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1
“수메르에서 벌어진 인류 최초의 숙주 전쟁이요?”호기심 어린 표정을 한 예림이 닥터Q에게 되물었다.
“뭘 놀라십니까? 두 분 모두 이미 겪으셨으면서! 숙주에 숨어서 움직이는 자를 잡으려면 똑같이 육화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인류 역사 자체가 외계인 숙주 간의 전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닥터Q의 말이 끝나자마자 민서가 덧붙였다.
“교수님 전공을 예로 들어볼게요. 술탄에 빙의한 두더지가 기필코 카스피해까지 도주한 뒤에 사라졌잖아요? 아스트라바드라는 곳이었죠, 아마?”
“맞아요. ‘별의 도시’라는 뜻이에요.”
“그럼 왜 그랬을까요?”
민서의 질문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예림이 다시 사탕을 꺼내며 대답했다.
“제가 들은 말들로 추측하자면…. 일종의 미리 짜인 플롯 같은 것일 텐데, 맞나요?”
고개를 끄덕인 민서가 대답했다.
“맞아요. 플롯인 거죠. 두더지들은 지구의 차원마다 조직적으로 숨어 있으면서 행성을 멸망 쪽으로 몰고 가려는 거잖아요? 그러기 위해 숙주 속에 숨어 마치 릴레이 달리기하듯 협동하고 있는 거죠. 술탄이 아스트라바드에서 죽게 되면 이게 바통터치처럼 다음 두더지에게 보내는 실행 메시지가 되는 거예요. 철저한 분업인 셈이죠. 그리고 이런 사건의 체인이 이어지다 보면 지구 파멸의 플롯이 최종 완성되는 겁니다.”
“술탄의 죽음이 몽골제국의 서방 침략이라는 거대한 플롯이 완성됐다는 두더지들끼리의 메시지라는 건가요?”
질문하는 예림을 향해 몸을 가까이 숙인 민서가 대답했다.
“그럼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분열과 전쟁은 두더지들의 전략적 밑그림이었을 거예요. 그 과정에서 큰 퍼즐 조각 하나를 완성한 게 카스피해 사건이고.”
침묵하던 닥터Q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쨌건 두더지들은 능란하고 뛰어난 이야기꾼들입니다. 아니, 최고의 비극 시인이라 해야겠죠? 비극이 뭡니까?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실수로 파국을 맞이하는 얘기 아닙니까? 우리 인류가 딱 그런 꼴인 것이죠! 두더지들은 우리들 내면에 숨겨진 욕망과 폭력성에 기생합니다. 그런 본능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비극을 최단기간 안에 완성해내죠. 그러니까…, 우리 인류가 그들의 일개 숙주에 불과했다고 변명해 봤자, 여기 이곳, 지구 멸망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겁니다. 결코!”
2
수메르 도시국가들에서 더는 신들이 출현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신의 아들이자 반신반인이라고 주장하는 왕들이 등장했다. 어떤 왕은 자비롭게 통치해 세상을 안정시켰으나, 갑자기 요괴로 화한 왕은 폭군이 돼 파괴를 일삼았으며 세상에 온갖 분열과 전쟁을 몰고 왔다. 그럴 때마다 영웅이 나타나 폭군을 제거하곤 했지만, 때론 그 자신이 새로운 폭군이 되기도 했다. 수메르의 왕과 영웅은 대홍수 이후 사라져버린 신들을 대신해 새로운 신화의 주인공들이 됐다.3
“도시국가였던 수메르의 왕국들은 철저히 신에게 복종했죠. 제사장을 통해 전해진 신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벌이거나 멀리 떨어진 불모의 땅을 정복하기도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들이 섭정하고 있었던 셈이죠! 그게 바로 추격자와 두더지들 사이의 숙주 전쟁이었던 겁니다!”닥터Q를 뒤이어 민서가 덧붙였다.
“누가 왕 또는 영웅에게 육화되느냐에 따라 역사가 출렁인 거예요. 두더지가 역사에 잠입한 순간 비극이 움텄고, 추격자가 등장하면 진정되곤 했죠. 말하자면 숙주들은 아바타, 두더지와 추격자들은 게이머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탕 봉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예림이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추격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두더지들을 모조리 찾아내 제거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요? 전쟁이었다면서요?”
고개를 가볍게 저은 민서가 대답했다.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두더지들을 자극해 다시 대규모 충돌을 빚는다면 차원 증식도 격렬하게 발생했을 거거든요. 게다가 상대를 남김없이 소탕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그래서 전면전을 피하는 게 양측 모두에 유리했던 겁니다.”
“수고스럽더라도 두더지의 숙주들을 찾아내 은밀히 제거해야 했다, 그 말이로군요? 마치 저격수가 잠복하듯?”
“그래요, 교수님. 우리 세대에도 그런 숙주 전쟁은 진행 중일 거예요. 그걸 찾아내 뭔가 액션을 취하자는 게 우리 모임의 목표인 거고요.”
“그러기 위해선 분기점이 될 수도 있는 지점을 먼저 찾아내야 한다는 거지요?”
“그렇죠. 두더지들이 임계점을 넘겨 차원을 증식하려는 지점이 우리 시대에도 반드시 있을 거예요. 그걸 찾아내야만 하죠.”
4
“잠은 짧구나. 하지만 이 인생도 그 얼마나 짧은가! 엔키두를 만나야겠다.”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휘젓고 다니며 날뛰던 엔키두는 버르장머리 없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어마어마한 괴력으로 도시의 신전을 파괴하고 다니던 그는 길가메시를 만나 마음을 바꿨다. 노동자에게 봉급인 맥주를 나눠주던 우루크 중앙광장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관찰하기만 했다. 길가메시가 먼저 이렇게 말했다.
“이 오랜 추격전이 고통스럽지 않은가? 그대의 고향별을 쑥대밭으로 만들 셈인가?”
거대한 주먹을 불끈 쥔 엔키두가 대답했다.
“그 여교수가 함부로 떠들었나보군? 흥, 이 별은 내 고향이 아닐 수도 있어.”
크게 웃은 길가메시가 외쳤다.
“이 별은 너의 고향이다! 나는 네가 돼보았었다! 너 대신 파라나이클 여사의 아들로 육화돼 확인한 걸 나중에 얘기해 주겠다. 엔키두여! 구멍 밖에는 다른 구멍이 있을 뿐이다. 그 덧없는 노력이 왜 필요한가? 우린 여기로도 충분하다.”
입술을 꿈틀대며 한참을 망설이던 엔키두가 대답했다.
“이 두더지 놀이, 이제 지겨워지긴 했어. 그럼 이번엔 너랑 한번 놀아볼까?”
지혜의 지팡이를 치켜 올린 길가메시가 자신을 따르기 위해 몰려든 수메르 대중을 향해 외쳤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구멍들은 신들에 의해 막힐 것이다! 지금 어둠의 세력이 훔바바가 돼 모여들고 있다. 우주를 보호하기 위해 모두 단결하자!”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이끈 수메르 연합군은 훔바바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승리자 길가메시의 이야기는 서사시가 돼 점토판에 새겨져 인류 최초의 문학작품이 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