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5일로 우리 겨레는 분단 75주년을 맞이한다. 오늘날 남과 북을 통튼 7600만 겨레가 겪는 고통과 비극의 뿌리는 바로 이 분단이다. 분단이 있었기에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전쟁이 뒤따랐으며 37개월을 끈 이 전쟁으로 국토는 유린되고 수많은 동포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했고 다시 한 차례 큰 규모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남과 북 사이에 적대감이 높아져 오늘날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채 대결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제2의 한국전’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마저 조성되고 있다. 그러면 이 분단은 도대체 어떤 배경에서 이뤄진 것일까.
논점4 : 코리아에 대한 신탁통치 구상에서 한반도 분할의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일제가 한반도를 병탄한 뒤 국제사회는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어느 한 나라도 국권을 빼앗긴 조선에 대해 조의를 표하지 않았고 일제의 폭거에 대해 항의하지도 않았다. 이제, 미국에서 이승만의 항일독립운동을 도왔던 로버트 올리버 교수의 표현으로, 코리아는 ‘잊힌 나라’가 됐다.이처럼 매우 불리한 국제 여건 속에서도, 조선=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항일운동에 나섰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광복군 창군 등은 조선=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투지를 반영했다. 그렇지만 국제사회는 여전히 무관심하거나 냉담했다. 심지어 스탈린의 소련은 소련 영토 안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를 추방하거나 박해하기도 했다.
일본의 조선=한국에 대한 독점 지배는 오래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본의 결정적 패착이 시작됐다. 미국과 영국 등 해양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조선=한국을 독점 지배할 수 있었던 일본은 1941년 군국주의자들의 잘못된 발상과 판단으로 오히려 해양국가들을 적으로 돌리고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이탈리아와 손을 잡은 데 이어 그들과 함께 ‘추축국’ 동맹을 형성한 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던 이승만이 자신의 명저 ‘일본 내막기’에서 예견한 그대로였다. 이로써 일본은 나치독일과 파시스트이탈리아를 공동의 적으로 삼은 미국·영국·소련·프랑스·중화민국 중심의 연합국과 전쟁관계에 들어가게 됐다.
이렇게 전쟁이 확대되면서 연합국 사이에서 일련의 회담이 열리게 됐고, 그 회담 가운데 몇몇 회담은 조선=한국의 장래를 다루거나 거기에 영향을 주기에 이르렀다. 이 회담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워싱턴에서의 미·영 외무장관회담(1943년 3월), 미·영·중 정상 사이의 카이로회담(1943년 11월), 미·영·소 정상 사이의 테헤란회담(1943년 11월), 미·영·소 정상 사이의 얄타회담(1945년 2월), 미·영·소 정상 사이의 포츠담회담(1945년 7~8월) 등이다.
이 회담들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분석하기에 앞서 꼭 지적해야 할 사실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미국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 코리아에 즉각적이면서 완벽한 독립을 주기보다는 일정한 기간에 걸쳐 코리아에 관계된 국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신탁통치의 실시를 고려했다는 사실이다. 카이로회담에서 ‘적당한 절차를 밟아(in due course)’라는 애매모호한 구절로 처음 국제회담의 합의문서에 등장한 이 구상에 대해 서로 대립되는 분석이 제시돼 왔다. 이 구상이 결과적으로 소련과 한반도 분할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도 소련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주장, 반면에 그 구상을 조선=한국인이 받아들였더라면 신탁통치가 끝난 뒤 분할이 아니라 완전한 통일을 보게 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논점5 : 소련을 극동전에 끌어들이려고 한 연합국의 정책에서 한반도 분할의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둘째, 일련의 전시 연합국회담에서 특히 1943년 10월 이후, 일본을 상대로 하는 전쟁 이른바 극동전에 소련이 참가하도록 미국이 끈질기게 요구한 사실이다. 일본과의 전쟁을 사실상 혼자 수행하던 미국은 소련이 동참해 준다면 부담이 크게 줄어들고 또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사실상 혼자 수행하던 소련으로서는 병력을 동북아시아로 분산하기 어려웠다.이 문제는 우선 테헤란회담에서 봉합됐다. 미국과 영국이 1944년 5월 1일 유럽에 진공해 이른바 제2의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소련을 도울 것이라고 약속하고, 소련은 ‘독일이 완전히 패망한 뒤’ 대일전에 참전할 수 있을 것임을 약속한 것이다.
이 약속은 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처칠과 스탈린 사이의 회담, 처칠-스탈린 회담에 소련 주재 미국대사 해리먼과 주소(駐蘇)미국군사사절단장 존 딘 소장이 합석한 회담, 미국과 소련 사이의 고위 군사회담 등에서 더 구체화됐다. 이 일련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이 극동의 일본군을 격파하기 위한 계획을 설명하는 가운데 ‘코리아의 북변(北邊)에 위치한 항구들’을 소련의 육군과 해군이 점령해야 한다고 제의했고, 미국과 소련은 ‘묵인’했다. 이로써 함경북도의 항구들인 웅기·나진·청진 등에 대한 소련군의 작전에 관해, 비록 묵시적이지만, 미국-영국과 소련 사이에 합의가 성립됐다.
이 묵시적 합의는 한반도의 장래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우리가 앞으로 다시 살피게 되듯,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에 합의함으로써 결국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는 단초를 열어놓은 것이다.
논점6 : 한반도의 분할은 얄타회담에서 밀약된 것인가.
1945년 2월 소련 얄타의 리바디아 궁전에 모인 연합국 수뇌들. 앞줄 왼쪽부터 처칠 영국 총리,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들은 승전 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국이 독일을 분할 점령한다는 것 등에 합의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의 분할이 이 얄타회담에서 밀약됐다는 소문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조국의 분할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인들은, 그 분할에는 자신들을 수천 년 동안 이러저러한 형태로 괴롭히거나 핍박했던 주변 강대국들의 ‘농간’이 개입됐을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면서 ‘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 박사’ 이승만이 얄타회담 직후 ‘얄타밀약설’을 제기하자 많은 사람이 쉽게 믿은 것이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그의 견해는 정설로 굳어져 이승만 정부 시대에는 교과서에 그렇게 단정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얄타밀약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회담에 관련된 모든 문서가 공개된 뒤 살펴본 결과 어느 쪽도 한반도 분할을 제기한 일이 없었으며, 한반도와 관련해 ‘분할’ 또는 ‘38도선’이라는 단어 자체가 등장한 경우가 아예 없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얄타회담이 한반도의 분할에 대해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제의를 받아들여 미국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독일이 항복한 때로부터 3개월 이내에 극동전에 참가한다”라고 공식 약속했다. 실제로 소련은 그 3개월이 꼭 채워진 1945년 8월 8일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전에 참가하면서 코리아의 북변 항구에 진입하기 시작한다.
논점7 : 트루먼 행정부의 출범은 한반도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런데 얄타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양해가 이뤄졌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어느 한 나라에 의한 코리아의 군사점령에 반대한다는 데 뜻을 같이함으로써 코리아에 대한 ‘공동점령’에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 방법과 내용을 끌어내지 못함으로써 한반도의 장래를 여전히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겨놓았다.그때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난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가 병사했다. 자연히 부통령 트루먼이 곧바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렇게 트루먼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집행한 외교정책의 성격과 방향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학계에서 토론이 진행되는데, 그 핵심 논점은 2차대전의 종결을 전후한 시점 이후 전개된 동서냉전이 트루먼의 대통령직 계승으로 시작됐다는 주장에 연결됐다.
그 대표적 논자가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마크 갈리치오 박사다. ‘냉전은 아시아에서 시작됐다’는 책을 쓴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면서 반소주의자인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면서, 공산주의나 소련에 대해 ‘이해하는’ 입장을 취함과 동시에 ‘유화정책’을 편 전임자와는 달리, 소련과 한 기존 약속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약속을 가능하면 지키지 않는 쪽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반론이 뒤따른 것이 사실이지만, 트루먼 취임 이후 미국이 소련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된 요인으로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당시의 유럽 정세였다. 소련은 동유럽을 석권하고 있었으며 특히 폴란드는 철저히 소련의 위성국가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스탈린이 얄타에서의 약속을 깨뜨리고 동유럽에서 영토적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것으로 비쳤다. 또 소련이 유럽에서 점령한 지역들에서 보여주는 인간기본권 침해와 유린은 트루먼의 반소반공주의적 신념을 강화시켰다.
둘째, 영국 총리 처칠의 거듭된 경고였다. 그는 폴란드의 상황은 동유럽을 소련의 지배권 아래 두려는 스탈린의 정책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연합국이 과연 얄타협정을 준수해야 할 것인지 회의를 표시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얄타협정의 수정을 요구하는 이른바 얄타수정주의를 이끌었다.
셋째, 미국 국내에서 그리고 행정부에서 대소(對蘇)강경론이 우세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소련의 행태에 미뤄, 동북아시아를 소련의 지배권 아래 두려고 시도할 위험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국이 이제라도 얄타협정의 틀에서 벗어나 소련의 대일전 참가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얄타수정주의가 대두한 것이다.
트루먼의 대통령직 계승 직후 대전은 종말을 향해 빠르게 진전됐다. 5월 8일 독일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나치독일의 동반자였던 이탈리아는 1943년 7월 일어난 쿠데타로 무솔리니를 권좌에서 추방한 데 이어 연합국에 항복했다. 이렇게 유럽에서 대전이 이탈리아와 독일의 패망으로 매듭지어진 상황에서, 미군은 6월 30일 오키나와 전체에 대한 점령을 완료했으며 일본 본토로의 진공에 들어갔는데, 이로써 추축국들 가운데서 마지막 생존자인 일본의 패망은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이제 연합국의, 특히 미국의 관심은 일본의 장래, 그리고 부수적으로 일본의 식민지인 코리아에 대해서도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쏠리게 됐다.
코리아에 대한 관심의 핵심은 군사작전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소련의 대일전 참가 문제가 다시 뜨겁게 토론됐다. 당시 전황에 미뤄 소련군의 참전이 불가피하다는 의견, 대조적으로 소련군의 참전은 결국 코리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편입시키게 될 것이므로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그러나 대세는 소련군 참전,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다만 예외적으로 미국 전쟁부(오늘날의 국방부) 산하의 합동참모본부에 소속된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1945년 6월 28일에 작성한 계획안에서 미국의 한반도 단독점령안을 채택했다. 이완범 교수가 지적했듯,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북부에 대한 관심을 알면서도 코리아 전체를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시킨다는 방향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만일 미국이 이 안을 끝까지 관철할 수 있었다면, 한반도의 분할은 회피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 미국은 이 안을 버리고 소련군과의 공동점령안을 채택한다.
논점8 : 소련은 코리아에 대해 어떤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나.
비록 폐기되지만 미국의 합동전쟁계획위원회가 미국의 한반도 단독점령안을 채택한 그 시점에 소련은 코리아와 관련해 적어도 두 가지 계획안을 마련했다. 첫째, 6월 28일 스탈린은 소련군이 함경북도의 나진·청진·융기 세 항구를 점령한다는 원래의 계획을 공식적으로 재가했다. 둘째, 그다음 날에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은 코리아가 앞으로 소련에 대한 공격의 발판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코리아에 ‘소련과 코리아 사이에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정부’를 세우도록 해야 한다는 건의안을 만든 것이다. 이 건의안은 “코리아에 대해 연합국이 신탁통치를 실시하게 되면 소련은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스탈린이 재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의안은 무엇을 뜻하는가. 소련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의 코리아에 대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놓아야 한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제 코리아에서 소련이 자국의 이익을 놓고 미국과 경쟁하거나 대립하게 될 가능성은 높아졌다.
논점9 : 한반도의 분할은 포츠담회담에서 밀약된 것인가.
이상에서 살폈듯, 코리아의 장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흐름 속에서 1945년 7월 17일 패전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서 전시연합국회담으로서는 마지막인 회담이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스탈린 소련 총리 및 처칠 영국 총리 사이에 열렸다. 이 회담이 진행되던 때 영국에서 실시된 총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노동당이 승리함에 따라 7월 26일에 총리가 된 노동당 당수 애틀리가 7월 28일부터 영국대표단을 이끌었고 패배한 보수당 당수 처칠은 귀국했다.한때 다른 나라에서도 그러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회담에서 한반도의 분할이 밀약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얄타에서 결정된 것이 아님이 밝혀지자 그렇다면 포츠담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추측에서 출발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 회담의 기록이 사실상 모두 공개됨에 따라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다시 말하지만, 코리아에 관해 ‘분할’이라든지 ‘38도선’이라는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상기해야 할 점은 이때의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전임자와는 달리, 공산주의 그 자체와 소련에 대해 철저히 불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공산주의와 소련은 ‘생래적인 악(惡)의 존재’이면서 ‘속임수의 대가’인 만큼 처음부터 협상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견해는 비현실적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회담이 열린 시점에 미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기에 훨씬 더 큰 자신감으로 소련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를 소련과 나눠 갖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갖지 않았다.
오히려 트루먼은 ‘독일이 항복한 때로부터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가한다는 스탈린의 얄타에서의 약속을 철회시키거나 무효화시키고 싶은 희망을 가졌다. 바꿔 말해, 소련의 참전 없이 미국 단독의 군사력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그 속셈은 감춘 채 스탈린에게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할 뜻을 여전히 갖고 있는지 물었다. 스탈린은 참전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의 참전이 8월 15일 이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취지를 덧붙였다.
여기서 트루먼은 8월 초순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면 소련의 참전 없이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일본은 물론이고 코리아와 만주도 미국 단독으로 점령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그래서 트루먼은 7월 27일 우선 처칠과 공동으로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이 시점에서는 소련이 일본과 중립·불가침조약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이 선언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는 8월 8일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하면서 비로소 이 선언에 동참한다.
위에서 살폈듯, 포츠담 정상회담에서는 코리아의 분할이 전혀 거론되지도, 합의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트루먼을 수행한 미국 군사대표단과 스탈린을 수행한 소련군사대표단 사이에서는 코리아에 다한 공동점령계획이 원칙적인 수준에서 논의됐고, 대체로 코리아의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남쪽은 미국이 점령한다는 데 양해가 성립됐다. 미국 군사대표단 안에서는 미군이 점령하는 지역은 ‘38도선에 가까운 선’ 이남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됐다. 그러나 미국 군사대표단이 이 의견을 소련 군사대표단과 나누지는 않았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미국 군사대표단 사이에서 ‘38도선에 가까운 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분할 점령한다는 이 의견이 제시된 자리에 합동참모본부의 전략·정책단장 조지 링컨 준장이 참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앞으로 보듯, 그는 미국 정부가 8월 12일, 소련을 상대로 38도선에서의 분할을 제의하기로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한다.
*‘신동아’는 ‘김학준이 다시 쓴 한반도 분단 원인’을 7월 30일, 31일, 8월 1일 오전 10시 총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번 기사는 그 두 번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