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대 중앙도서관 자유게시판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를 지지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다. [문영훈 기자]
갈 길 멈추고 대자보에 눈길
21일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 게시판에 정치권의 2차 가해를 규탄하는 내용의 대자보가 게시돼 있다. [문영훈 기자]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소속 학생이라고 밝힌 2명의 작성자는 대자보를 읽고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또 다른 연대를 요청했다. 해당 대자보 옆에 형형색색의 포스트잇 40여 개가 붙어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Metoo” “#Withyou” “피해자를 지지합니다”처럼 피해자와 연대를 밝히는 내용부터 “죽음도 핑계가 될 수 없다” “철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와 같이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내용도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강의로 캠퍼스는 한산했지만 1시간여 동안 학생 10명가량이 대자보 앞에 멈춰 섰다. 서울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김모(31) 씨도 그 중 하나. 김씨는 “지난해 학내에서 교수가 학생을 성추행한 전례가 있어 학생들이 박 전 시장 관련 이슈에 더 관심이 많다”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은 성추행 의혹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성추행 이슈와 관련해 기존 정치권을 비판하는 이도 있다. 서울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모(31) 씨는 “정치권 일각에서는 ‘박원순’이라는 인물을 공적으로만 평가하려고 한다”면서 “피해자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성범죄는 죽음으로 무마할 수 없다”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 게시판에도 익명의 대자보가 붙었다. 작성자는 하루에만 4000명이 조문한 박 전 시장의 장례가 코로나19로 인한 생활 속 거리두기 상황과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여권 인사들의 박 전 시장 공적과 인품을 치하하는 발언을 2차 가해로 규정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이 10일 빈소를 찾아 박 전 시장을 “맑은 분”이라고 말한 것을 예시로 들었다.대자보는 “빈소에 놓인 그들의 조화가 성범죄 고소인에게는 침묵하라는 압박이자 2차 가해”라며 “서울시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시청 내부의 성범죄에 대해 철저히 밝혀내야 한다”는 내용으로 끝맺는다. 20대의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 진상 규명 요구는 대자보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14일 리얼미터가 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진상조사 필요성’ 조사에서 20대 중 76.1%가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는 응답을 내놓았다. 전 연령 응답 결과인 64.4%보다 높은 수치다.
연세대 4학년 이모(24) 씨는 “몇몇 정치인들의 발언을 보며 정치권이 박 전 시장의 성범죄 규명을 덮어두려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에 침묵하는 문 대통령 역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고 스스로 부를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대자보를 본 이들은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이씨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계속되는 사례를 보면 위력에 의한 성범죄가 용인되는 문화자체를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세대 3학년 박모(22) 씨도 “고위공직자들의 낡은 시각이 이번 사례로 또 다시 드러났다. 공직 사회 내부 개혁이 이뤄져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