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이 만난 사람]
지금 이대로는, 나를 포함해 야권 누가 나와도 안 된다
文정권은 할 줄 아는 게 ‘과거 파헤치기’밖에 없나
코로나는 문명 전환 계기, 文정부 기준도 없이 허덕허덕
현재의 야권은 백약이 무효
한국 경제는 관치와 신자유주의 최악 조합
민주당 통합당 모두 ‘이념팔이’ 정당일 뿐
정치가 다른 분야를 다 끌어내려 하향평준화
내 길을 지키기 위해 ‘빡쎄게’ 투쟁하겠다
내가 얼마나 독한지 사람들이 잘 몰라
[조영철 기자]
그는 들어오자마자 책 한 권을 선물했습니다. ‘안철수, 우리의 생각이 미래를 만든다’가 제목입니다. 올해 1월 정계 복귀를 선언한 직후 출간한 책입니다. 지난해 유럽에 머물면서 느낀 단상과 경험을 담았다고 합니다. 안쪽 표지에 이름과 날짜를 적은 필체는 담백하고 정갈했습니다.
“필체가 좋다”는 말에 “아유, 악필인데요” 멋쩍게 웃습니다. 얼굴까지 살짝 빨개지는 모습에서 거친 정치판에서 만나기 힘든, 한마디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1월 ‘안철수, 우리의 생각이 미래를 만든다’를 출간했다. [조영철 기자]
그가 책을 건네며 “제가 쓴 열네 번째 책입니다”라고 했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전문 집필가도 그렇게 다작하기 쉽지 않은데 의사, 교수, 벤처기업인, 국회의원, 대선까지 출마한 정치인이 언제 그렇게 많은 책을 썼나 하는 생각에 말이지요. 이어 ‘정치는 말이 아니라 행동인데 에너지를 너무 분산한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 전문 저술인도 14권 쓰기는 힘듭니다.
“뭐랄까, 폭이 넓은 편입니다. 처음 쓴 책은 컴퓨터 바이러스 관련이었고, 프로그래밍 책도 있고, 경영학 교수였을 때 쓴 경영학 책도 있어요. 칼럼집도 있고요. 널뛰기가 심하죠. 참, 마라톤 책도 썼네요.”
- 책 쓰는 일이 익숙한가요.
“힘은 많이 드는데 ‘제일’ 보람 있는 일입니다. 제게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의 주제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머릿속이 마치 책상 같아집니다. 처음엔 깨끗하던 공간이 공부하면 할수록 책이 쌓이고 메모가 여기저기 나붙지요. 책상이 복잡하고 어지러워질 때 즈음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여기저기서 발췌하고 다시 책꽂이에 넣고 메모도 정리하면 공간이 자연스럽게 정리되지요. 남는 공간은 새로 쓰는 공간이 됩니다. 책 쓰는 일은 무엇보다 생각 정리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책의 주된 내용은 현장 경험입니다. 이번에도 유럽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받은 자료와 저의 경험을 갖고만 썼습니다.”
- 책을 쓰는 목적이 생각 정리 차원인가요.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시행착오를 줄여주려는 목적이 더 큽니다.”
- 주로 언제 쓰나요.
“한 권 쓰는 데 보통 석 달씩 걸려요. 아침 시간이 효율이 높습니다. 새벽 5시에 시작하는데 머리도 맑고 잡념도 없습니다. (책을 집어 들더니) 이 책 마지막 구절은 일주일 고민한 겁니다.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생각하던 중에 갑자기 떠오른 구절들입니다.”
- 한번 읽어 주시죠.
그가 주저하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한줄 한줄 읽어가는 모습이 낭송회 나온 학생처럼 진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고민을 한다면 그 문제는 풀리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사회는 그 방향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 미래는 우리가 가진 생각으로 만들어가는 가능성이며 희망이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미래를 만든다.”
“文정부 허덕허덕”
- 당신을 만나고 싶었던 건 많은 국민이 갈망하지만 새로운 정치 리더가 안 보이는 상황에서 기자 이전에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과학과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은 요즘, 의사와 벤처기업인이라는 이력이 어쩌면 국민이 원하는 캐릭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원할까요.”
문득 그의 표정에 허탈감이 스쳤습니다. 에너지 가득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습니다. 정치와 관련해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처음부터 분위기를 무겁게 가져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코로나19 사태가 금방 잦아들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문명의 전환까지 이어질까요. 어떻게 보세요.
“문명사적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전과 똑같은 사회생활은 불가능할 것 같아요. 지속 가능한 형태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을 최종 목표로 둔다면 거기에 어느 나라가 제일 먼저 도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 보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어떻게 전환할지에 대한 기준이 없습니다. 매일매일 허덕허덕합니다. 미래를 고민해야 미래가 열립니다. ‘과거 파헤치기’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어느 한 가지 주제만 갖고 계속 이야기한다면 의도적인 게 아니라 할 줄 아는 것이 그거밖에 없어서라고 하더군요(그가 농담을 던진 듯했는데 너무 진지해 따라 웃지 못했습니다). 의학적으로만 보면, 치료제와 백신이 없었던 스페인독감(1918년 발생해 2500만~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은 사라지는 데 3년 정도 걸렸습니다.”
- 포스트 코로나 시대, 정치도 바뀔 것 같지 않나요.
“처음 바이러스가 확산할 때 스트레스 테스트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스트레스 테스트요?
“각 국가가 가진 모든 역량의 실체가 드러나는 거죠. 방역 시스템은 물론 의료 자원에서부터 마스크 생산 능력까지. 문제 해결을 못하는 리더들의 민낯이 드러나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포퓰리즘이 더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장기화할수록 국가 간 실력 차이가 완전히 드러날 거예요. 우리가 방역을 잘했다고 하지만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정말 지금 필요한 건 각 분야 실력자들을 한데 모아 잘못된 것들을 고치고 이를 제도화해 미래를 대비하는 겁니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판단에 따라 과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 그런 점에서 당신의 지난 이력이 새로운 시대와 잘 맞을 것도 같은데요.
그는 이 질문에 답 없이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포퓰리즘 극성”
- 일각에서는 농업이 유망 산업으로 뜬다고도 하는데요,
“농업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많이 걱정되기도 하고요. 수년 전부터 정부가 에너지 장기수급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식량 장기수급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에서 식량자급률이 꼴찌인데 무조건 해외에서 싼 곡물만 들여와 그렇게 된 거죠. 지금 세계 인구가 78억 명인데 2030년만 돼도 100억 명을 넘어섭니다. 지구온난화 등 기상 변화로 인해 농업대국들의 생산량이 급감하면 당장 내년, 아니 올해라도 식량 무기화가 현실화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최대 피해국이 대한민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건데…. 식량자급률을 높이려면 공장형 농업을 당장 도입해야 하는데 농민들 반대가 심하지요. 정부가 나서야 할 지점이 그곳이에요. 이른바 ‘타다 금지법’ 논란에서 보듯 민간에서 새로운 영역이 열리고 그것이 세계적 트렌드라면 정부는 새로운 사업의 가능성을 열어주되 피해가 우려되는 기존 산업 종사자들을 향해서는 욕을 먹더라도 설득하면서 그분들이 살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야 하는 거죠.
특히 요즘처럼 정부와 여당을 향한 높은 지지율은 그 자체가 국가로서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욕먹는 개혁’을 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이 그 적기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권은 정권 유지하는 데만 에너지를 쓰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국가의 소중한 자산을 사유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임 유기죠.”
- 당신이 가진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다양한 의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미래통합당이 제기한 이슈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약간 목소리가 높아지며) 팩트 체크를 잘 해보시면 제가 먼저 말한 경우가 많습니다.”
- 예를 들면요?
“전일보육은 대선 공약으로 말했던 거고요. 이번에 기본소득 이슈도 먼저 이야기했는데 김종인 통합당 비대위원장이 한 것처럼 됐습니다.”
- 따라가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거군요.
“사실 아닙니다.”
“정책 이야기하면 기사화 잘 안 돼”
[조영철 기자]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민이 있어요.”
- 뭐죠.
“정책 이야기를 하면 기사화가 잘 안 됩니다. 기자들에게 물어보면 자기들도 고민이 많다고 하더군요. 정치인 막말을 받아 적으면 기사 쓰는 노력은 1인데 조회수는 100이 나오지만 정책 기사는 들어가는 에너지는 100인데 조회수는 1밖에 안 나온다는 거죠. 이런 상황을 악화시키는 게 콘텐츠 유통 구조입니다. 네이버 같은 포털이 ‘많이 본 뉴스’ ‘급상승 검색어’ 이런 걸로 여론을 왜곡시킵니다. 미래 담론 형성을 방해하는 구조죠. 더 심하게 말하면 대한민국 미래를 희생하면서 돈을 버는 유통 구조입니다. 콘텐츠 생산업체가 아니라 유통사가 돈을 더 많이 버는 이런 왜곡 구조는 절대로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 지적에 동의합니다만, 지금처럼 1인 미디어가 떠오르는 시대에 그런 유통 구조 때문에 당신의 콘텐츠가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데요.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정책을 말하면 안 봐요. 어떻게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습니다.”
“진영정치를 실용정치로 바꿔야”
- 다시 코로나 이후 세상을 이야기해 보죠.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라고 보는데요.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 경제구조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어요. 어떤 이들은 관치경제라 하고 어떤 이들은 신자유주의가 문제라 하는데 둘 다 틀렸다고 봐요. 제가 벤처기업을 할 때 보니까 우리는 대기업에 대해서는 국가가 목을 틀어쥐는 관치고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하는 여러 불공정한 관행은 신자유주의입니다. 제일 나쁜 조합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정치 세력이 없습니다.
외국 학자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해봤는데 세계적으로 이런 구조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해를 못해요. 자기들 상식하고 안 맞으니까. 저는 이런 이중구조를 고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야 경제도 살아납니다.
기업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제일 중요한 가치는 ‘자유’입니다. 최대한 자율성을 줘야 창의와 도전이 나옵니다. 이걸 막고 있는 걸 국가주의적 시각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정치가 기업이나 국민보다 위에 있다는 뿌리 깊은 사고방식을 가진 건 민주당과 통합당이 같습니다. 그게 우리나라의 잠재력을 좀먹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정치 쪽은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 없나요.
“제일 큰 문제는 거대 양당 구조입니다. 이게 꼭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근본 토대가 진영정치 문화라는 게 문제입니다. ‘조국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났듯 우리 편은 항상 옳고 상대는 항상 잘못됐다고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합리적 해결이나 합의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걸 ‘실용정치’의 패러다임으로 바꿔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용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상적인 사고방식에만 매몰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원래 정치란 게 그런 거 아닌가요. 이념에 매몰돼 계속 한쪽만 바라보면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오겠어요.”
“미래담론 향한 혁신경쟁 필요”
- 미래통합당과의 통합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언론에서 통합을 바라는 것 같아요(웃음). 계속 분위기를 만들고 띄우는데 (통합 논의는) 사실이 아닙니다. 지금 야권을 보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통합을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습니다. 오히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혁신경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저희는 아직 규모가 작긴 하지만 통합당의 김종인 위원장이 화두를 던지면 제가 받고 제가 내면 또 그쪽에서 받는 게 미래 담론을 향한 혁신경쟁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김 위원장과 의견은 많이 다르지만 긍정적인 것은 그것이 보기 드물게 나온 미래 담론이란 점입니다. 과열이 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로의 생각을 투명하게 드러내면 좋겠어요.”
- 미래통합당과의 통합에 대해서는 ‘유보’라는 표현을 써도 좋겠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지금은 혁신경쟁을 할 때입니다. 저희가 그걸 선도하겠습니다. 그러면 통합당도 ‘저렇게 작은 정당도 하는데…’ 하면서 자극받지 않을까요.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 그 자체로 국민의 관심도 모으고 신뢰도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야권의 저변이 넓어질 것이고요. 그런 일을 할 때라고 말씀드립니다.”
- 김종인 위원장과의 만남도 의미가 없겠네요.
“지금 만난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치열하게 경쟁하자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 작은 정당이라서 존재감이 없는데 대등한 경쟁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내놓는) 담론의 크기는 작지 않죠.”
- 돌아보면 2017년 대선 때 20% 지지율을 얻은 건 엄청난 정치적 자산입니다.
“연령별, 지역별로 고른 득표였죠.”
- 그걸 다 까먹은 거 아닌가요. 선거 끝나고 독일과 미국으로 날아간 게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때는 결과에 책임지고 현실 정치에서 물러난 것이었습니다.”
- 왜 지지율이 반등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요.
“아직 저한테 신뢰를 못 느끼시는 거 같아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한 부분도 있어요.”
- 감사요?
“8년 동안 실질적으로 정치의 중심에 있었는데 제가 부패했다거나 그렇게 보시지는 않는 것 같아요. 지지하지 않는 분들도 ‘저 사람은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생각이 올바르고 미래지향적이라는 것도 아시는 것 같고요. 그런데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하나 말씀드리면 그런 의구심이 생긴 게 ‘약하다’는 잘못 알려진 이미지 탓인 것 같아요. 실제 만나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권에서 그런 이미지를 악용합니다. 제 이름을 조롱해 ‘철수’한다고 놀리기도 하고요.”
- 만들어진 이미지로 피해를 보았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보시면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경력은 차치하더라도 의사 일을 집어던진 후 도전정신과 담대함을 발휘해 기업을 일으킨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 사람 관리가 문제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인적 자산을 주변에 쌓지 못한다는 지적인데요.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닌데 말이죠. 이런 지적에 동의하나요.
“함께 있다가 헤어진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굉장히 큽니다. 그런데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어요.”
-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건, 자기 자신만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닌가요.
“제가 민주당을 탈당할 때 사람을 안 잡은 거 아닙니다. 힘들지만 같이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결국은 제가 사람을 안 챙겨서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 본인의 당선 가능성이나 신념 등으로 인해 함께하지 못한 것이지, 제가 안 챙겨서 함께 못 한 거는 아닌 것 같아요.”
“드루킹 사건으로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 당해”
드루킹 댓글 조작에 가담한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김경수 경남지사가 지난해 3월 19일 항소 심 첫 공판을 마친 뒤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동아DB]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정치를 돈 벌기 위해 하면 안 됩니다. 절박감이란 표현을 쓰셨는데 저야말로 큽니다. 정치를 안 해도 되는데 8년째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벤처기업 창업했을 때 어떤 분이 ‘의사면허 있으니까 편하게 하겠지’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창업하는 의사들이 왜 그렇게 적을까요. 돈이 많거나 전문직이면 도전이 더 겁이 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사명감에 절박하고 일부 정치인들은 생계에 절박한 것이지요.”
- 생계에 절박한 게 나쁜 겁니까.
“나쁘다고 봅니다. 정치하는 목적이 월급 받는 걸 넘어 국민 세금으로 자기 편 먹여 살리기가 되면 절대 안 되지요. 사익을 추구하는 정치야말로 국민이 정치를 불신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죠. 저 같은 사람은 이 바닥에서 사명감이나 책임감 없이는 못 버팁니다. 게다가 제가 이미지 왜곡이나 모함당한 게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한번은 국회에서 나와 차를 탔는데 어떤 사람이 쫓아와 마음대로 차문을 열고 사진을 찍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차문도 못 닫고 도망치는 안철수’란 제목이 달려 기사가 나오더군요.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하루 종일 언론에서 씹어대더라고요. 아시지 않습니까. 드루킹 사건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까지 당하지 않았습니까.”
좀처럼 화를 낼 것 같지 않은 그가 화를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 드루킹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댓글 조작이 알려졌을 때 심경이 어땠나요.
“….”
순간, 그의 눈빛이 아래로 향하더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예상치 않은 긴 침묵이었습니다.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는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난 대선 때 드루킹 같은 방식의 여론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누가 제일 먼저 알았을까요? 그거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래머들, 해커들, 제가 제일 많이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안 했습니다. 옳지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 드루킹의 여론 조작 방식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드루킹까지는 몰랐지만 여론 조작이 굉장히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는 건 알았습니다.”
- 그럼 그때 폭로했어야 하지 않나요.
“제가 서툴렀습니다. 사실 많이 분노했거든요. 이런 게 딜레마입니다. 어떻든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간다고 했을 때 그게 불법적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할 것인가. 저는 안 할 것 같습니다. 선거에서 지더라도 말이죠. 실제로도 떨어졌지만요(웃음). 그렇다고 정치할 자격이 없는 건가요? 하하하.”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그의 웃음소리가 번졌습니다.
“그간 ‘설명 책임’ 부족했다”
- 정치인들이 다 불법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 않은가요. 정직과 법 준수가 당신만의 장점은 아니죠.
“물론이죠.”
- 지난 일을 복기해 보면 뭐가 제일 부족했던 것 같습니까.
“설명 책임이었습니다.”
- 설명 책임?
“사실 왜곡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진실을 알리려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 왜요? 다 알아주겠지 해서요?
“네. 바이러스 백신 V3를 무료로 배포할 때도 욕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처음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제가 세운 원칙에 따라 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진심이 다 알려지더군요. 이후 다른 분야에서도 다 그랬습니다. 회사 CEO(최고경영자) 할 때도 그랬고 대학교수 때도 그랬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굳이 변명이나 설명을 안 했습니다. 정치도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치가 다른 분야와 다른 유일한 한 가지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기득권 정치를 영위하려는 사람들의 수법
- 그게 뭔가요.
“적극적으로 왜곡하는 상대방이 있다는 거죠. 당하는 쪽이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상대의 주장이 진실처럼 여겨지더군요. 국민들이 생업에 바쁘다 보니 일일이 사실을 확인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결국 왜곡된 이미지만 남는 거죠.”
- 그다음으로 부족했던 건?
“민주당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들어간 게 잘못이었습니다.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경험이 없었다면 깊숙한 민낯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 민낯?
“우리 편 챙기기, 그게 본질이더라고요.”
- 이념이 아니고?
그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이념정당은 없다고 봅니다. 민주당이 이념정당이라면 중요한 게 ‘평등’ 아닌가요. 평등의 기반에는 공정이 있고요. ‘조국 사태’에서 보셨듯이 말로만 부르짖고 행동은 완전 반대잖아요. 보수는 또 어떤가요. 보수의 제일 가치는 ‘자유’인데 실제로는 자유를 억압하잖아요. 국가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어요. 양쪽 다 ‘이념팔이 정당’이라고 봅니다. 제대로 된, 진정한 이념정당은 양쪽 다 아닌 거죠.”
- 최근 “강하게, 빡쎄게 투쟁하겠다”고 말했는데 무슨 뜻인가요.
“스위스가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뭔가요. 무장을 통한 중립이었습니다. 저도 제 길을 지키려면 투쟁해야죠. 합리적으로 설득하면 국민이 알아주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유발 하라리가 쓴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 선거의 본질을 언급한 대목이 나오더군요. 사람들이 생각이 아닌 느낌으로 투표한다는 건데요. 유권자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워낙 사는 게 바쁘고 정보는 쏟아지는데 그걸 일일이 판단할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거기다 정치 혐오증까지 부추겨 시야를 가립니다. 그게 기득권 정치를 계속 영위하려는 사람들의 수법이지요.”
- 당신이 명성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정치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저는 이름 남기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명성을 생각했다면 정치를 하지 말았어야죠. 순식간에 국민의 절반이 적으로 돌아서지 않았습니까.”
- 나쁜 명성도 명성은 명성이죠.
“명성이라고 하면 옛날에 ‘무릎팍도사’ 나갔을 때가 최고였죠. 정치에서도 그 이상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예요.”
“내 아이덴티티(identity)는 의사인 것 같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길게 이었습니다.
“돈 명예 권력이 주어졌을 때 사람이 어떻게 바뀌는지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모르는 일 아닌가요. 저는 벤처기업 처음 창업했을 때 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빚더미에도 올라앉아 보았어요. 성공하나 싶었는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회사가 갑자기 성장해 세후 순이익이 수십억 원이 되더군요. 하지만 저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집도 그대로, 차도 그대로, 주말에 가족하고 우동집 가는 것도 똑같았어요. 아무리 돈 많이 벌고 주식 평가액이 많아져도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해 보니 돈은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후 외출하면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나를 들뜨게 하지 않았습니다. 강연 요청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강연료가 수백만 원에 달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저는 주로 돈 안 주는 강연, 이를테면 초등학교 교사 연수회 같은 곳에 재미있게 다녔습니다. 이후 더 큰 명성이 찾아왔지만 역시 저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 권력은요?
“권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회의원 됐을 때 사실 너무 힘들었습니다. 회사 사장할 때는 일주일에 하루는 쉬었는데 국회의원으로 일하면서는 하루도 못 쉬겠더라고요. 지역구에 가면 을(乙) 중에도 이런 을이 없어요.
국회의원 권력이 어떤 건지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제 지역구가 노원병인데 노원갑 지역구인 광운대에서 강연 요청이 왔어요. 그런데 강연 하루 전 갑자기 취소가 됐습니다. 노원갑 지역구 의원이 자기 지역구에 제가 온다고 강당 폐쇄를 요청했다는 겁니다. 국회의원이 가진 힘이 막강하구나 싶더군요. 권력을 저렇게 휘두르고 살면 국회의원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다고 느꼈죠. 작은 경험이었지만 ‘나란 사람은 권력을 휘두른 것에 관심이 없구나, 권력은 나를 바꿀 수 없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는 “저의 아이덴티티(identity)는 의사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의대 1학년 입학해서 군의관 마칠 때까지, 그러니까 18세에서 33세라는 젊고 예민한 시기에 형성된 의사라는 아이덴티티는 한마디로 봉사와 헌신, 문제 해결입니다. 그런 게 뼛속 깊이 있다 보니 다른 직업으로 옮겨갈 때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컴퓨터 바이러스를 잡자는 생각, 백신을 무료로 배포하겠다는 생각도 봉사 개념이었고요.”
“운이라는 건 준비와 기회가 만나는 순간”
- 봉사와 헌신의 길이 굳이 정치여야 하나요. 정치와 당신이 맞는다고 생각해요.
“사장 캐릭터랑은 맞나요? 하하하.”
화제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 요즘 ‘안철수 예언’이 화제인데요. 2022년 이슈는 뭘까요.
“아무래도 경제겠죠. 큰 고비가 여러 번 있었지요. IMF와 금융위기는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됐는데 이번에도 과연 그럴지 걱정이 많습니다. 경제가 더 힘들어지고 있는 데다 여러 가지 트렌드가 바뀌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은 화이트칼라 일자리, 로봇은 블루칼라 일자리를 없애고 있습니다. 이 초유의 시대 전환을 우리가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지가 중요합니다.”
- 여당이 미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다음 대선에서 야당에 기회가 있다고 봅니까.
“콘텐츠 이전에 신뢰 문제라서…. 지금 이대로라면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누가 나와도 안 된다고 봅니다. 저를 포함해서.”
- 당신을 포함해서? 깃발을 더 선명하게 들어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저 혼자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야권 전체가 노력해야지.”
- 다시 때가 온다는 느낌은 없나요. 그동안 수많은 도전과 성공을 했는데.
“운이라는 건 준비와 기회가 만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뿐이고요. 저는 늘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 ‘내가 지도자감’이라고 외쳐야 세력화도 이뤄지고 흡인력도 생기는 건데 자신감을 많이 잃은 듯합니다.
“대선 후보는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운명론자처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이번 총선 때 마라톤을 했습니다. 한계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겠다는 뜻은 알겠는데 꼭 그런 방법이었어야 했을까요.
“선거법 때문이었어요. 지역구 후보를 내지 않으면 동네에서 연설도 못하고 현수막도 못 걸어요. 더구나 코로나 시국이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투입 시간만큼 결과 나오는 마라톤에 위로받아”
4·15 총선 당시 ‘국토종주 선거유세’를 벌인 안철수 국민 의 당 대표(왼쪽). 마라톤으로 단련된 안 대표의 발. [동아DB, 조영철 기자]
- 오랜 시간 질문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해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마라톤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요. 뛰면 힘듭니다. 괴롭습니다. 처음 1, 2㎞는 항상 힘들어요. 쉬운 운동이 아닙니다. 하지만 정직한 운동입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완주 가능성이 높아지고 시간도 단축됩니다. 투입한 시간만큼 결과가 나와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뛸 때는 잡념이 사라집니다. 완전히 자기 본질만 남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잘 견뎌 한발 한발 내딛자는 생각만 들죠. 책에 대한 아이디어도 뛰다가 많이 얻습니다. 뛰면서 생각나는 게 있으면 보이스 메모도 하고요. 책 쓸 때 귀중한 자료가 됐습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제가 얼마나 독한지 사람들이 잘 몰라요(웃음). 제 속을 완전히 드러내면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요. 상대를 편하게 해주려는 게 오랜 기간 형성된 라이프스타일입니다. 타인에게는 관대하지만 제 자신에게는 엄청나게, 목숨을 걸 정도로 엄격합니다. 일단 입으로 뱉은 말은 죽더라도 지키자는 주의입니다. 435㎞를 마라톤으로 뛴 것 역시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살면서 저만큼 독한 사람 못 봤습니다. 저는 악(惡)한 사람이 강(强)하고, 선(善)한 사람이 약(弱)한 게 아니라 그 반대라고 봅니다. 세상에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괴물 같은 악당은 영화에나 나오는 거고요. 보통은 다 선한 사람인데 이번만 넘기자면서 타협하는 거지요. 살면서 보니까 세상은 타협하는 사람들 때문에 살기 힘들게 되더라고요. 악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입니다. 타협하고 합리화화면서 타인을 괴롭히고 사회를 어지럽혀요.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선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정말 독한 사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