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01 통권 576호(p462~477)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미군정 행정장관 수락하러 가는 길에 좌익이 사주한 테러 당해”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정치학, 경희대 평화대학원 석좌교수 chongsiklee@khu.ac.kr
 
 

해방 정국의 대표적 지도자 몽양 여운형은 극우파에게 암살당했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몽양이 우익이 아니라 좌익에 의해 암살당했을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한국 공산주의운동 연구의 대가인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가 몽양의 딸 여연구의 증언과 구소련 비밀문서 등을 근거로 내놓은 주장이어서 이목을 끈다.

여운형, 한국독립 넘어 동양평화 주창한 선각자
박헌영의 일방적인 좌익 3당 합당에 심한 모욕
여운형 “남로당은 사대주의에 집착 대중 기만” 비난
미군정청, 우익 독주 막기 위해 여운형에 민정장관 제안
미군정청 2인자와 비밀회동 가는 길에 테러
여연구 “아버지 암살한 이는 종파분자들”

박헌영(왼쪽)과 여운형.

올해는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정국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1886~1947)이 암살된 지 꼭 60년이 되는 해다. 몽양은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게 지금까지 정설로 굳어져왔다. 그런데 지난 7월19일 열린 몽양 추모 심포지엄에서 “몽양을 박헌영 계열에서 암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박헌영은 당시 남로당의 총수였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이정식(李庭植·76) 명예교수는 ‘여운형의 이상과 선택: 냉전의 희생양’이란 논문에서 박헌영과의 관계, 좌우합작에 대한 집념 등을 중심으로 몽양의 인생행로를 재구성하면서 좌익에 의한 암살설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의 주장이 입증된다면 우리 현대사는 상당부분 다시 씌어져야 한다.

몽양은 해방전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일찍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그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로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역설했는가 하면,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또한 국제 공산당과 연대하는 등 좌우를 넘나들며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직후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일제가 물러난 뒤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그는 해방 정국에서 대중적 지지도가 가장 높은 민족지도자였다. 하지만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던 그의 노선은 좌우 양측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곤봉, 권총, 수류탄, 사제폭탄 등에 의해 12차례나 테러를 당하는 위협 속에서도 일관되게 좌우합작노선을 견지하던 그는 결국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경찰은 범행 발생 나흘 후인 7월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한지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애국투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배후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1974년 2월 공소시효가 지나자 유순필, 김흥성, 김훈, 김영성이 서울지검에 출두해 자신들이 몽양 암살에 가담했다고 자백했다. 이들은 ‘민족분열의 책임자는 여운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극우 테러단체인 혁신탐정사와 백의사로부터 입수한 권총 2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배후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아직까지 여운형 암살의 배후가 누구라고 확정할 만한 단서는 발견된 것이 없다.

몽양의 죽음은 한반도에 좌우대립을 심화시켰고, 결국 6·25전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몽양은 남과 북 양쪽에서 모두 불편한 기억이었다. 2005년에야 대한민국은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다음은 이정식 교수가 발표한 논문 ‘여운형의 이상과 선택 : 냉전의 희생양’ 전문이다. ‘편집자’

저는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위논문으로 학문에 입문했고 공산주의운동사도 연구해왔습니다만, 이번에 몽양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발견하고 배웠습니다. 특히 최근 발굴된 소련군정 문헌들은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준 반면에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소련 문헌을 발굴해서 번역하신 전현수 교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886년부터 1947년까지의 기간, 즉 몽양 여운형께서 살아계시던 시기에 대한 자료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몽양은 독립운동의 거의 모든 장면에 나타나서 활약을 했거나 배경에서 노력을 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8년 말에 그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한국 사람들이 독립을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린 일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규식을 파송한 후 장덕수, 김순애(김규식 부인) 등을 도쿄와 고국에 파송해서 3·1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어놓았고,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는 일본 수도에 나타나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연설해 많은 사람을 감복시켰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대회에 출석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들과의 연대를 굳게 하였으며, 그 후에는 국제공산당과 더불어 중국의 쑨중산(孫中山) 등과 손잡고 반제(反帝)운동, 중국혁명에 공헌했습니다.

반제운동, 중국혁명이 한국독립운동과 관계가 없던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지만 몽양은 이 모든 투쟁이 한국의 자유와 독립으로 향하는 지름길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그는 한국의 독립을 넘어 동양 전체의 평화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가 말한 평화의 개념은 왜 그가 그처럼 폭넓은 투쟁에 열중했던가 하는 질문을 풀어줍니다. 다음은 그가 1919년 11월 도쿄에서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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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교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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