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은 찰(察)이다. 남을 관찰(觀察)하고, 나를 성찰(省察)하며, 세상을 통찰(洞察)하는 도구여서다. 찰과 찰이 모여 지식과 교양을 잉태한다. 덕분에 찰나의 ‘책 수다’가 묘한 지적 쾌감을 제공한다. 정작 살다 보면 이 쾌감을 충족하기가 녹록지 않다. 이에 창간 89주년을 맞는 국내 최고 권위의 시사 종합지 ‘신동아’가 ‘지식커뮤니티 Book치고’를 만들었다. 회원들은 한 시즌(4개월)간 월 1회씩 책 한 권을 고재석 기자와 함께 읽는다.
밀레니얼은 ‘인적자본’으로 제작됐다
함께 읽은 책은 맬컴 해리스가 쓴 ‘밀레니얼 선언’이다. 원제는 ‘Human Capital and the Making of Millenials’(‘인적자본과 밀레니얼 세대의 형성’)이다. 1988년생인 저자는 인적자본을 렌즈 삼아 자기 세대가 어떻게 자본주의에 ‘길들었는지’ 샅샅이 분석한다.
책에 따르면 “인적자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을 더 큰 생산과정 일부로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공부는 어느덧 저자 말마따나 ‘21세기의 아동노동’이 됐다. 1981년부터 1997년까지 6~8세 대상인 초등교육에서 공부에 투입되는 시간은 146% 늘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는 32% 증가했다. 이 사이 헬리콥터 부모가 출현했다. 아이의 머리 위를 뱅뱅 돌면서 아이 삶을 촘촘히 관리하는 방식의 통제적 양육을 택한 부모 말이다.
바늘구멍을 뚫고 대학에 간 밀레니얼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빚잔치’다. 1979년부터 2014년까지 미국 4년제 비영리 대학의 등록금과 수업료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할 때 197% 급등했다. 2008년 2만3200달러였던 학자금 대출 평균 액수는 5년 뒤 2만8400달러로 치솟았다. 약 3400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미국 연방정부는 ‘합법적으로’ 청년을 빚쟁이로 전락시켰다.
넉넉한 보수를 지급하는 일자리는 줄었다. 금융위기는 노동시장을 망가뜨렸다. 겨우 취업해도 실질임금 상승률이 미미하다.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은 외려 늘었다. 밀레니얼은 과거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고도 과거 세대와 비슷한 수준의 돈을 받는다. 훑어보니 한국을 다룬 책인지, 미국을 다룬 책인지 모르겠다. 1990년대 출생 회원 세 명이 서평을 썼다.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종현 세종대 디지털콘텐츠학과 졸업·Book치고 3기
대학 졸업 후 시간만 속절없이 흐르고 있다. 의도와 달리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30년 인생에서 가장 긴 여백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사실 ‘직업’만 없을 뿐 대학생 때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럼에도 나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비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나라 경제가 어려워 취업이 안 된다’는 말은 핑계일 뿐이다. 전쟁 중에도 아기가 태어나듯 취업난에도 직장을 구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로써 취업 못하고 공백이 길어지는 건 ‘능력 부족’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노력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능력 부족은 나태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공백은 나태의 결과이므로 사회적 비난이 뒤따른다. 공백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하는 것뿐. 부족한 능력을 메우기 위해 뼈를 갈아 넣는 노력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여의치 않으면 부모님의 등골도 뺄 결의를 품어야 한다.
이런 세상을 살고 있자니 하루하루가 초조하고 불안하다. 부모님에 대한 죄송한 마음,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답답한 마음, 주변에 떳떳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 등이 얽히고설켰다. 그런데 잠깐! 주변에 ‘노오력’ 안 한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뭔가 이상하다.
‘밀레니얼 선언’은 내가 본 그 이상한 광경을 거시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책이다. 밀레니얼 의 삶이 고단한 건 이들을 ‘상품’으로 인식하고 양육해 온 사회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한국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공백이 길어질수록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상품은 가치가 없다. 한국의 밀레니얼에 적용해 보면 ‘공백이 길어질수록 네가 자리 잡을 직장은 희박해진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스펙 쌓기’는 밀레니얼이라는 상품을 재포장하거나 방부제 처리하는 작업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성능 상품을 구매하고자 하는 사용자에게 조금이나마 맵시 있는 재고품을 팔려는 노력인 셈이다.
저자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뒤틀린 구조는 개인의 노력(혹은 저항)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세상 탓을 하면서도 도돌이표처럼 다시 스펙 쌓기에 매달리는 게 지금의 밀레니얼이다.
이 책은 ‘밀레니얼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세대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정확히 던진다. 한국의 근현대 민주화 과정에서 386세대가 상징성을 갖게 됐듯, 밀레니얼 역시 기성세대가 구축한 사회의 산물이다. 지금껏 만들어온 사회를 우리 모두가 반추해야 할 때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 쌓은들
박새롬 단국대 포르투갈(브라질)어과 졸업·Book치고 3기
“여러분이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다는 점, 자부심을 가지고 준비하시기 바라겠습니다.” 한국직업방송 채널의 한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한 말이다. 그렇다. 밀레니얼 세대 청년들은 이 거창한 표현처럼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다.
어린 시절부터 숙제와 과외 활동으로 시간을 채웠다. 놀이터보단 학원에 가는 게 미래의 행복을 위한 가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최대한 많은 인적자본을 축적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목표만큼의 성취를 달성한 것 같은데, 앞으로도 계속 더 높은 강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평범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현실을 깨닫게 됐다.
저자는 밀레니얼 세대가 어릴 적부터 왜 숙제 기계가 되는지, ‘교육적 가면’에 속아 얼마나 많은 청년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는지, 그러면서도 왜 비용을 떠안게 되는지, 왜 노력한 만큼의 정당한 이익은 얻지 못하는지, 그 이익은 누가 가져가는지 등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1988년생 미국 밀레니얼이 쓴 이야기지만 한국의 구조적 병폐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읽는 내내 어디부터 엉켰고 어디서부터 풀 수 있을지, 풀긴 풀 수 있는 건지 답답했다. 하지만 저자는 끝내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만 잡아당기면 나머지는 술술 풀리는 마법과 같은 실마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느니 차라리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겠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 복잡한 문제의 해결책은 뭘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이 결말이 허무하기보단 마음이 편했다.
저자의 말처럼 무슨 운동을 하건, 어떤 식으로 변화를 꾀하건, 뱅뱅 도는 말장난처럼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마음과 복잡한 머릿속을 더 혼란스럽게 할 ‘겉만 번지르르한 해결책’보다는, 언젠가, 어딘가 결정적 순간은 있을 거라는 막연한 결말이 차라리 마음 편했던 것 같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밀레니얼 세대는 역사상 최고의 스펙을 갖췄다. 모두가 최고의 스펙을 갖췄기에 역설적이게도 더 적은 사람만이 성공을 맛본다. 과거보다 품질이 향상된 노동력을 더 값싸게 제공하면서도 평균 이하의 보수를 받는다. 아니, 그런 일자리마저 구하지 못한다.
옮긴이는 이 책을 잘 활용하는 방법이 책을 읽고 서로 대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세대가 겪는 부당함과 불평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사회적으로 대화할 때다.
‘아묻따’ 긍정적으로 살아보련다
황다예 한동대 언론정보학부 졸업·Book치고 3기
만화가 원작인 ‘장난스런 키스’는 한국, 대만, 일본에서 공히 리메이크될 만큼 유명한 영화다. 나는 대만 작품을 감상했는데, 반복되는 대사 하나가 귀에 걸렸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고!” 전교 1등의 엘리트-금수저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꼴찌반-흙수저 여학생 주인공에게 친구들이 주입하는 대사다. 로맨틱 코미디에 등장한 불평등 담론이라니. 돌이켜 보면 불평등은 언제나 드라마의 소재였다. 도드라진 격차를 극복한 스토리는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신데렐라’ ‘콩쥐 팥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난한 소녀가 부자 남성(소년)에게 시집가는 이야기다. 흙수저의 지위 상승은 독자에게 무의식 중 쾌감을 선사했다.
즉 불평등이라는 주제는 다루기 나름이다. 불평등을 다룬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어떻게 다뤘는지 살피는 이유기도 하다. 나는 대안을 살피곤 했다. 그런데 ‘밀레니얼 선언’의 저자는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회의적이다. 아니, 회의적이라기보단 기존 대안들에 비판적이다. 그는 ‘쉬운 답은 없다’는 제목의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현상을 논하는 책을 쓰는 사람들은 결론에 이르러 몇 가지 행동을 연속적으로 하라고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구입하라! 혹은 기부하라! 저항하라’처럼 말이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사안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뒤엉켜 있건 간에, 몇 개의 전략을 뒤섞어서 제시해 놓으면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저자는 우리가 믿어왔던, 아니 들어왔던 대안을 하나씩 해부한다. 저자의 서술에는 구조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회의감이 짙게 깔려 있다. 심지어 “어떻게 해도 지는 싸움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뿐”이라고까지 말한다. 최고의 스펙, 끝없는 노력으로 미래를 준비했지만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미국 청년도 한국 청년만큼이나 절망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려준다.
절망에만 빠져 있을 순 없는 법. 밀레니얼 세대답게 대안도 각자도생으로 찾아본다. 당장 스쳐가는 인물이 ‘장난스런 키스’ 여주인공이다. 가난에 얽매이지 않고, 놀림받아도 좌절하지 않으며, 사랑을 향해 직진해 행복을 쟁취하는 그녀 말이다. 비현실적이지만 그 ‘명랑함’에만 집중해 본다. 만화적 세계관으로 살기엔 복잡한 세상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다고 우울한 현실에 우울하게 주저앉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다. 마냥 기쁨을 빼앗기며 살 순 없지 않을까? 한 3개월은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보련다. 언젠가 올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