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1
“인류 최초의 서사시를 말씀하신 건가요? 길가메시 왕에 대한?”예림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닥터Q가 어느덧 다 비운 와인 병을 굽어보며 말을 이었다.
“바로 ‘길가메시 서사시’죠! 후대의 신화에 영감을 제공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대홍수 사건도 등장하죠. 그런데 더 중요한 건 그 내용이 아닙니다! 제 주된 관심은 수메르 민족 자체에 있습니다.”
약간 들뜬 목소리로 민서가 그의 말을 받아 이어나갔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후대로 내려오며 다양한 언어로 점토판에 새겨졌어요. 좀 복잡한 얘기긴 한데, 고대 아카드어 연구를 경유해 해독도 가능해졌죠. 그런데 수메르 언어는 이 지역을 지배했던 후대의 셈족 언어와 아주 달라요.”
“고대 페르시아 언어 계통이 아닌가요?”
“아니에요! 수메르어는 교착어였어요.”
“우리 한국어와 같군요?”
“그래요. 한국어와 어순이 약간 어긋나지만 동일한 교착어였습니다. 뭐 어순이야 일본어도 한국어와 미세하게 다르거든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순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예림의 질문에 닥터Q가 민서를 대신해 대답했다.
“고대 한국어 어순이 지금과 동일했다 보십니까? 천만에요! 예컨대 함경도 방언을 봅시다. 함경도는 지리적으로 고립돼 있어서 한국어 원형을 더 잘 보존하고 있겠죠? 음…, 부정사 용법을 생각해 볼까요? 함경도 사람들은 ‘가지 않니?’라고 하지 않고, ‘아이 감메?’라고 말하죠? 부정사 어순이 도치돼 있는 겁니다.”
“어순보다는 교착어로서의 특성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수메르는 언어적으로 교착어 문화권과 밀접히 연결됩니다. 게다가 그들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죠.”
“혹시 황인종이었나요?”
고개를 가로저은 닥터Q가 대답했다.
“아뇨. 아닙니다. 혼혈이었습니다!”
“혼혈이요? 어떤?”
“유프라테스 강가에 터 잡고 살던 셈족 계열 유목민과 동방에서 새로 건너온 이주민이 서로 교배된 겁니다. 후자의 유전적 특징이 섞이며 혼혈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까맣게 변한 것이죠.”
“그럼 이주민은 황인종이었군요?”
“글쎄요. 터키 주변인 아나톨리아 출신이라는 설도 있었고, 티베트나 몽골 계통이란 설도 있었죠. 그리고 고대 한국인이라는 설도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2
일제강점기 관료 출신이던 문정창은 광복 이후 돌변했다. 역사 연구로 관심을 돌린 그는 고대 한국사로 영역을 확장하더니 비주류 역사가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그가 가야 역사에 침잠해 있던 어느 날, 낯선 노인이 연락을 취해왔다. 자신을 고대 요하문명 연구자라 밝힌 상대는 칠십 중반의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1973년 여름, 혜화동 학림다방 안으로 들어선 정창은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정창을 향해 앉으라는 손짓을 한 노인은 담뱃갑을 앞으로 내밀었다. 은하수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 정창이 상대를 주의 깊게 관찰했지만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떤 감정의 징후도 드러나지 않았다. 상대가 말했다.
“문 선생. 난 중공 쪽에도 인맥이 쬐끔은 있고, 구라파 여행도 다닐 정도로 재력도 되오. 말하자믄…, 댁을 후원할 수 있다 그 말이외다.”
성냥개비에 불을 붙여 입가의 담배로 가져가며 정창이 물었다.
“무슨 후원을 말씀하시는지?”
빙긋 웃음기를 머금은 상대가 대답했다.
“댁이 쓴 글들 읽어봤소이다. 재밌더구먼. 특히 그 뭐냐 고대사? 거 참 재밌소만.”
말없이 상대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정창이 다시 물었다.
“연구비를 적선하시겠다는 거라면 사양하겠습니다만.”
갑자기 껄껄 웃어젖힌 상대가 음산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뭐 까놓고 얘기하겠소. 댁의 연구를 물심양면 돕겠다 이거요. 수메르 문명에 관심 많으시지? 해외 자료도 많이 필요할 터인데? 아니 그렇소?”
멍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던 정창이 간신히 대답했다.
“수메르 문명이라면…, 관심이 있긴 합니다만, 왜 저를?”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챙 넓은 맥고모자를 집어 들며 상대가 말했다.
“대가는 바라지 아니하겠소. 그저 작은 모임이나 만들어주구려.”
“어떤 모임을?”
“한국 문명과 수메르 문명 사이의 연관 문제를 다루는 집단 같은 거랄까? 뭐 길게 보고 씨를 뿌려보자 이거외다.”
3
사람들이 하나둘씩 귀가하며 카페 거리는 한적해져 있었다. 닥터Q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예림이 물었다.“문정창이라는 분이 창립한 수메르문명연구회가 아직 존재한다는 말씀인가요?”
고개를 끄덕인 닥터Q가 대답했다.
“놀랍게도 현존합니다. 아니,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민서가 말했다.
“우리 모임처럼 정기 집회도 하고 세를 확장하기 위해 종교단체들과 연대도 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단군신앙과 결부된 유사종교 단체들과 말이죠.”
텅 빈 사탕봉지를 힐끗 내려다본 예림이 다시 물었다.
“그게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나요?”
민서가 대답했다.
“분기점이요.”
“분기점?”
“네, 분기점. 우리 시대에도 차원 증식은 시도되고 있을 거라 말씀드렸죠?”
“그럼 문정창 씨가 두더지였어요?”
“아뇨. 아닙니다. 그분은 순수하게 학술 연구만 하셨어요. 두더지로 의심되는 인물은 연구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다른 자예요.”
“지금까지? 1974년에 만들어졌다면서요? 그때 이미 노인이었는데 여태 생존해 있다는 건가요?”
미소를 머금은 민서가 대답했다.
“기이한 일이죠? 덕분에 우리 모임 회원들 눈에 띄게 된 거예요. 전 소설을 핑계로 그들에게 접근했습니다. 기자니까 취재를 가장했어요.”
“만나보니 어땠나요?”
“회장님으로 불리는 자는 당연히 만날 수 없었어요. 다만 분명한 사실을 하나 알아냈죠.”
“뭔가요?”
“그들의 목표. 생각해 보세요. 애초 수메르 문명의 뿌리를 만들어낸 건 두더지들이었어요. 그들 작품이었던 겁니다. 결국 추측해 보자면, 그들이 한국을 수메르 문명의 후계자로 부각해 뭔가 세계사적으로 큰일을 벌이려는 것 같아요.”
“이 작은 나라를 가지고 무슨 일을요?”
“한국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에요. 또 저들의 세계사 전략에 따라선 이 행성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지점이 될 수도 있어요. 말하자면 새로운 숙주 전쟁의 중심이 되는 거죠.”
하늘로 고개를 쳐든 예림이 별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뇌리에서 숙주 전쟁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메아리가 돼 울려 퍼졌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