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5일로 우리 겨레는 분단 75주년을 맞이한다. 오늘날 남과 북을 통튼 7600만 겨레가 겪는 고통과 비극의 뿌리는 바로 이 분단이다. 분단이 있었기에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전쟁이 뒤따랐으며 37개월을 끈 이 전쟁으로 국토는 유린되고 수많은 동포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했고 다시 한 차례 큰 규모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남과 북 사이에 적대감이 높아져 오늘날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채 대결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제2의 한국전’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마저 조성되고 있다. 그러면 이 분단은 도대체 어떤 배경에서 이뤄진 것일까.
논점1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내세우는 것은 숙명론으로 비난받아야 할까.
한반도의 분단은 지정학적 위치를 떠나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새삼 말할 필요 없이, 한반도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사이에 놓여 있어서 두 세력의 전략적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 어느 한 세력이 독점적으로 장악하거나 두 세력이 타협해 분할함으로써 한 부분만이라도 갖고자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게르만 세력과 슬라브 세력 사이에 놓여 있어서 두 세력의 전략적 이해가 충돌하거나 일치된 경우 두 세력에 의해 분할되기도 했고 국가 자체가 소멸하기도 했던 폴란드에 비유되곤 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이 사실에 주목해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정립했다. 조선은 반도가 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고 해도 운명으로 받아들인 채 살아야 한다는 뜻을 명시적이건 묵시적이건 주입시킴으로써 조선=한국인의 기를 꺾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한국인들 가운데 여기에 기울어졌던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일종의 민족허무주의에 빠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 반도사관에 적극적으로 도전한 국내의 대표적 국사학자가 이기백 교수였다. 그는 반도가 주는 지정학적 제약을 인정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우수한 두뇌와 진취적 기상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반드시 그 제약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뛰어넘어 세계사의 진운을 선도하게 될 것임을 역설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역설이 억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립을 얻은 수많은 나라 가운데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는 대한민국 하나뿐이라는 현실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허허벌판 위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일으켜 세웠으며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찾는다는 것은 쓰레기 속에서 장미꽃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한 영국 기자의 비웃음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대한민국을 ‘민주화의 공고화(鞏固化) 단계’로 진입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대한민국이 절반을 차지한 채 또 다른 절반을 차지한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치하고 있는 땅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성격을 아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해양 세력을 대표하는 미국과 대륙 세력을 대표하는 중국이 힘을 겨루면서 전쟁으로 치달릴 것 같은 험악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만일 두 강대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불꽃이 한반도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긴박한 국제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어떤 정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앞날은 달라지게 된다.
논점2
38도선이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분할선이었을까.
우리는 흔히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주어진 북위 38도선에서의 분할이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분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굳이 틀린 생각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라고 말할 수 있는 분할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7세기 말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한반도 서쪽의 대동강과 동쪽의 원산만을 잇는 선을 경계로 이북은 당나라에 귀속시키고 이남은 신라에 귀속시켰던 것이다. 이 선은 대체로 북위 39도 2분에 해당된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열강이 이후 한반도의 분할을 고려할 때 자신들이 ‘한반도의 목(neck of the Korean Peninsula)’이라고 부르는 이 선을 분할선 후보에 포함시킨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자신의 명저들 가운데 하나인 ‘외교’에 “1950년 가을에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하던 때 이 선에서 멈출 수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이 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함으로써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고려 후기에도 이 선에 근접한 북위 38도 5분의 선에서 분할된 일이 있었다. 원종 10년인 1269년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 최탄(崔坦)이 난을 일으켜 오늘날의 평양인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개 성과 자비령 이북의 황해도 6개 성을 탈취한 뒤 원(元)에 귀부하자, 원 세조 쿠빌라이는 자비령을 경계로 이북을 동녕부라 명명하고 원에 내속시킴과 동시에 최탄을 동녕부 총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고려는 그때로부터 21년이 지난 충렬왕 16년인 1290년에 이르러 겨우 이 지역을 돌려받아 분할에서 벗어났다.
논점3
왜 전쟁을 전후한 시점에 분할이 논의됐는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한반도가 분할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열강이 개입된 전쟁이 예견되거나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분할이 거론됐다. 임진왜란 때의 경우 | 첫째, 임진왜란 때였다.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자 7월 명나라는 군대를 보내 조선을 지원했고 그 결과 1593년 4월 왜군은 한양에서 철수했다. 대륙국가인 중국은 조선이 해양국가 일본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대체로 이때부터 명과 왜 사이에 평화교섭이 개시됐는데, 6월에 이르러 도요토미는 7개항 조건을 제시하는 가운데 조선의 경기·경상·전라·충청 4도를 자신에게 할양하고 나머지를 조선이나 명이 통치해도 좋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웨이쉐썽(魏學僧)을 중심으로 이 제의에 잠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 요구를 거부한 데 이어 이순신 장군이 승전을 거듭한 조선과 함께 왜를 패퇴시킴으로써 분할은 예방될 수 있었다.
청일전쟁 직전의 경우 | 둘째, 그때로부터 약 300년 지난 청일전쟁 직전이었다.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짙어가던 1894년 7월 22일 영국 외무장관 킴벌리 경은 조선의 북쪽을 청이 점령하고 조선의 남쪽을 일본이 점령하는 조건 아래 두 나라가 전쟁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구상을 두 나라에 제시했다. 그는 점령의 선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만일 두 나라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그 선은 대체로 북위 38도선이었거나 거기에 근접했을 것이다.
청은 만일 자신의 점령지에 조선의 수도 한양이 포함된다면 그 제의에 응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일본은 승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 제의를 물리쳤다. 이 모든 과정에서 조선 조정은 완전히 배제돼 그러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여기서 우리는 왜 영국이 중재안을 내놓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해양국가인 영국은 같은 해양국가인 일본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이 보기에 청일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이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이 우선 절반이라도 차지할 수 있게끔 분할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아관파천의 시기 : 38도선이 최초로 제시되다 | 셋째, 아관파천 시기와 환궁 이후의 시기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크게 확보하게 되자, 조선 조정은 대륙 세력인 러시아(그때의 호칭으로는 아라사)의 힘을 끌어들여 해양 세력인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러한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의 선봉에 민비가 있었다. 일본의 대응은 야만적인 민비 시해였다. 놀란 고종은 1896년 2월 조정을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 거기서 친러내각을 유지했다.
당황한 일본은 1896년 5월 26일 모스크바의 우스펜스키 대사원에서 거행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국왕의 특사로 육군원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파견하고 그를 통해 6월 9일 러시아 외무장관 알렉세이 로바노프에게 조선의 분할을 제의하게 했다. 38도선 이북의 조선을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두고 이남의 조선을 일본의 영향권 아래 두도록 합의하자는 취지였다. 38도선이 분할선으로 제시된 최초의 경우였다.
로바노프 외무장관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때 러시아는 경상남도의 마산포(馬山浦·러시아어 표기로는 Mozampo)를 비롯한 남해안의 부동항들에 관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국왕과 정부가 자국의 공사관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자국에 결코 불리하지 않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는 조선에서도 궁내부특진관 겸 전권특명공사 민영환을 단장으로 하고 윤치호를 단원으로 하는 사절단이 참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흥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아관파천 청산 직후의 시기 | 그때로부터 다시 2년이 지나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 생활을 청산하고 경운궁으로 돌아온 이후,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격상시키면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줄어들었으며 일본의 영향력은 커졌다.
새로운 전환을 목격하면서, 1898년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알렉세이 드 스페이에는 조선 주재 일본공사에게 평양을 포함하는 조선의 북부를 러시아가 차지하고 한양을 포함하는 조선의 남부를 일본이 차지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은 거절했다.
1904년 2월 9일 인천 제물포항에서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침몰하는 러시아 여객선 ‘순가리호’를 지켜보는 조선인들. [동아DB]
이 제의에 대해, 일본은 한만(韓滿) 국경을 경계로 삼아 양쪽에 각각 50㎞의 중립지대를 설치할 것을 제의했다. 이것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뜻을 담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 제의를 거부했다. 이에 일본은 1904년 2월 10일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했으며, 그 이듬해 러시아를 완전히 굴복시켰다.
여기서 다시 상기하고자 하는 사실은 같은 해양국가인 영국의 적극적인 일본 지원이다. 대륙국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은 러시아군대가 영국의 영향 아래 있는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러시아군대는 아프리카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빠져나오는, 길고 지루한 여로를 항해했다. 이미 그 과정에서 러시아군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막상 결전장 동해에 당도하면서 예기(銳氣)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일본군에게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말았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왜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쟁이 임박한 시점 또는 전쟁이 일어난 시점에 분할이 거론됐는가. 해양 세력이나 대륙 세력은 한반도를 어느 한쪽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는 자신도 참여해 분할함으로써 절반이라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청나라를 패배시킨 데 이어 ‘강대국’ 러시아마저 굴복시킨 ‘신흥국’ 일본의 완승 앞에서, 한반도를 독점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심을 억제할 나라는 어디에도 없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해양국가로서 일본을 지원해 온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곧바로 일본과 러시아의 대표를 미국 뉴햄프셔주의 군항 포츠머스로 초청해 일본의 독점적 조선 지배를 뒷받침하는 조약을 성립시켰다. 영국은 이 조약을 지지했다. 여기에 힘입어 일본은 곧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그때로부터 5년이 채 되지 않은 1910년 8월 조선을 완전히 병탄했다.
*‘신동아’는 ‘김학준이 다시 쓴 한반도 분단 원인’을 7월 30일, 31일, 8월 1일 오전 10시 총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번 기사는 그 첫 번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