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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경매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이번엔 얼마? [명작의 비밀⑰]

철학 담긴 그림의 300년 인기 비결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15일 경매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이번엔 얼마? [명작의 비밀⑰]

  • ● 1000원권 뒷면에서 매일 만나는 진경산수화
    ● 정선 작품은 국내 고미술 경매 최고가
    ● 살아생전에도 세계적 인기 화가
    ● 낭만의 김홍도라면 철학의 정선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K옥션 제공]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K옥션 제공]

1000원짜리 화폐를 보면 뒷면에 그림이 한 점 들어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의 진경산수화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이 그림이 수록된 화첩(보물 585호)은 2012년 K옥션 경매에서 34억 원에 팔렸다. 당시 국내 고미술 경매 최고가 신기록이었다. 이에 앞서 2001년엔 정선의 ‘노송영지도(老松靈芝圖)’가 서울옥션 경매에서 7억 원에 낙찰되면서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신기록을 작성한 바 있다. 

정선의 그림이 또다시 경매에 나왔다. 보물 1796호 ‘해악팔경(海嶽八景) 및 송유팔현도 화첩(宋儒八賢圖 畵帖)’. 낙찰 예상가는 50억~70억 원. 7월 15일 K옥션 경매에서 이 가격에 팔리게 되면 국내 고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게 된다.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 근현대 작가들이 한국의 미술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정선 그림이 분전하고 있는 셈이다. 18세기에도 정선의 그림을 구하기 위해 정선의 집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섰다는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왜 겸재의 그림에 욕심을 낼까.

7억 원짜리 소나무

2001년 고미술품 최고 경매가를 기록한 노송영지도(老
松靈芝圖). [인천시립미술관 제공]

2001년 고미술품 최고 경매가를 기록한 노송영지도(老 松靈芝圖). [인천시립미술관 제공]

2001년 4월, 서울의 서울옥션 경매에서 놀라운 소식이 터져 나왔다. 겸재 정선의 1755년 작 ‘노송영지도(老松靈芝圖)’가 7억 원에 낙찰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였다. 당시 ‘7억 원’은 국내 미술계에서 일대 사건이었다. 지금이야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의 작품이 수십억 원에 낙찰되는 일이 빈번하지만 2001년 당시는 사정이 달랐다. 국내 미술품 경매가 막 자리를 잡아가던 초창기였고, 그때 박수근의 유화가 3억~4억 원에 턱걸이하면서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던 시절이었다. 당시 ‘노송영지도’를 사들인 사람은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회장(당시 85세, 2007년 작고)이었다. 

2005년 6월, 또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이 회장이 ‘노송영지도’를 인천시에 기증한다는 소식이었다. 단순히 작품만 기증하는 것이 아니라 50여 년 동안 수집한 고미술품 8400여 점과 이를 소장 전시하고 있는 인천 남구 학익동의 송암미술관까지 통째로 기증했다. ‘노송영지도’는 지금 그곳에 있다. 

‘노송영지도’가 7억 원에 팔릴 때, 박수근의 유화는 3억~4억 원 정도였다. 하지만 고미술 시장은 곧 침체에 빠졌다. 반면 박수근의 유화는 2005년 9억 원, 2006년 10억4000만 원, 2007년 3월 25억 원에 팔렸다. 근현대미술이 고미술을 제치고 미술 경매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2007년 5월 박수근의 ‘빨래터’가 서울옥션 경매에서 45억2000만 원에 팔렸다.



경매를 이겨내고 독일에서 돌아온 그림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이 경북 칠곡 왜관수도원에 영구
대여한 화첩 중 함흥본궁송도(咸興本宮松圖).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이 경북 칠곡 왜관수도원에 영구 대여한 화첩 중 함흥본궁송도(咸興本宮松圖).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고미술 시장의 침체는 계속됐다. 그러던 중 2012년 9월, K옥션 경매에서 보물 585호인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이 34억 원에 팔렸다. 박수근의 그림값에는 못 미쳤지만 당시 고미술 경매 최고가 신기록을 세웠다. 고미술 애호가들은 “역시 정선이구나”라고 중얼거렸다. 낙찰자는 삼성문화재단이었다. 이 작품은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의 글씨에 겸재 정선의 산수화 4폭을 곁들인 서화첩이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은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안동의 도산서당에서 학문에 정진하는 이황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1000원짜리 지폐 뒷면에 들어 있어 익숙하다. 진품은 삼성문화재단이 갖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사본을 매일 지갑 속에 넣고 다닌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05년 10월, 독일에 있던 ‘겸재 정선 화첩’이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조국을 떠난 지 80년 만의 귀환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이 이 화첩을 경북 칠곡의 왜관수도원에 영구 대여한 것이다. 

사연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1년 서울에 한 벽안(碧眼)의 신부가 찾아왔다. 오틸리엔 수도원장이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였다. 그는 서울, 수원, 해주, 공주 등지를 둘러보면서 한국인의 일상과 종교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기억을 담아 1915년 독일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출간했다. 베버 신부는 1925년에도 한국을 찾았다. 이번에는 금강산을 여행했다. 이때 정선의 그림을 수집해 화첩으로 꾸몄고 독일어로 ‘한국의 금강산에서’란 책을 썼다. 이 화첩은 이후 오틸리엔 수도원에 보관돼 있었다. 

1973년 봄, 유학생 유준영이 독일 쾰른대 도서관에서 ‘한국의 금강산에서’를 읽게 됐다. 거기에 정선의 그림 3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한국미술사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던 그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유준영은 곧바로 오틸리엔 수도원에 정선의 그림이 있는지 수소문했다. 하지만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2년 뒤인 1975년 3월,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수도원을 찾았다. 놀랍게도 거기 정선의 그림이 있었다. 그것도 한두 점이 아니라 아예 화첩 형태였다. ‘금강산내전도(金剛山內全圖)’ ‘압구정도(狎鷗亭圖)’ ‘함흥본궁송도(咸興本宮松圖)’ 등 21점이나 들어 있는 ‘겸재 정선 화첩’이었다. 

1990년대 독일 유학 중이던 왜관수도원 소속 선지훈 신부는 오틸리엔 수도원 측에 화첩의 한국 반환을 조심스레 요청했다. 오틸리엔 수도원의 결단을 이끌어냈고 2005년 한국에 돌아왔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화첩을 경매에 부쳐달라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 회사의 거듭된 요청을 물리쳤다고 한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돈 받고 거래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겸재 정선은 한양의 북악산(당시 이름은 백악산) 자락,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자리에서 태어났다. 경복고 교정에는 정선 집터 표석이 세워져 있다. 정선은 52세에 인왕곡(지금의 서울 종로구 옥인동)으로 이사했고 이곳에서 살다 84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선은 하양(대구 근처 구미 지역), 청하(경북 포항 지역),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지역) 등 지방의 현감을 하느라 몇 차례 서울을 떠난 적이 있지만 84년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과 함께했다.

산과 함께 살며 만든 진경산수화

금강전도(金剛全圖) 외에도 정선은 금강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다수 그렸다.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금강전도(金剛全圖) 외에도 정선은 금강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다수 그렸다.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1711년 그의 나이 36세 때, 정선은 처음으로 금강산에 올랐다. 1712년에도, 그리고 1747년에도 금강산을 찾았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정선은 이외에도 여러 차례 금강산을 찾았을 것이다. 18세기 시인묵객(詩人墨客) 사이에선 우리 산하를 둘러보고 그 모습과 느낌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는 게 유행이었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금강산이었다. 당시 금강산에 관한 글과 그림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정선이었다. 

금강산 전체 모습을 그린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 ‘금강전도(金剛全圖)’, 단발령 고개에서 바라본 금강산 풍경을 그린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 금강산의 고찰을 그린 ‘장안사(長安寺)’ ‘정양사(正陽寺)’, 금강산의 폭포를 그린 ‘만폭동(萬瀑洞)’ ‘구룡폭(九龍瀑)’, 금강산의 봉우리를 그린 ‘비로봉(毗盧峯)’ ‘혈망봉(穴望峯)’ 등. 금강산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을 누비며 그 경치를 화폭으로 옮겼다. 당시 중국풍의 산수화는 관념 속의 산수였다. 하지만 겸재는 우리나라의 산수를 직접 보고 그렸다. 말 그대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다. 

정선은 84세까지 장수했다. 정선이 새로운 화풍의 진경산수화를 개척해 선보이자 많은 사람이 이를 반겼다. 정선의 집 앞에는 그의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다고 한다.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정선 또한 부지런히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그림을 많이 그렸는지, 정선이 사용해 뭉툭해진 붓을 모아놓으니 그 양이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는 얘기까지 전해 온다. 

정선의 작품은 중국에서도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정선의 커다란 그림 하나 값은 18세기 청나라 1급 궁정화가 월급의 10배가 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중국을 다녀올 사람들, 특히 역관(譯官)들에게는 정선의 그림을 한두 점 가져가는 것이 필수였다. 중국에서 정선의 그림을 팔아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선은 이렇게 국내외에서 미술시장을 견인하는 당대 최고의 인기 화가였다. 

예나 지금이나 정선의 인기는 변함없는 것 같다. 그럼, 왜 그렇게 정선의 그림을 좋아하는 걸까. 정선의 그림은 남다르다.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단연 압권은 ‘금강전도(金剛全圖)’다. 현재 국보 217호이며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다. ‘금강전도’는 금강산 전체 모습을 그린 것이다. ‘풍악내산총람’ 등 금강산 전경을 그린 다른 작품들과 기본적인 구도는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더 눈여겨보면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철학적인 그림

부드러운 토산(土山)과 날카로운 암산(巖山)을 대비해 그리는 것은 그의 다른 금강산 그림과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좀 더 독특하고 대담하다. 금강산 1만2000봉을 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전체 금강산을 원형 구도로 잡았다. 그러곤 토산과 암산을 좌우로 구분해 S자 모양으로 태극 형상을 만들었다. 오른쪽에 뾰족하고 강건한 골산(骨山)을, 왼쪽엔 부드럽고 원만한 토산을 배치했다. 

둥근 원형의 금강산 그림은 성스럽고 오묘하며 푸른 기운을 뿜어낸다. 토산과 암산은 절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화면 가득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의 대비가 대단하다. 그것은 둥근 테두리 안에서 하나의 융합을 일궈낸다. 다름 아닌 음양의 합일이다. 주역(周易)에 정통했던 정선이 음양 이론을 넣어 금강산을 철학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토산은 음이고 골산은 양이다. 음양이 만나 하나의 세상을 이루고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낸다. 태극의 원리를 금강산에 구현한 것이다. 누군가는 이 ‘금강전도’ 속의 금강산이 한 송이 꽃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림 맨 위의 비로봉부터 맨 아래 장안사 풍경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원형이 돼 연꽃봉오리처럼 보인다. 철학과 예술이 완벽하게 만났다. 

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하나의 우주다. 그 금강산을 정선은 태극으로 연결해 그림으로 표현했다. 조선시대 그림 가운에 이보다 더 철학적이고 이보다 더 장쾌한 그림이 어디 있을까. 

정선 산수화의 철학적 면모는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1806년경)의 산수화와 비교해 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김홍도 역시 산수화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으나 두 사람의 화풍이 사뭇 다르다. 김홍도의 산수화는 구도가 뛰어나고 여백이 풍부하며 시적이고 낭만적이다. 김홍도의 산수화가 감성적이라면 정선의 산수화는 지적이고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 걱정하며 그려낸 소나무

오래된 소나무를 그린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제공]

오래된 소나무를 그린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제공]

정선의 소나무 그림도 범상치 않다. 그의 작품 가운데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이 있다. 사직단에 있는 노송을 표현한 그림인데, 소나무가 매우 특이하다. 소나무는 위로 솟아났다기보다는 옆으로 자랐다. 나무가 너무 오래되다 보니 위로 곧게 서 있을 수가 없고 옆으로 뻗어난 것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굴곡이 심하다. 

정선은 왜 이 같은 소나무를 그렸을까.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는데 열흘 만에 난이 평정되고 난 뒤 조선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소나무를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랜 세월 온갖 시련을 이겨낸 저 소나무처럼 조선 왕조도 시련을 딛고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을 소나무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2001년 7억 원에 팔린 ‘노송영지도’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은 가로 103cm, 세로 147cm에 소나무를 그린 대작이다. 구불구불한 노송 한 그루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분위기를 압도하고 그 아래엔 주황빛 영지가 노송과 파격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화면엔 ‘乙亥秋日 謙齊八十歲作’(을해 추일 겸재 80세작)이라고 쓰여 있다. 을해년은 1755년이니 겸재의 나이 여든이 되던 해다. 여든의 고령에 이렇게 힘이 넘치는 대작을 그릴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정선의 소나무는 이렇게 늘 우렁차고 품격이 있다.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돌아온 정선 화첩 속 ‘함흥본궁송도’ 또한 보는 이를 압도한다.

겸재에 투자하는 까닭

우리 전통 회화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작품 ‘금강전도’. 이 작품은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의 컬렉션이다. 이 작품이 시장에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정선의 예술혼을 돈으로 따지려고 하니 참으로 송구한 일이지만, 단숨에 고미술 경매 최고가 신기록을 갈아치울 것이다. 

미술 시장은 오묘하다. 돈만을 좇는 듯해도 실은 그렇지 않다. 돈의 흐름은 절묘하게도 작품의 미학과 가치를 따라간다. 겸재 정선의 그림이 그러하다. ‘금강전도’를 다시 본다. 세로 130.6cm, 가로 94.1cm의 대작.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상서로운 기운이 푸르게 몰려온다. 양과 음이 한데 어울려 꿈틀거린다. 당당하고 장쾌하다. 아, 저것이 금강이구나, 저것이 우리의 국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예나 지금이나 겸재 정선의 그림에 기꺼이 돈을 투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문화유산학협동과정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손 안의 박물관’‘한국의 국보’ 등




신동아 2020년 8월호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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