 박사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한반도 분단 및 통일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국회, 동양그룹, 금호석유화학, 롯데그룹에서 일했다. 지난 3월부터 전주기전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미래한국 청년열전’이란 간판을 내걸고 2016년 1월 시작한 이 연재의 첫 회 주인공은 열일곱 살 때 압록강을 건넌 인권운동가 이현서(36) 씨다. 첫 회와 마지막 회의 ‘청년’으로 탈북민을 고른 까닭은 ‘청년을 씨줄, 통일을 날줄 삼아 대한민국의 미래를 논해보자’는 취지의 연재이기 때문이었다.  





    통일, 청년, 미래

    ‘The Girl With Seven Names(일곱 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라는 제목의 저서로 이름난 이현서 씨가 “왜 우리가 허리 잘려 살아야 하나요, 한 가족이잖아요”라면서 울먹이던 첫 회 인터뷰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업(家業)인 어묵공장을 만방에 알린 삼진어묵 박용진(33) 씨는 “한반도 동해 위쪽에서 어묵 원료로 손꼽히는 명태가 많이 잡힌다”며 “함경북도에 어묵공장을 세우면 세계로 나아가는 전초기지가 될 것”(3월호)이라고 했다. ‘꿈꾸는 유목민’ 김수영(35) 씨는 “북한 청년의 인력 개발과 관련한 일을 하는 게 소망”(2월호)이라면서 ‘새로 꾸는 꿈’을 알렸다.

    필리핀에서 이주한 ‘대한민국 청년’ 이자스민(39) 씨는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 탈북민의 처지가 비슷하다”면서 “출신 배경을 따지지 말고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는 나라를 만들자”(4월호)고 했다.

    군사평론가 양욱(41) 씨는 “남북 청년이 술잔을 맞댈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며 “마음을 열어라! 세상을 넓게 봐라! 꿈과 희망을 이룰 세계가 북한 바깥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5월호)고 북한 청년에게 조언했다.

    ‘재래시장으로 진격’한 청풍상회 총각들은 “버티는 게 먼저다. 꿈은 그다음에…”(8월호)라면서 북녘 땅이 지척인 강화도에서 미래를 연다. ‘소셜 벤처’ 투자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김정태(39) 씨는 “탈북 청년을 기업가로 키워내 함경도에 보내겠다”(9월호)고 각오를 다졌다.

    “한반도의 갈등, 불협화음을 음악을 통해 화합, 하모니로 바꿔놓는 것”(6월호)을 사명이자 숙명으로 여기는 바이올리니스트 원형준(40) 씨는 이 시각에도 ‘남북 연합 오케스트라’를 꾸리는 꿈을 이뤄내고자 분주하다. ‘돌직구로 세상의 민낯을 까발린’(7월호) ‘댓글부대’ ‘한국이 싫어서’ ‘표백’ 등의 작가 장강명(41) 씨는 11월 북한 정권 붕괴 이후를 배경으로 삼은 ‘우리의 소원은 전쟁’을 출간했다.

    마지막 회 대담의 주인공인 주승현 씨는 ‘미래한국 청년열전’이 일곱 번째로 다룬 장강명 씨의 신작 ‘우리의 소원은 전쟁’의 초고를 ‘탈북민이면서 통일 전문가로서’ 읽고 감수 의견을 낸 인연도 지녔다.



    ‘먼저 온 미래’

    탈북민을 두고 ‘먼저 온 미래’ ‘먼저 온 통일’이라고 일컫지만 “탈북민 3만 명도 올바르게 품에 안지 못하면서 통일을 어떻게 이루냐”는 힐난도 적지 않다. ‘미래한국 청년열전’의 마지막 대담을 시작한다.   

    ▼ 통일은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절박함, 간절함 아닐까요. 적대와 증오를 배태한 71년 분단사(史)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형태로 통일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남북한 주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모습으로 통일을 이뤄내길 간절히 소망해요.”



    ▼ ‘미래한국 청년열전’ 마지막 대담입니다. 앞서 11명의 청년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요. 남북 청년이 통일과 관련해 어떤 지향, 고민을 가지면 좋겠습니까.

    “분단 체제는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이죠. 71년 동안 비정상의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나라는 발전해왔다’고나 할까요. ‘통일이 미래의 희망’이란 사고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경박한 표현이되 ‘통일 대박’은 사실에 근거한 겁니다. 밝은 미래를 맞으려면 통일해야 해요. 통일의 가장 큰 수혜자가 누굴까요. 바로 청년입니다. 새로운 기회가 엄청나게 생겨나니까요. 흙수저·금수저론에 휘둘리지 말고 ‘통일이라는 희망의 미래’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통일이 이뤄지면 북한 청년에게도 현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기회가 열립니다.”

      ▼ ‘신동아’ 11월호가 국민 1000명을 상대로 표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유독 20대만 통일에 부정적이더군요.

    “한국 청년 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와 자기밖에 모르는 것 같아요. 뭉뚱그려 말해선 안 되겠지만, 개척자가 되기보단 안정적 삶을 바라는 데다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수도권 대학에서 강의할 때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10명 중 2명밖에 손을 안 들더군요. 나라뿐 아니라 개인의 밝은 미래도 통일에서 열린다는 공감대가 청년층에서 널리 확산되면 좋겠어요. 통일을 어떤 방식으로 이뤄내느냐에 따라 청년과 대한민국의 미래가 갈린다고 생각합니다.”

    ▼ 휴전선을 넘은 게….

    “2002년요.”

    ▼ 2002년이면 아사(餓死) 사태 직후네요. 북한이 1990년대 후반 대기근을 겪었습니다. 탈북하기 2년 전엔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이 열렸고요. 북한에서 이 두 사건을 어떻게 지켜봤습니까.  

    “고난의 행군을 직접 겪었죠.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습니다. 개성의 북한군 부대에서 복무했는데,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가 급작스럽게 좋아지면서 서울-신의주 철도와 문산-개성 도로를 다시 잇는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철도·도로 연결 공사를 현장에서 목격했죠. ‘세상이 바뀌는구나’ 싶었습니다. 그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저는 탈북을 결심했고요.”



    “어떤 통일인가”


    ▼ 탈북할 때 DMZ 분위기는….

    “남북관계가 크게 변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화해, 협력 쪽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북한군에 속해 있을 때 근무한 초소가 도라산역과 가까웠어요. 도라산역을 짓는 과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죠.”

    도라산역(경기 파주시)은 DMZ 남방한계선에서 7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의선 남측 구간 최북단 역이다. 2001년 4월 착공해 2002년 3월 완공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2년 2월 20일 도라산역을 방문해 철도 침목에 서명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 전날 오후 10시 30분께 국군 초소에 도착했으니 두 대통령이 도라산역을 방문하기 하루 전날 넘어온 건데요. 나중에 들어보니 AK 자동소총까지 들고 DMZ를 넘은 탓에 상황이 급박했다더군요.”

    ▼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군에서도 병사들이 굶어 죽었습니까.

    “DMZ 내 부대엔 굶어 죽는 병사가 없었습니다. 제가 속한 부대가 전연군단(휴전선 인근에 배치된 북한군 1, 2, 4, 5군단) 중 하나인데, 군단 전체로 보면 영양실조로 굶어 죽은 친구들이 있었죠. 최전방 부대나 DMZ 내 부대는 어렵긴 해도 식량 공급이 어느 정도 이뤄져 굶어 죽진 않았어요.”

    ▼ 한국에 와서 고생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살다 온 탈북민과 달리 시장경제 경험이 일천했을 테고요.    

    “굉장히 겁이 났습니다. 공포를 느꼈어요. 한국 정부에 대한 기대가 있었죠. ‘귀순용사’로 대접받으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무런 배려가 없는 겁니다.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죠. 나라에서 아무것도 안 해준다는 걸 깨우치자마자 ‘어떻게 살아남지’ 하는 두려움이 밀려들었습니다. 국가정보원에서 조사받을 때 이따금 외출을 시켜줍니다. 소주도 한 잔하고, 남산타워도 가보고…. 그럴수록 더 막막하더군요. 사회에 빨리 나가고 싶은 게 당연할 텐데 두려움이 큰 나머지 ‘이곳에 좀 더 머물면 안 되냐’고 조사관에게 졸랐습니다.”

    ▼ 북한은 ‘왕조 국가’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론 ‘사회주의 국가’죠. 통일 이후 북한 주민이 다른 체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날 충격이 만만찮을 겁니다. 자유와 시장에 익숙하지 않잖아요. 통일 후 북한 사람들이 시장 경쟁과 책임이 따르는 자유에 대해 어떻게 느낄까요.

    “질문에서 ‘어떤 통일이냐’가 빠진 것 같습니다. ‘한국이 주도하는 시장경제로의 통일’을 말씀한 거죠?”  



    “현대사 자료 읽는 게 고통”

    ▼ 그렇죠.

    “북한 주민에게 그런 방식의 통일은 충격과 아노미가 될 수밖에 없어요. 북한 사람들이 충격과 아노미를 극복할 수 있느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느냐에 따라 통일 국가가 유지될지, 아노미적 혼란 상황에 처할지 결정될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현재 북한 사람에게 가진 태도가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굉장히 큰 혼란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갈등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합니다. 오랜 분단이 낳은 적대성과 이질성이 통일 이후에도 남북한 사람들의 통합을 저해할 소지카 큽니다.”

    ▼ 어떤 방식의 통일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1국가 2체제를 상당 기간 운용해 격차를 줄인 후 하나 되는 방식이 장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 ‘대학원에서 분단 구조와 통일을 연구하면서 현대사의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게 고통스러웠다’고 쓴 글을 읽었습니다.

    “논문을 쓰고자 자료를 들여다보는 게 힘들더라고요. 해방정국 때부터 이념, 지향에 따라 패를 나눠 거칠게 싸웠는데, 잔혹한 일투성이였습니다. ‘잔혹한 희생’이 도처에서 벌어졌죠. 수많은 사람이 숙청당했고요.”

    ▼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었죠.

    “처음엔 북한에서의 잔혹한 희생만 생각했는데, 한국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일이 벌어졌더군요. 남북의 권력자들은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경쟁자를 거세하고자 분단을 악용했고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습니다. 이렇듯 엄청난 고통을 겪었기에 분단을 안고도 그럭저럭 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민족 내부 갈등만 존재한 게 아니라 외세 개입도 거셌죠.

    “분단은 1차적으로 외세에 의한 것입니다만, 모든 걸 외세 탓으로 돌리면 잘못이죠. 민족 내부에서 지혜롭게 대처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분단된 지 71년이 지났는데도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란 등에서 드러나듯 외세의 개입과 관련해 해방정국 때보다 나아진 게 있나요? 저는 없다고 봐요. ‘강대국들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통일로 가는 힘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민족이 아닌가 하는 우울한 생각마저 듭니다.”   



    집단행동 나선 탈북민들

    ▼ 남북하나재단(탈북민을 지원하는 통일부 산하 공공기관)과 탈북민 단체들이 갈등을 빚더군요.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자존감과 관련한 갈등이죠. 일례로 저는 북한에서 출신성분만 좋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특별히 똑똑하지도 않았고요. 그런데도 자존감 같은 게 있었어요, 북한에서 살 때는.”  

    ▼ 북한 사람들이 자존심이 참 세더군요.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을 말하는 겁니다. 탈북민이 한국에 와서 왜 힘든가 생각해보니 북한에서는 어쨌거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떳떳이 살았는데, 이곳에서는 눈치를 보면서 지냅니다. 차별, 배제가 축적돼 주눅이 든 거죠.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거의 모든 탈북민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 남북하나재단이 자존감에 상처를 낸다는 건가요.

    “처음부터 재단 운영이 합리적, 효율적이지 않았죠. 통일부 관료에게 탈북민은 화합과 통일의 대상이 아니라 ‘일거리’인 것 같아요. 남북하나재단 운영도 마찬가지고요. 과거엔 기관에서 찾아와 술 한잔 사주고, 용돈 좀 쥐여주면 고맙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탈북민도 세상 돌아가는 걸 알 만큼 안 겁니다. 10월 30일 남북하나재단 등을 규탄하는 탈북민 집회가 열렸습니다. 정부를 상대로 탈북민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대단한 일이기도,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 잘못이 있으면 항의해야죠.

    “통일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면 탈북민이 정부에 저항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죠. 우리를 왜 차별, 배제하느냐고 따지는 것인데….”

    ▼ 부조리가 많은가 봅니다.  

    “북한이탈주민을 지원하는 기관이라면 탈북민에게 실제로 혜택을 주는 일을 해야죠. 퇴직한 관료 등의 밥그릇 노릇하라고 조직한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보면 밥그릇 싸움이기도 해요. 탈북민 단체들은 남북하나재단 운영 과정에 탈북민도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쉽게 말해 탈북민도 지분이 있으니 밥그릇을 나누자는 거예요.”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기’

     통일부는 11월 1일 남북하나재단 이사로 탈북민 2명을 임명했다. 현성일(57)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전문위원, 현인애(59)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이 임원으로 참여한 것. 두 사람은 김일성대를 졸업했다. 통일부가 탈북민 단체의 재단 운영 참여 요구를 일부 수용한 것이다.  

    “탈북민이 정부를 상대로 목소리 높이는 일이 벌어진 것에는 탈북 양상 변화가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탈북 역사가 20년을 넘었습니다. ‘생계형 탈북자’는 줄고 ‘목적형 탈북자’가 늘었어요. 먹고살기 힘들어 탈북한 게 아니라 더 잘살려고 한국에 왔으니 밥그릇을 나누자고 외칠 수밖에요. 탈북민 사회에서 연대의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정부가 고민할 일이 많아졌다는 뜻입니다.”

    ▼ 주 교수도 탈북민 단체에 속해 있나요



    “한 군데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단체와는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 집단행동의 성패는 여론을 얻는 데 있습니다. 누가 더 지지를 받느냐가 중요하죠. 이 같은 맥락에서 탈북민 중 한국 사회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탈북민 대부분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한국에 온 거예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처럼 엄청난 성공을 하겠다고 온 게 아닙니다. ‘하루빨리 너희가 성공해야 하지 않냐’ ‘성공 사례가 많아야 한다’고 주문하는데, 그것이 올바른 요구인가 싶습니다. 남들처럼 행복하게 사는 것, 그러면서 지역사회에 약간의 기여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한국 사회에서 그 나름 인정받는 위치에 오른 탈북 인사는 솔선수범할 필요가 있겠지만요.”

    ▼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죠. 엉뚱한 얘기인데, 한국에 와서 가장 당황한 게 뭔 줄 아세요?”

    ▼ 뭔가요.

    “나라에서 직업을 당연히 주는 줄 알았어요.”



    탈남하는 탈북청년

     ▼ 사회주의에서나 주죠.  

    “직업은 안 주더라도 기술 배우는 것은 알선해주는 줄 알았어요. 확성기 방송으로 북한 군인에게 남으로 넘어오라고 하잖습니까. 한국에 오는 순간 ‘자유는 누리지만, 직업은 없다’는 사실을 알면 아무도 안 넘어올 겁니다.

    어쨌거나 북한 주민이 이제는 한국이 지독한 경쟁 사회라는 것을 잘 알아요. 다들 그 부분을 각오하고 한국에 옵니다. 북한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탈북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차별과 배제가 심하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아 잘 모릅니다. 동포니까 환대해줄 것이라고 착각해요.”

    ▼ 2014년 2월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박사 후 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 프린스턴대에 가려다가 접고 부산의 탈북민 대안학교에서 일한 것으로 압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분단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현대사의 비극을 들여다보는 게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프린스턴대에서 제안이 온 상태에서 지인 한 분이 사감도 하고, 교사도 하면서 아이들 좀 돌봐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더군요.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었던 터라 ‘아, 그 일도 좋겠다’ 싶어 무작정 내려갔습니다.

    학교는 개교를 준비 중이고 탈북 학생 중 절반은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게, 머리칼이 하나도 없는 녀석이 있었어요. 그 녀석 누나에게 ‘왜 저렇게 됐느냐’고 물었죠. 한국 학교에서 겪은 왕따 탓에 스트레스를 받아 그렇다더군요. 과장된 얘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1년 만에 머리칼이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머리숱이 그렇게 많은 아이를 처음 봤습니다. 그 녀석 누나 말이 사실이었던 거죠.

    또 한 친구는 여덟 살쯤으로 보였는데, 열여섯 살이라는 겁니다. 깜짝 놀랐죠. 워낙 못 먹어 키가 안 자란 겁니다. 1년 동안 20㎝ 넘게 키가 자라더군요. 대안학교에서 일하면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적이 많습니다.”    

    ▼ 한국에 입국했다 제3국으로 이주한 탈북민이 많다면서요.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거죠. 탈북민에 대한 차별, 배제 탓이기도 하고요. 인종차별 같은 것은 동포 사이에서 배제당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죠. 굉장히 많이 나갔어요. 나갔다 되돌아온 사람도 무척 많고요. 불법으로 나간 겁니다. 한국에서 온 게 아니라 북한에서 왔다고 제3국에 난민 신청을 하는 거예요. 정부가 이걸 국가 망신으로 본 것 같습니다. 영국, 캐나다 등과 지문 정보를 공유했어요. 한국 국적이라는 사실이 적발돼 추방당한 이가 적지 않아요.”



    청년들의 악전고투

    ▼ 그런 일도 있었군요.    

    “나갔다가 되돌아온 사람이 많은 까닭이죠. 논문 등에 따르면 ‘탈남한’ 탈북자가 2000명가량으로 추정되는데, 나갔다 되돌아온 이들을 포함하면 더 많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제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나갔어요. 거칠게 표현해 10중 8명이 사라졌습니다. 제 주변만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서강대, 한양대 등을 나온 친구들로 그 나름대로 잘 적응해가던 녀석들이거든요. 북한인권정보센터 자료에 따르면 탈북민 5명 중 1명이 자살을 시도하거나 생각했으며 5명 중 1명이 북한에 되돌아갈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뭔가 잘못 돌아가는 겁니다.”  

    ▼ 정부도 탈북민 정책에 문제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 듯합니다. “탈북자 정착 제도를 재점검하라”는 대통령 지시도 10월에 있었고요.

    “정부가 북한 엘리트와 주민을 향해 한국으로 오라고 외치고 있지만, ‘한국에서 탈북민이 어떻게 사는지 봐라’고 하면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에요.”

    통일 준비는 ‘한국 사회를 개혁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탈북 청년이 홀로서기에 나서자마자 맞이하는 곳은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약육강식의 인정머리 없는 나라가 아니던가.

    ‘미래 한국’은 화합(和合)하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 공동체가 약화하고 있으며, 공평무사(公平無私)가 상실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악전고투가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번영한 대한민국’이라는 결실의 디딤돌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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