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캠프보산 세계음식거리 12개국 음식점 개장
각양각색 음식만큼 사연도 다양
美軍 철수로 타격받은 동두천 새로운 활로 모색
서울지하철 1호선 보산역 교각의 그래피티 작품. 2015~2018년 한국·태국·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국적 작가 18명이 그렸다. [지호영 기자]
서울지하철 경원선 구간 보산역. 1번 출구로 나와 1~2분쯤 발걸음하면, 전철 교각 아래 캠핑장 오두막을 연상케 하는 오밀조밀한 음식 매장 13곳이 눈에 들어온다. 6월 20일 개장한 경기도 동두천시 ‘캠프보산 월드 푸드 스트리트(세계음식거리)’다. 한국, 미국, 중국, 캐나다, 프랑스, 멕시코, 페루, 미얀마 등 세계 각국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세계음식거리 기획을 맡은 경기문화재단 관계자는 “음식 매장 디자인 콘셉트를 ‘집 속의 집’으로 정했다”면서 “투명하고 개방된 형태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사용자가 직접 만들어가는 열린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경기문화재단은 지역주민·방문객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용쉼터(UBO·Unidentified Building Object)’ 2개 동도 설치했다.
6월 20일 개장한 경기 동두천시 캠프보산월드푸드스트리트(세계음식거리). [지호영 기자]
20개 점포 개점을 목표로 공모해 최종 19개가 선정됐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개장이 미뤄져 6곳이 중도 포기했다.
“세계 각국 문화가 융합하는 장(場)”
한국 록 음악 발상지인 보산동의 음악사적 배경을 다양한 캐릭터 속에 담은 그래피티. [지호영 기자]
최용덕 동두천시장은 “한국 속 이방(異邦) 도시라 할 수 있는 동두천 세계음식거리에서 세계 각국의 음식 문화를 체험할 수 있길 바란다. 나아가 서울 이태원과 같은 관광 명소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동두천시 보산동 ‘캠프보산’ 표지석(왼쪽). 미8군 제2사단 주둔지 캠프케이시가 있는 보산동 일대에는 미군 관련 상점이 여전히 영업 중이다. [지호영 기자]
이광용 동두천문화관광특구 회장은 “미군 문화가 짙게 남아 있는 보산동 일대에 자리 잡은 세계음식거리가 한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문화가 융합하는 장(場)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동두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의 또 다른 소망은 세계음식거리가 문화와 교육이 공존하는 장소로 거듭나는 것이다.
“보산동 문화관광특구 방문객의 80~90%가 미국인입니다. 생활영어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는 셈이죠. 앞으로 이곳이 음식도 즐기고 영어와 미국권 문화도 자연스레 익힐 수 있는 교육 장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퓨전 롤 요리 원향(原鄕), 밴쿠버
캠프보산에 터 잡은 남미 음식점(왼쪽). 미얀마 음식점 얌마. [지호영 기자]
세계음식거리는 각양각색의 음식만큼 점주(店主)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중국음식점 ‘라죠’를 운영하는 박소연 씨는 조선족 3세다. 중국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가 고향인 그는 중국에서 만난 남편과 7년 연애 끝에 결혼해 한국으로 이주했다. 서울에서 미용사로 일하던 박씨는 요리를 좋아했다. 평소 즐겨 먹던 궈바러우(鍋包肉·중국식 탕수육), 마라탕(麻辣) 등을 손님에게 대접하곤 했다. “맛있다”는 반응에 고무된 그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연구했다.
스테이크, 샌드위치를 파는 미국 음식점 ‘에버델리’의 변기용 씨는 6년째 보산역 근처에서 미국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세계음식거리에 각국 음식점이 입점했는데, 이왕이면 동두천의 특성을 살린 미국 음식도 선보이고 싶어 참여했다”고 밝혔다.
얌마(Yamma)는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미얀마 음식점이다. 매장을 운영하는 이한희 씨는 20대 ‘청년 사장’이다. 대학 휴학생인 그는 2018년 YMCA(기독교청년회) 해외 봉사활동으로 미얀마 수도 양곤(Yangon·옛 이름 ‘랑군’)을 찾았다. 현지인들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현지 요리도 익히게 됐다. 푸드트럭 사업을 하고 싶었던 그는 세계음식거리 사업 공고를 접한 후 미얀마 음식 매장을 열게 됐다. 주메뉴는 미얀마 소수민족 샨(Shan)족 국수요리 샨뉴들과 미얀마식 비빔국수 난지똑이다. 이씨는 “미얀마 요리라 손님들이 생소해하기는 하지만 반응이 나쁘지 않다”고 했다. 상호 ‘얌마’는 ‘미얀마’의 줄임말이다.
“캐나다 음식점도 있네요. 캐나다 음식 하면 메이플(단풍나무) 시럽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데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임소영 씨는 “한국 사람들이 캐나다 음식을 잘 모르는 게 사실이죠. 현지에서는 ‘캘리포니아 롤’ 같은 퓨전 일식을 즐겨 먹습니다. 캘리포니아 롤도 사실 밴쿠버로 이주한 일본인이 팔기 시작한 거예요”라면서 웃었다.
“외국 문화에 대한 이질감 적은 곳”
6월 27일 개장 1주일을 맞은 세계음식거리에서 열린 ‘심청가’ 공연을 관객들이 즐기고 있다. [지호영 기자]
페루 음식점을 공동 운영하는 이숙자 씨와 말레니 씨는 올케 시누이 사이다. 보산동에서 페루 음식점 사보리 라티노를 운영하던 말레니 씨의 여동생과 옷가게를 하던 이숙자 씨는 동료 상인 사이였다. 훗날 이씨의 남동생과 멜라니 씨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멜라니 씨는 “개장 후 1주일 동안 한국인 손님이 많았다. 다들 맛있다고 해서 기분이 좋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영훈 씨는 멕시코식 케사디아를 만든다. 호텔 식당, 대기업(에버랜드) 직원 식당 요리사로 20년 일했다. 동두천시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지에서 직장에 다니다 사업 공모를 보고 귀향과 창업을 결심했다. 이씨는 “보산동은 번성하던 곳이었는데 쇠락해 안타깝다”면서 “세계음식거리 개장을 계기로 다시 활기를 찾았으면 한다”고 소망을 밝혔다. “케사디아 요리점이 드물어서인지 벌써 소문이 났다. 내·외국인 할 것 없이 좋아한다”고 손님들의 반응을 귀띔했다.
세계음식거리에는 보산동 터줏대감도 새로 자리 잡았다. 스테이크, 햄버거 전문점 오륙(56)하우스가 대표적이다. 보산동 430-8번지에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쓴 간판이 인상적인 ‘오륙하우스’가 있다. 아래에 적힌 ‘Since 1969’에서 알 수 있듯 1969년 문을 연 반세기 전통의 노포(老鋪)다. 현 대표 오충호 씨의 부친 오진우(1977년 작고) 씨는 미8군 제2사단 군속(軍屬)이었다. 미군부대를 떠나게 된 오진우 씨는 자신의 성 오(吳)와 당시 부인과 네 자녀 등 ‘여섯’ 식구를 가리키는 6을 더해 ‘오륙(56)하우스’라는 상호를 정했다. 개업 이래로 52년째 매일 문을 열고 있는 경양식 식당이다. 18년간 롯데호텔에서 일한 오충호 씨는 “오륙하우스가 보산동 골목 안쪽에 자리 잡아 접근성이 나쁜 문제도 있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분점(分店)을 내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동참하게 됐다”고 한다. 보산동에서 나고 자라 흥망성쇠를 지켜본 그는 “동두천은 미군부대로 인해 예전부터 외국 문화에 대한 이질감이 적은 곳이다.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세계음식거리 개장을 계기로 더욱 다양한 외국 문화가 유입돼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동두천 클라쓰
LED조명으로 밝아진 캠프보산. 동두천시는 거리 조명을 늘려 더 밝고 안전한 거리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지호영 기자]
‘손님’들은 세계음식거리에 어떤 반응일까. 동두천시 동두천동에 거주하는 이경희 씨는 남편, 딸과 함께 개장일(6월 20일)에 이어 27일 다시 한번 발걸음했다. 강원 철원군 출신으로 동두천에 30년째 거주 중인 그는 “‘제2의 고향’ 동두천이 미군 철수·기지 이전으로 쇠락해 속상하다. 다시금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으면 한다. 세계음식거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더 다양한 나라 음식점을 유치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고등학생 딸과 함께 방문한 이진희 씨(동두천시 생연동)는 고향이 동두천이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귀향했다. 이씨는 “동두천 하면 기지촌, 미군 범죄 등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강력 범죄 발생률도 높지 않다. 자연환경, 교육환경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동두천 사람들에게는 정(情)이 있다. 보산동 그라피티 작업, 세계음식거리 개장 등으로 외지인들에게 동두천이 더 알려지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아쉬움을 피력하기도 했다. 동두천시 생연동에 거주하는 이진철 씨는 “시 당국의 노력으로 보산동 일대가 바뀌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직 갈 길이 멀다. 특히 문화 인프라스트럭처가 부족하다. 전국 시·군·구 단위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문화예술회관이 없는 곳은 동두천이 유일하다. 세계문화거리 개장을 계기로 기반시설 확충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시장과 공무원들이 적극적인 마인드로 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계음식거리 등 동두천시가 벌이는 행사의 기획을 맡고 있는 ‘동두천 클라쓰 다다다’ 이정미 총괄팀장은 “추후 각종 행사를 홍대 거리나 이태원 스타일로 꾸리는 것을 시와 협의하고 있다. 레트로(복고)·내추럴(자연)·디지털이 공존하는 동두천은 문화 콘텐츠를 만들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동두천의 변화를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